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제국 이후 한국

道雨 2011. 8. 23. 13:34

 

 

 

               제국 이후 한국 
 

 

 

“위기는 바로,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20세기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정치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묘사한 ‘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년 만에 세계 금융시장을 도미노 패닉으로 몰아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겹쳐진다.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고안하고 관리해온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가공할 재정적자와 유로존의 심화하는 재정위기….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한 패권국 미국은 쇠락 추세가 완연한데, 전통의 강자 유럽연합(EU)과 일본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버거워 보인다.

위기를 수습하고 21세기 세계의 거버넌스를 관리할 새로운 세력과 축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 세계의 눈은, 국제정치의 거인이자 떠오르는 경제강국 중국에 쏠려 있다.

중국은 ‘G2’로 불리는,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채권국이다. 하지만 중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팍스 시니카’(중국이 주도하는 세계)로 대체하기엔 아직 능력과 의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국제정치적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축의 부재’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아니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은 이런 21세기 세계질서를 ‘무극(Nonpolarity) 체제’라고 명명한 바 있다(<포린 어페어스> 2008년 5·6월호).

‘미국의 지배 이후’는 “수많은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로 힘이 분산되는 무극화 시대”라는 주장이다. 무극 체제의 세계에서 고통과 혼돈은 불가피하다.

 

 

‘한국의 길’은 어디일까?

한국은 세계 9위권의 무역대국이지만,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재조직을 주도할 힘이 없다. 이 고통과 혼돈의 시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뿐이다.

 

먹고사는 문제부터 따져보자.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90%가 넘는 통상국가다.

많은 한국인이 아직도 미·일이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중국이 압도적인 1위다.

 

관세청 통계를 보면, 2010년 한-중 무역 규모는 1884억1200만달러다. 홍콩이 중국의 주권 영역인 점을 고려해 한-홍콩 무역(272억4천만달러)까지 더하면 2156억5200만달러다. 한-일(924억7200만달러)과 한-미(902억1900만달러)를 합친 것보다 훨씬 크다.

 

무역수지를 보면, 대중국 흑자(홍콩 포함)는 무려 686억1200만달러로, 대일 적자(361억2천만달러)와 대미 흑자(94억1300만달러)는 물론, 지난해 전체 무역수지 흑자(411억7200만달러)도 훌쩍 뛰어넘는다.

더구나 한국의 대외무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수치와 추세가 뜻하는 바는 명백하다. 한국이 먹고살려면 중국과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은 만큼, 외부의 위기에 취약하다.

이런 현실은 개선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수 비중을 높여야 한다. 미·중·EU·일 등 거대 경제권은 내수 비중이 무역보다 높다.

 

한국이 현재의 경제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내수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일 방법은 외길이다. 남북 경제협력을 확대·심화해 남북 경제공동체의 기반을 닦고, 궁극적으로 통일한국을 이루는 길뿐이다. 그래야 국내시장이 획기적으로 커진다.

 

미·소의 양해와 협력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이 불가능했으리라는 국제정치학계의 평가가 웅변하듯이, 통일한국은 미·중의 양해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연하게도 한국은 미·중 양국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맹신적 한-미 동맹 강화 노선과 대북 강경 정책으로 남북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중국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다.

북한붕괴론과 중국위협론은 이명박 정권의 종교적 믿음에 가깝다.

 

이런 대북·대외 전략으로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도 감당하기 어렵다.

반평화적, 시대착오적, 망국적이다.

대북·대외 전략의 전면적 조정은 대한민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다.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