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귀 틀어막으면 파국 맞을텐데

道雨 2010. 7. 17. 12:21

 

 

 

 

         귀 틀어막으면 파국 맞을텐데
 
» 그리스 도기 암포라에 그린 〈문어〉와 술잔 바닥에 그린 〈살해당하는 카산드라〉에서.
김태권의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

 

파울이라는 이름의 문어,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족집게처럼 미리 맞혔다고 눈길을 끌었죠.

승패를 여덟번 내리 맞힐 확률은 256분의 1. 이쯤 되면 ‘예언’이라며 입길에 오를 만도 하네요. 다만 경기 전부터 진다는 소리가 반갑지 않은 쪽도 있게 마련이라, 어떤 사람들은 ‘문어 구이로 만들어버리겠다’며 협박(?)도 했다죠.

문어에 인간이 일희일비하는 모양새가 좀 우습지만, 불길한 예언을 싫어하는 마음 역시도 인간적이긴 합니다.

 

서양에는 예부터 ‘카산드라의 예언’이란 말이 있지요.

카산드라는 트로이아의 공주였어요. 아폴론 신이 그녀를 유혹하고자 ‘예언의 능력’을 선물했다죠. 그러나 카산드라는 달랑 선물만 받고 사랑은 거절했대요.

아폴론은 화가 났지만, 신 체면에 줬던 선물을 도로 달랄 수도 없는 일. 백발백중의 예언 능력은 그대로 놔두는 대신,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으리라는 ‘뒤끝 있는’ 저주를 덧붙였어요.

결국 불편한 진실만 예언하던 카산드라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지요.

 

 

부정적인 예측을 꺼리고픈 마음이, 옛 동양이라고 달랐겠습니까.

<삼국지>에서 전풍은 원소의 참모였어요. 입바른 소리를 하다 감옥에 가지요. 전풍의 말대로 원소는 관도전투에서 조조에게 크게 졌어요.

주위에선 전풍을 보고 축하했다죠. “이제 당신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으니 당신도 중용되시겠구려!”

그러나 정작 전풍 본인은 슬퍼했대요. “원소 장군이… 패배해 수모를 겪게 되었으니 나는 살아나긴 글렀네요.”(나관중, <삼국연의>, 31회)

정사에 따르면, 원소는 돌아와 전풍을 죽이며 이렇게 말했다나요. “내가 전풍의 의견을 쓰지 않았더니, 과연 비웃음을 사는구나.”(진수, <삼국지>, 위서, 동이원유전) 얄궂은 일입니다.

 

 

미국의 마사 미첼은 ‘현대판 카산드라’로 불립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법무장관 존 미첼이 책임을 덮어쓰자, 그 부인이었던 마사 미첼은 자기 남편은 몸통이 아니라 깃털에 불과하다며 배후에 닉슨 대통령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마사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둥 정서 불안이라는 둥 불리한 언론 보도가 쏟아지면서, 아무도 마사의 말을 믿지 않았죠. 하지만 나중에 워터게이트의 전모가 드러나며, 마사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어요.(훗날 심리학에서는 ‘마사 미첼 효과’라는 개념까지 나왔다죠.)

» 김태권 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귀에 거슬리는 입바른 말을, 달갑지 않아 하는 마음이야 인지상정. 하지만 듣기 싫은 말을 듣지 않으려던 이들은 결국 아집에 사로잡혀 파국을 맞지 않던가요.

“목마를 조심하라”는 카산드라의 경고에 귀 기울였다면 트로이아 사람들의 운명은 달라졌겠죠?

전풍의 쓴소리를 받아들였다면 원소는 조조를 꺾었을지도 모르죠.

마사 미첼을 묵살하려 들지 않고 백악관이 처음부터 진실을 밝혔다면 닉슨이 그렇게 물러났을까요?

 

해명은커녕 고소고발을 쏟아내는 <한국방송> 경영진을 보며, 모르쇠와 버티기로 점철된 ‘영포게이트’를 보며,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김태권 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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