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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밀레종`이란 말은 친일 유산인가?

道雨 2008. 12. 22. 11:38

 

'에밀레종'이란 말은 친일 유산인가?

 

 

 

친일 유산이다

 

 

聖德大王 神鐘은 8세기 중엽 석불사와 함께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소중한 유물이다.

우리민족의 탁월한 미의식을 깊이 천착했던 일본인 유종열도 이 鐘을 두고 ‘美에 있어서 東洋無比의 鐘’이라고 극찬하였다.

또 이탈리아 학자가 한국의 제철기술을 보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을 방문하러 왔을 때, 聖德大王 神鐘(또는 神鐘)을 보고 종을 만든 과학적 기법과 엄청난 크기, 아름다운 종소리에 감탄하며 1200년 전에 이미 고도의 제철기술을 가진 후손들이 자신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말에 의아해 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근에는 일본 NHK 방송국이 「세계의 종소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종소리들을 직접 답사하고 녹음했는데. 그 결과 神鐘의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되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그 어떤 종과도 비교될 수 없는 고도의 과학성과 뛰어난 예술성, 웅장하고도 긴 여운을 남기며 심금을 파고드는 소리의 우수성이 증명된 것이다. 현대의 鑄鐘匠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神鐘 재현에 노력하고 있으나 재현에는 아직 못 미치고 있다.

 

1976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간 ‘友情의 鐘’과 1985년 새로 만든 서울 ‘보신각 종’이 神鐘의 재현이라고 했지만 외모는 神鐘과 거의 닮게 만들었으나 소리에 있어서는 神鐘에 근접조차 못했다.

분명히 과학은 1200년 전과 비교가 안 되게 발전하였지만 神鐘과 같은 종소리를 흉내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鐘身에 1037자의 銘文과 18.9톤의 무게 -그 무게를 수백 년 동안 견디고 있는 작은 걸쇠- 이 모든 것에는 현대의 기술이 따라가지 못하는 소중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유물에게 굴절된 역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가 즐겨 불러주는 神鐘의 異稱이자 汚名인 ‘에밀레 종’이라는 명칭이다.

神鐘에 대한 연구는 여러 편이 있으나, 대개 「에밀레 종 설화 연구」와 설화의 내용을 과학 실험으로 밝혀내는 것에 머물고 있어 이 설화를 神鐘의 설화로 인정해 버린 결과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1925년 이전까지는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에밀레 종’이라는 명칭은 이제 신종의 진짜 이름처럼 굳혀지고 말았다.

심지어 神鐘의 재료에서 사람의 뼈 성분을 찾아내는 웃지 못 할 우스운 실험까지 한 것이다.

우리 학계가 꾸준히 친일의 역사를 밝혀내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에 붙여진 정체불명의 설화도 하루 빨리 그 진원지를 찾아내어 神鐘의 명예를 회복 시켜야 할 것이다.

이 종에 대한 본인의 조사에 의하면 학력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聖德大王 神鐘이라고 하면

‘에밀레 종’으로 알고 있으며, 전설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으로는 동화책(T.V, 라디오 동화 포함)에 의해서 이거나 학교수업을 통하여 혹은 여행지에서 가이드의 해설을 통해서 등 이었다.

이렇게 神鐘을 ‘에밀레 종’으로 알게 된 계기가 바로 광범위한 곳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동화를 통한 교육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터넷 자료 창을 열어보면 ‘성덕대왕 신종’ : ‘에밀레 종’ 은 1: 5 정도이다.

또 서점에서도 거의 대부분의 동화책에서 ‘에밀레 종’ 은 빠지지 않고 실려 있으며, 아기와 끓는 쇳물 등의 삽화로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에밀레 종’의 전설은 흉악범죄가 난무하는 21세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내용이다.

외국인들로부터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소리로 인정받은 우리 유물의 조성 배경 설화에 이런 잔인성을 부여하고 영원히 그 잔인성을 상기시키는 명칭이니 이보다 더 神鐘을 모욕할 수는 없다.

神鐘의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37자의 銘文은 이렇게 시작한다.(원문 생략)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여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 神鐘을 달아 一乘의 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중략...속은 텅 비었으나 널리 울려 퍼져서 그 메아리 다함이 없으며, 무거워서 굴리기 어려우나 그 몸체는 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중생들의 離苦得樂 또한 이 종소리에 달려있다...風俗과 民心은 金玉을 重視하지 않고 세상에서는 文學과 재주를 숭상하였다. 태자로 책봉했던 重慶이 715년 뜻밖에 죽어 靈駕가 되었으므로 죽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또 부왕(성덕대왕)이 승하 하였으므로 闕殿에 임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추모의 정이 더욱 처량하고,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大鐘 一口를 주조코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기 전에 문득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분은 경덕왕이 神鐘을 만들려고 결심한 배경이다. 경덕왕은 어머니와 부왕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과 추모의 정으로 신종을 만들어 명복을 빌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을 만들지 못하고 승하하자 8세로 등극한 아들 혜공왕이 경덕왕의 뜻을 이어받아 종을 만든다.

이 내용에서 미루어볼 때, 어린 아기를, 그것도 단순한 어미의 말실수 한마디 때문에 끓는 쇳물에 던져지게 된다는 설화의 내용은 신종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다.

‘성덕대왕 신종’이 ‘에밀레 종’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명백히 일제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곳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된 것임을 알게 하는 단서는 1925년 8월 5일자 총독부 기관지 「每日申報」창작문예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10년 이 후「每日申報」는 일제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신문이다.

이 신문의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童話가 올라있다.

그리고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렴근수의 「어밀네 종」과 함세덕의 「어밀레 종」사이에는 제법 큰 내용의 차이가 있다.

「어밀네 종」은 神鐘과는 전혀 무관함이 나타나 있는 대신, 함세덕의 「어밀레 종」은 렴근수의

「어밀네 종」을 골격으로 하고 神鐘의 銘文內容으로 살을 붙여서 설화의 사실성을 강하게 부각하였으며, 일본인을 등장시켜 일본이야말로 우리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요 낙원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킨 것으로 드러내어놓고 하는 친일행위의 내용이 그것이다. 함세덕은 유치진과 함께 1930년대 리얼리즘 연극을 주도했던 탁월한 대중작가였다.

총독부는 이런 인물을 조선역사 왜곡에 적극 이용하였던 것이다.

대중성이 강했던 영화나 연극의 교육적 효과는 즉각적이면서도 영원히 각인된다.

어린이가 읽는 동화, 어른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연극으로 이 설화를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면적인 구상 속에 온갖 식민정책이 동원되었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 왜곡의 마수가 神鐘에게 뻗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어졌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란 단어를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난에는 이효석의 단편「荒野」도 실려 있으며, 우리아이들이 즐겨 부른 동요 「책상 위의 오뚝이 우습고나야...」도 입선으로 올라 있다.

에밀레종 이야기가 이미 국내에 더러 알려져 있었던 이야기라면 신인 등단의 지면에 입선 될 리가 없다.

고전자료는 물론 근대의 어디에도 없었던 글이기 때문에 신문의 창작 문예란에 입선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1999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낸 종합조사보고서인 『성덕대왕 신종』에서 神鐘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밝혀내고 있다.

역사와 미술사,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세밀하게 밝혀 놓았음에도 왜 굳이 논고의 첫 장에 실은 역사 자료에서 「에밀레 종 傳說考」를 넣어놓았을까?

신종의 역사를 밝혀내는 조사보고서에서조차 ‘에밀레 종’ 설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우리후손들은 이 설화를 신라 때부터 내려온 설화라고 굳게 믿게 될 것이다.

神鐘은 조성 과정과 배경에 대하여 鐘身에다 기록으로 자세히 남겨 놓고 있다.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인가? 「성덕대왕신종」에 ‘에밀레’라는 친일 그림자가 더 이상 드리워지지 않도록 어린이 교육 현장에서부터 관광 가이드 교육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년순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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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의 전설은 그전에도 있었다 

 

경주국립박물관 앞뜰에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이 자리하고 있다. 이 종은 통일신라 혜공왕 때 완성되어 원래 봉덕사에 걸어두었다고 하여 간혹 봉덕사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종을 보면 누구나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말은 ‘에밀레종’이다.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정식명칭을 제쳐두고 한낱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 널리 통용되는 것은 다소간 못마땅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태여 탑골공원이라고 정색하여 말하지 않고 그저 파고다공원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때도 있었듯이, 이것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른들 너무 탓할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간혹 이 에밀레종이라는 말은 절대 쓰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 어떠한 고문헌 속에서도 에밀레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살생을 엄격히 금하는 불교에서 어린아이를 산 채로 쇳물에 넣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요지이다.

나아가 이러한 에밀레종 전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창안되어 고의적으로 유포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

이러한 일본인들의 자료로는 1920년에 발간된 오쿠다 데이의 ‘신라구도 경주지’가 가장 빠른 편이고, 경주공립보통학교장이었던 오사카 긴타로가 ‘조선’ 1921년 3월호에 기고한 ‘경주의 전설’에도 에밀레종 전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경주지역에 남아있던 에밀레 전설을 채록했던 결과이지 스스로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더구나 이 같은 전설은 이들의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에 훨씬 앞서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몇몇 서양인들에 의해서도 에밀레 전설이 진작에 채록된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시절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은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4월호에 에밀레(Ah May la) 전설을 소개한 적이 있었고, 독립운동가로 추앙되는 호머 헐버트 박사 또한 ‘코리아 리뷰’ 1901년 1월호에 에밀레(Emmille) 얘기를 채록하는 한편 1906년에는 유명한 그 자신의 저작물 ‘대한제국 멸망사’에 다시 이 얘기를 수록한 적이 있었다.

이들이 에밀레종을 서울 보신각의 그것으로 연결하고 있는 점은 엉뚱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적어도 에밀레종 전설이 일본인들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명쾌하게 가려내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에밀레종의 전설이 일본인들과는 무관하게 진작부터 있어왔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이러한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에밀레종 이야기는 그만큼 종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에서 나온 설화이지,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 전문연구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이 점에 대하여 일찍이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요요부절하는 이 종소리의 여운의 특색을 형용키 위하여 고래로 있는 흔종의 사실과 합쳐져 지어낸 설명으로 형용설명의 소박성을 우리는 오히려 예술적 흥취 있는 것으로 들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흔종’이라는 표현은 ‘새로 만든 종의 갈라진 틈을 짐승의 피로 메우는 의식’을 뜻한다.

 

결국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설조차도 성덕대왕신종의 존재를 깊이 되새겨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 한들 하등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매일신문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2008.10.6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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