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개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

道雨 2010. 4. 23. 12:19

 

 

 

           개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

 

 

16세기 초 토머스 모어는 명저 <유토피아>에서, 그리고 19세기 말 폴 라파르그는 ‘말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각각 당시 노동자의 처지가 짐승의 처지보다도 못함을 한탄한 바 있다.

21세기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 사회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은 매우 많다. 필자도 개를 키운 적이 있다. 우리 사회의 사람처럼, 개 내부에도 ‘계급’이 있다. ‘사회귀족’이 키우는 초고가의 ‘귀족 개’가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불허한다. 반면 열악한 조건에서 주인에게 학대당하는 개, 주인의 애완 대상이었다가 버림받은 개는 ‘하층계급’에 속한다. 이러한 ‘하층계급’의 개는 우리 사람의 야만성과 비정함의 희생자이다.

 

이런 두 경우를 빼고 보통의 ‘애완견’ 또는 ‘반려견’을 상정할 경우, 우리는 이 개에게 먹이를 주고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빗질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동물전용 미용실로 데리고 가 예쁘게 다듬어주고, 예방접종이나 각종 치료를 하며, 순산을 위하여 제왕절개 수술을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보살핌에는 당연히 비용이 든다. 사람 머리 자르는 비용이 대략 1만원이라면, 개털 자르는 비용은 그 두세 배이다. 개 진료비도 사람 진료비보다 비싸다. 예컨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정한 사람의 자연분만 수가는 약 20만원이지만, 동물병원 개 자연분만 비용은 30만~40만원이다. 개 화장료는 사람 화장료보다 4~5배 비싸다.

 

많은 사람이 이런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개를 키운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부의 규모가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치열한 경쟁과 갈등 속에 지쳐 개와의 교유를 통하여 위로와 평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여하튼 이런 상황에서 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애지중지 키우는 개의 처지와 우리 사회 서민의 처지 중 어떤 것이 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을 일해야 하지만, 일자리, 주택, 자식 보육 및 교육, 노후 등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고달프고 팍팍하다. 구직을 하려 해도 비정규직이나 인턴 일자리만 널려 있다. 정규직으로 취업을 해도 구조조정으로 언제 직장에서 밀려날지 모른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저축을 한다고 해도 아파트 한 채 사기란 요원하다.

아동보육의 부담은 개인에게 떠넘겨져 있고, ‘입시지옥’은 여전하니 아이 낳기가 두렵다. 대선 시기 ‘반값 등록금’ 공약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려, 대학생 자식이 둘만 있어도 등록금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산업예비군’에도 끼지 못하는 상당수의 사람은 노숙자가 되거나 쪽방이나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다. 고령화와 가족 해체가 동시에 급속히 진행되지만, ‘효도’만 강조되지 노인복지는 유명무실하다.

 

정치적 민주화로 몇 년에 한 번씩 대표를 직접 뽑을 수 있지만, 이상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한국 사회가 개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 구성원이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기본적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유지하는 부담 역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문제는 성장최고·효율최고를 신봉하며, 동종인 사람에게는 자기가 키우는 개가 누리는 복리후생만큼의 ‘사회권’도 보장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의식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가 문제이다. ‘사회권’ 보장은 시민 자기 자신을 위한 ‘사회적 보험’인데도 말이다.

언제까지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되뇌면서 개를 부러워하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