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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 잡는 ‘진짜 검찰’

道雨 2010. 2. 9. 12:59

 

 

 

    살아있는 권력 잡는 ‘진짜 검찰’

<시사IN | 신호철 기자 >

 

 

"사법부 내에 '좌파 마녀사냥꾼'이 포진해 있다."
"판·검사들은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며 인류학적으로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다."
"좌파 판사로 이뤄진 재판소가 정의를 정치적 싸움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험한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누굴까.
한국 보수 언론이나 한나라당 정치가 입에서 나온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요즘 '사법부와의 전쟁'이라도 벌일 테세다.
지난 1월13일 총리는 "나는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다. 사법부의 공격은 마치 두오모 공격과 비슷하거나 더 나쁘다"라고 말했다.
두오모 공격이란 지난해 12월13일 밀라노 광장에서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당한 봉변을 말한다. 그는 당시 한 청년이 던진 두오모 성당 모형 조각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총리는 사법부의 판단을 테러에 비유한 것이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위)는 판사와 검찰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격한 표현을 쓰면서까지 사법부 비난에 나선 까닭은 요즘 사법부가 총리 심기를 건드리는 판결을 연달아 내렸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5일 밀라노 법원은 그가 소유했던 기업 피닌베스트가 1991년 판사에게 뇌물을 준 죄를 물어 약 1조3000억원의 벌금을 물렸다.
같은 달 10월7일 헌법재판소는 고위공직자 4명에게 재직 중 형사소추를 하지 않고 면책 특권을 부여한 면책특권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 전까지 이 면책특권 때문에 검찰은 현직 총리를 기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위헌 판결로 베를루스코니를 보호할 방패가 사라졌다.
2009년 10월27일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의 진짜 '변태'는 내가 아니라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나를 공격해온 밀라노의 공산주의 성향 판검사들이다"라고 비난했다.

이런 총리의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밀라노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총리 수사에 나섰다.
1월22일 밀라노 검찰의 파비오 데 파스쿠알레 검사와 세르지오 스파다로 검사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총리를 기소했다. 총리 아들인 피에르 실비오(미디어셋 부회장)와 페델레 콘파로니에리 미디어셋 회장도 같이 기소했다.
비리 내용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사업 기반인 미디어셋과 그 모기업 피닌베스트의 횡령, 세금 탈루 등 혐의였다. 검찰은 이들이 회사 돈을 횡령해 주주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세금을 탈루했다고 밝혔다.
 

정권으로부터 독립한 이탈리아 검찰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에서 '황제'에 비유된다.
미디어 재벌로 민영방송국을 장악해왔던 그는, 총리가 되면서 국영·관영 방송까지 통제하며 '현대판 빅브라더'가 되었다.
이탈리아 정치·언론·경제·문화를 주무르는 절대 권력자인 그가 딱 하나 손을 못 대는 곳이 있다. 바로 사법부다.

이탈리아에서 사법부라고 말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달리 이탈리아 사법부는 법원뿐 아니라 검찰도 포함한다. 검찰이 행정부(법무부) 소속이 아니다.
판사(Giudiziari)라는 말은 종종 수사판사(사실상 검사)를 아우르는 뜻으로 쓰인다. 베를루스코니가 벌이는 사법부와의 전쟁은 법원과의 전쟁이 아니라 검찰과의 전쟁이다.

이탈리아는 1908년 사법부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최고사법회의'(Consiglio Superiore della Magistratura)를 설립했다. 이 기구 아래 법원과 검찰이 양대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판사 검사의 임명과 인사 이동은 모두 최고사법회의 관할이다.
판사가 검사가 되기도 하고 검사가 판사가 되는 혼성 교류도 흔하다. 마피아가 폭탄 테러의 대상으로 삼는 요인이 경찰이 아니라 판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고사법회의(최고사법위원회)는 위원 33명으로 구성된다. 그중 30명은 법원과 의회가 뽑은 법조인이며 나머지 3명은 대법원장, 검찰총장, 그리고 대통령이다.
그래서인지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요즘 '좌파 대통령의 음모'라는 진영 논리를 펴며 최고사법회의를 공격했다. 2006년 취임한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공산당 출신이다.

이탈리아 검찰은 정권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59개 지방검찰 당국도 독립적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검사 동일체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검찰에서 전국적 수사를 할 수 있는 조직은 마피아수사국(DNA) 정도이다.

1992년부터 시작된 마니폴리테(깨끗한 손) 바람 때 이탈리아 검찰은 명성을 날렸다. 검찰은 정권의 비리를 파헤쳐 결국 기민당·기사당 연립정권을 붕괴시켰다. 일곱 차례나 총리를 맡았던 전설적 정치인 안드레오티도 구속했다.

이탈리아 검찰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수사를 진행해왔다. 베를루스코니는 언론과 뇌물이라는 두 수단을 동원해 수사를 무력화시켰다. 이탈리아 미디어는 검찰의 수사를 '좌파의 공작'으로 물아붙이기 시작했다.

또 담당 판사(검사)의 개인적 약점이나 사소한 치부를 과장하는 방식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확대했다.
총리로 취임하고 나서는 그동안 경찰이 맡아오던 판사(검사) 경호를 갑자기 중단시켰다. 마피아 암살이 빈번한 이탈리아 사회에서 경찰 경호 중단은 사법부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베를루스코니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 개인에 대한 공격은 스토킹에 가까웠다. 미디어셋 소속 방송사는 몰래카메라를 동원해 해당 판사의 일상을 뉴스 시간에 보여주며 모욕했다.





이탈리아 검찰은 행정부가 아니라 사법부에 속해 있다. 데 파스쿠알레 검사(오른쪽 두 번째)는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기소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의회가 사법부에 개입할 수 있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2002년 6월20일 판검사 수천명이 실비오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탈리아 판사협회(ANM) 소속 9000여 명 중 90%가 이 시위를 지지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사법부 개혁안을 결국 유보했다.
대신 2008년 4월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나 있는 '고위공직자 면책특권법'을 만들어 그해 7월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이 지난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총리와 사법부의 전쟁이 재점화한 것이다.

한국 검찰이 이탈리아 사례를 언급할 때는 주로 막강한 검찰권을 인용한다.
이탈리아 검찰은 법원 영장 없이도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고 수사 기간도 최대 2년까지 가능하다. 피의자가 타인의 범죄 내용을 누설하는 대신 자신의 벌을 감경받는 협상 제도도 있다. 한국 검찰이 환영할 만한 법이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가 '강한 검찰'을 용인하는 이유는 검찰이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검찰 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베를루스코니 지지자는 "검찰과 법원이 서로 한통속이 되면 이를 견제할 방법이 없다. 사법부 독재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지난 1월13일 사법부 개혁안 재추진을 천명했다. 이탈리아 법원은 2월 말까지 재판을 끝낸다는 계획이다.

이탈리아 사법제도가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마냥 외국의 제도를 따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법학)는 "나라마다 사법제도는 다르다. 이탈리아 사법제도와 비슷한 나라는 프랑스 정도이다. 하지만 굳이 검찰이 사법부에 속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으로 검찰 독립을 실현한 나라가 많다. 제도 이전에 사회·문화 등 인적 요소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일본, 검찰 출신 정치인 드물어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일본 사법제도는 한국과 거의 비슷하지만 요즘 일본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1월23일 일본 검찰은 도쿄 시내 한 호텔에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을 4시간30분 동안 조사했다. 오자와 간사장은 일본 정치계에서 하토야마 총리보다 더 힘이 있다고 평가받는 실세 중의 실세다. 하토야마 총리가 '얼굴 마담'이라면 오자와는 '상왕(上王)'으로 불렸다.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정치 자금 4억 엔의 출처와 허위 기재 여부 등 여러 비리 의혹을 추궁했다. 이미 1월15일 검찰은 이시카와 도모히로 현직 중의원과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 측근 2명을 체포한 바 있다. 1월29일 일본 언론은 검찰이 오자와 간사장 개인 사무실에서 2000만엔을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검찰은 한국 검찰이 따르는 모델인데,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의지에는 큰 차이가 난다. 여러 설명이 가능하다. 일본 총리나 간사장에 비해 한국 대통령의 힘은 크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문화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일본 검찰은 퇴임 후에 정치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현재 일본 중의원·참의원 727명 가운데 검찰 출신은 단 2명이다.
그중 한 명은 민주당 홍보위원장인 오가와 도시오(小川敏夫) 의원이다. 원래는 지방법원 판사였다 1976년 도쿄지검 검사가 되었다. 그 뒤 변호사 생활을 거쳐 1998년 야당 정치인이 되었고 아베 총리에게 종군 위안부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재일 한국인 참정권을 주장하는 진보 성향 정치인이다.
나머지 검찰 출신 의원 한 명도 공명당 소속이다. 자민당에는 검찰 출신이 없다.

반면 한국은 296명 국회의원 가운데 22명이 검찰 출신이다. 그중 16명이 여당인 한나라당에 있고, 대부분 고위 간부를 지냈다. 우리 검찰 고위층의 정치적 태도가 일본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자존심과 천직 의식을 강조하는 일본 검찰 문화가 마냥 옳은 것은 아니다.
현재 오자와 간사장을 수사하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뚜렷한 물증 없이 수사를 시작해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검찰 외부의 조직 견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민주당은 검찰총장에 비검사 출신 인사를 기용하는 식의 검찰 개혁안을 준비하고 있다.

<신호철 기자 / shin@sisa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