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인혁당 사건과 공안검사들의 항명파동 (하)

道雨 2010. 4. 26. 14:51

 

 

 

     ‘인혁당’ 기소 검사 승승장구…항명 검사 좌천-사표

» 1975년 인혁당 관련자 사형집행 이후 유가족이 울부짖는 모습. 1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1차와 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다루는 검사들의 태도는 천양지차였다. 10년이란 세월은 국가관이니 충성심이니 하는 것들이 검사들의 용기와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몰아낸 기간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48. 인혁당 사건과 공안검사들의 항명파동 (하)

 

 

 

또다시 인사파동

 

사표를 냈던 이용훈 검사는, 인혁당 사건을 재조사한 한옥신 검사가 반국가단체 조직구성과 관련한 범죄사실을 빼고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사실을 변경하여 기소하자, “우리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으로 여기고 다시 출근했다.

그러나 출근 사흘 만에 이용훈과 서울지검 차장으로 인혁당의 무리한 기소에 반대했던 여운상을 서울고검 검사로 전보하고, 한옥신을 서울지검 차장으로 기용하는 인사안이 마련됐다. 여운상과 이용훈은 이 부당한 조처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했다.

이들이 사표를 내자 <경향신문>은 1964년 10월24일치 사설에서 “양심에 충실한 검사들이 푸대접받고 고분고분하기만 한 검사들이 더 중용된다고 한다면 이는 기강확립이 아니라 위신의 추락을 의미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이 제출한 사표는 20여일 후인 11월14일 결국 수리되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들이 사표를 스스로 내기야 했지만 “사실상 압력을 받아 강제로 물러난 것”이라면서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사표를 내던져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여운상 검사의 정의감과 용기를 나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 두 명으로 대표되는 ‘아직은’ 살아있던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다.”

이 사건만을 놓고 보면 중앙정보부가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당했다는 김형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 이후 검찰의 양심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꼿꼿했던 한옥신 검사, ‘불고지죄’ 겪고 공안통 변신

10년 뒤 ‘재건위’ 조작 땐 검찰, 순순히 중정 각본 따라

 

 

한옥신 검사의 기구한 사연

 

인혁당 사건의 재수사를 맡은 한옥신 검사는, 1960년 4월혁명 전야에 이승만 정권과 경찰이 마산 3·15의거를 공산당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으로 몰고 갈 때, 용공조작의 진상을 파헤쳐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일조한 용기 있는 검사였다.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대회에 경찰이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하자 경찰은 총에 맞아 숨진 희생자의 주머니에 이북삐라를 집어넣었고, 북마산파출소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공산분자의 사주로 6·25 당시 부역자가 방화한 것이라고 조작했다.

경찰의 증거물이 조작된 것이라는 점을 밝혀낸 한옥신 검사는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발포자인 박종표가 시신에 돌을 묶어 바다에 유기했다는 점도 밝혀내는 등 경찰의 조작을 낱낱이 파헤쳤다.

 

한옥신 검사는 '정부에 불리한 수사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물리치고 마산사건을 엄정히 처리해 국민의 신뢰를 받았지만, 4월혁명으로 출범한 2공화국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렀다.

민주당 정권은 1958년 이승만이 개악한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을 개정했다. 그런데 이때 국가보안법에 불고지죄라는 조항이 신설됐다.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를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조항으로 부모 형제까지 고발하라니 공산사회보다 더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말썽 많은 불고지죄가 신설되고 난 뒤 첫번째로 걸린 사람이 부산지검 정보부장(현재는 공안부)이던 한옥신 검사였다. 한옥신의 이종사촌 동생 김임종이 월북했다가 공작원으로 남파돼 한옥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는데 한옥신이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임종이 체포된 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한옥신은 연금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의 담당검사가 얄궂게도 이용훈이었다. 한옥신은 김임종의 가족들은 모두 구속 기소되었지만, 다행히 기소를 면하고 징계처분만을 받았다.

5·16 군사반란 후 최고회의 공보실은 ‘민주당 정권의 용공정책 진상’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이때 한옥신 검사 사건은 민주당 정권이 ‘용공검사’를 비호해 단순징계에 그친 사건이라고 제시됐다.

인혁당 사건이나 동백림사건같이 정권 차원에서 크게 일을 벌였다가 재판과정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한옥신이 직급과 상관없이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은 이 약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를 대표하는 공안검사로 활약한 한옥신은 잠시 치안국장을 지내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다.

 

 

 

고문 파문과 무죄판결

 

인혁당 사건은 또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이후 최대의 고문조작 사건으로 부상했다. 국회에서도 조사를 벌인 결과 검사인 국회전문위원 문상익은 피의자들의 진술의 일관성과 몸에 남아있는 상처 등을 볼 때 고문의 혐의가 농후하다고 보고했다.

피의자 중 두 명이나 조사를 받던 중 고문을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던 점도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 결과 밝혀졌다. 이 가운데 제일은행원 이종배(일명 이상배)는 1964년 7월 중앙정보부 수사국 건물에서 투신해 척추골절로 전신마비의 중증 장애인이 되었는데, 1970년 고문의 상해로부터 회복될 수 없음을 비관해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사의 항명파동과 고문논란, 검찰의 기소장 변경 등 온갖 논란 끝에 1965년 1월21일 열린 제1심 판결에서는 피고인 13명 중 도예종, 양춘우 등 2명에게만 반공법으로 유죄가 선고되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는 인혁당이라는 조직을 만든 증거는 없으나, 이들의 서클 수준의 모임이 반공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전원 유죄판결을 받았고 대법원에서는 상고를 기각하여 고법 판결을 확정지었다.

 

 

 

 

 

월북했다는 김상한은 남한이 북파한 간첩 드러나

어이없는 비극 초래한 박정권 최대 고문조작사건

 

 

 

간첩이 만든 인혁당이라는 신화

 

중앙정보부는 1964년 8월의 발표문에서, 인혁당은 1962년 1월 남파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발기인 모임을 가졌고, 김영춘은 5월 ‘북괴 중앙당’에 인혁당 창당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월북했고, 우홍선은 10월 김배영을 당 자금 수령 차 일본을 경유 월북시켰다고 주장했다.

1974년의 제2차 인혁당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유신정권은 인혁당이 간첩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조작 의혹이 제기되고, 석방운동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격앙해 법무부로 하여금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법무장관 황산덕은 1975년 2월24일 “인혁당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61년 남파된 북괴간첩 김상한이 62년 1월 조직한 지하당으로, 김은 그 후 62년 5월 사업보고와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월북, 당시 재정책이었던 김배영이 새로운 지령을 받고 공작금을 수령하기 위해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중정 발표문의 김영춘은 김상한으로 그는 동아대학교 문리대 교양학부 부교수로 있다가 사임하고, 4월혁명 후 7·29총선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인물이었다.

그가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의 창당 발기인 모임이라고 규정한 1962년 1월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월북한 것은 사실이다. 중앙정보부도 그날 모임에서 사회를 본 김상한이 월북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인혁당 관련자들이 북과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해 일을 키운 것이다.

그런데 수사를 하다 보니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남파간첩 아닌 북파간첩

 

김상한이 간첩은 간첩인데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이 아니라, 군 첩보계통에서 북으로 잠입시킨 북파간첩이었던 것이다. 김상한의 월북은 남파간첩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것이 아니라, 남쪽의 정보기관이 특수임무를 주어 1962년 7월 북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더구나 육군첩보부대에서 김상한의 북파공작을 담당했던 팀장 이 아무개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정식으로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입건돼 피의자 신문을 받았는데, 1964년 9월1일자로 되어있는 피의자 신문조서에 따르면. 자신은 김상한이 인민혁명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변명했다. 그는 김상한이 자신의 가족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자신은 북에 갔다가 꼭 돌아올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북에 가겠다고 나선 것은 “자기 목적 수행을 위하여 월북하려는 위장 구실”이었는데, 자신이 속아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아무개의 상급자로 육군첩보부대에서 김상한 북파공작의 담당과장이었던 김아무개도 정보부에서 정식으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는데, 김상한같이 혁신운동 하던 사람을 ‘포섭 조정하여 완전히 우리 사람을 만들고 가족들에 대한 생활비 등으로 도와준다면 자진월북자로 가장해 임무수행’할 것이라 생각해 김상한을 채용했다고 진술했다.

중정은 김상한이 남파간첩이 아님이 분명해졌지만, 발표문 등을 수정하지 않은 채, 김상한의 월북을 위장입북으로 몰고 간 것이다. 김상한과 가까운 혁신계 인사들은 김상한이 육군첩보부대가 아니라 미군정보기관에 의해 북파되었다고 주장했다.

 

김상한이 남파간첩이 아니라 북파간첩이었다는 점은 정보부에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런데 몇년 뒤, 인혁당사건 관련자가 진짜 간첩이 되어 나타난 일이 발생했다.

1964년의 발표문에 김배영은 1962년 10월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때 월북한 것이 아니라 형이 있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1964년 8월 인혁당사건이 발표되고 일본 경시청에서 김배영을 수배하자 오갈 데가 없어진 그는 1964년 11월 총련계를 통해 북으로 갔다가 1967년 10월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곧 체포된 김배영은 1971년 사형을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재건위가 김배영이 북에서 가져온 공작금으로 조직된 것처럼 몰고 갔다.


»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1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1차와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모두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었다.

대규모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는 정보부의 각본은 똑같았지만, 사건을 다루는 검사들의 태도는 천양지차였다.

1964년만 해도 용기와 자존심을 갖춘 검사들이 있었다. 10년이란 세월은 국가관이니 충성심이니 하는 것들이 검사들의 용기와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몰아낸 기간이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기간이었다.

정보부의 입맛대로 사건을 처리해 출세하는 검사들이 나올수록 검찰이라는 조직은 망가져갔다.

'잘못된 용기는 넘치되 부끄러움은 모르게 된 검찰'은 민주화라는 좋은 환경 속에서도 건강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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