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무법한 인간들… ‘길도 없고 법도 없다’

道雨 2011. 11. 8. 18:08

 

 

 

 


  무법한 인간들  … ‘길도 없고 법도 없다’

[변상욱의 기자수첩] 욕망과 권력, FTA 파도 앞에 선 방송

(CBS / 변상욱 / 2011-11-08)


 

지난 1일 서울 목동 SBS 사옥 앞에서 지역 민영방송 노조 지부장들이 모두 머리를 깎았다. 눈물도 흘렸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방송에 청춘을 바쳐 온 방송인들이 삭발을 하는데도 방송 뉴스에는 그 소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모든 길은 종편으로 향한다

지금 방송계는 지각변동의 직전에 서 있다. 하나는 조선·중앙·동아·매일경제 4개의 대형 보수신문이 방송을 허가받아 종합편성 채널로 방송을 시작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동안 광고주-광고공사-방송사로 이어지던 지상파 방송 광고시장을 광고공사를 빼고 다시 재편하는 문제이다.

 

이 두 문제는 서로 얽혀 있다. 우리나라 방송광고 시장은 국내총생산 대비 0.7% 선에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정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광고시장의 한계를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무리하게 4개의 종합편성채널을 허용했다. KBS, MBC, SBS 지상파 텔레비전과 라디오, CBS, 평화, 불교, 교통, 극동방송 라디오, 지역 민영방송 텔레비전 등 모든 지상파 방송을 합쳐 방송광고 규모는 연간 2조 2천억 원이다.

그런데 새로 생긴 조선·동아·중앙·매경 종합편성 채널이 필요로 하는 광고 규모는 연간 1조 원이다. 방송광고 시장이 하루아침에 40% 이상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광고시장을 억지로라도 키우려 하고 있다.

 

의약품 광고를 늘리기 위한 의약품 슈퍼 판매를 허용하고 의약품을 슈퍼로 끌어내리기 위해 재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병원광고 도입을 염두에 둔 병원 영리화도 추진한다고 한다. 병원 영리화가 필요하다고 연일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신문사 중 가장 적극적인 곳이 종편을 시작하는 중앙일보이다.

 

중앙일보는 과거 삼성 계열사였고 사돈지간으로 얽혀 있다. 삼성은 생명보험과 대형병원을 소유하고 있으니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그다음은 사설학원 광고, 대학 광고가 방송광고 시장으로 본격 진입케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사교육비 인하와 대학등록금의 합리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술 광고도 점점 확대될 것이 뻔하다.

방송 광고시장은 약탈적 광고마케팅과 유혈경쟁을 피할 수 없고 자본의 입맛에 맞춘 방송 프로그램들이 아니 그런 프로그램들만이 방송을 메우게 된다.

 

이미 신문들은 이런 극한의 광고 수주 경쟁에 익숙해져 있다.

‘기사화된 광고’, ‘광고화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것으로는 쇠락해가는 신문을 살릴 수 없어 광고대상, 마케팅 대상, 경영 대상 등 온갖 이름을 붙여 기업들이 바라지도 않는 트로피를 떠안기며 대가로 광고를 유치하며 생존해 왔다.

일부 신문은 정치면은 누구에게, 사회면은 누구에게 분양해 제각각 꾸려 먹고 사는 신문도 있다 한다.

 

그동안 광고공사를 완충지대로 해 자본으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나마 유지해 온 방송이 이런 유혈경쟁에서 밀릴 것은 자명하다.

종편들은 방송 광고를 따내기 위해 신문의 힘을 끌어다 쓸 것이고 여기에 맞서기 위해 지상파 방송은 공공성, 공익성을 포기한 채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프로그램들로 채널을 채워야 한다.

지역신문과 지역방송, 공익적 중소방송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어 지역성과 다양성에서 오히려 퇴보할 수밖에 없고 견디다 못해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 모든 길은 FTA로 향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뭐가 등장할까?

MBC 민영화 이야기가 본격화될 것이다. MBC 민영화 다음은 뭘까?

한미 FTA에 의한 미국 거대자본이 우리 방송계로 침투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 자본이 한국 방송을 잠식해 들어 올 때 우리는 막아낼 수 있을까?

정부가 미국 자본을 제재하고 우리 방송을 지원하면 당장 불공정 거래가 되어 버린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공영방송에 한해서이다.

 

정부가 지원하고 외국자본이 못 들어가게 강제로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 자본에 물든 상업방송들만 가득하고 달랑 하나 남은 KBS로 우리 고유의 문화, 우리 방송의 공공성, 공익적 가치들을 지켜내기란 역부족이다.

방송의 민영화를 앞서 나간 일본이 이미 겪고 있는 문제이다. 일본의 후지, 아사히, 니혼 TV 등 민영방송에서는 이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하나 있는 NHK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며 공영방송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 모든 길은 법대로 가면 된다?

<미디어렙>은 방송사를 대신해 방송광고를 판매·조율하는 대행사이다. ‘미디어렙 설립과 운영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지면 이에 따라 방송사와 대행사, 광고 기업 간의 새로운 방송광고 시장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종편 채널들은 중간 대행사를 거치지 않고 기업과 직접 광고거래를 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조선, 중앙, 동아, 매일경제 4대 신문사가 그동안 행해 온 광고영업 체제와 시장 장악력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동안 광고대행사인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영업해 온 지상파 방송사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광고마케팅 시스템과 다져진 인맥을 갖추고 있는데다 대형 신문과 방송을 연계해 영업함으로써 매체 시너지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정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통제하고 조정해야 할 문제지만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할 마음이 없다면 시청자인 국민이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시청자들의 평가에 의해 나쁘면 채널에서 빼고 나아지면 다시 채널에 넣도록, 그렇게 하게끔 시청자가 압력을 넣을 수 있도록 시장에서의 견제장치를 마련했어야 한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는 되려 4개의 종합편성채널 모두를 ‘의무전송 채널’로 특혜를 줘 견제와 감시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 밖에도 종편들은 지상파 방송에 허용되지 않은 중간 광고도 가능하고 공익광고 비중은 낮으며, 황금 채널 배정에 방송발전기금은 감면받는 등 각종 특혜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 된다.

방송채널 허가와 광고시장 확대, 채널 배정 등등 종합편성 방송에 대한 이 모든 배려와 특혜는 정권의 수구적 재창출을 위한 정치적 안배가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마디로 방송 생태환경이 난개발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편 특혜에 대응할 최소한의 첫 걸음인 <미디어렙> 법안은 국회에서 아직도 옥신각신 논의만 벌이고 종편 방송 개국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SBS 홀딩스가 공공성을 띤 미디어렙 체제에서 빠져나가 광고자회사를 차려 독자 영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지역방송노조 대표들이 SBS 앞에서 삭발을 한 배경이다.

 

20여 년 전 노태우 정권은 건설업자에게 상업방송을 허가했다. 건설업자는 SBS를 지배하는 지주회사 SBS 홀딩스를 만들어 주식시장에 상장시켜 SBS의 이익을 가져간다. SBS를 지배하는 홀딩스를 아들에게 경영하도록 하고 홀딩스를 지배하는 건설회사 주식은 아들에게 다 넘겼다. 세습체제를 이뤄낸 것이다.

 

그런 SBS가 공공의 틀 안에 머무르려 할 리 없고 지금이 돈 벌러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20년 전 허가를 내 줄 때 예견된 참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다, 그런데 SBS가 빠져나간다 하니 MBC도 빠지겠다고 한다.

결국 이 나라 공공방송의 틀은 무너지고 이제 뒤죽박죽에 관련 법마저 없는 상태로 한미 FTA와 미국 자본을 기다려야 한다. 책임지고 관리할 방송통신위원회는 법대로 하자고 한다.

 

최시중 위원장은 “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법안을 기다리다 한계까지 온 것 아닐까 한다. 직접 독자 영업에 나선다 해도 시장에 혼란이 올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법대로 해야지 어쩌겠나.”

 

힘을 쥔 자가 법대로 하자고 할 때가 가장 교활하고 위험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법이 없으니 법대로 하자’(?)는 건 아예 힘세고 돈 많고 약삭빠른 대로 약육강식 하는 무법(無法)의 시대로 가자는 것 아닌가. 이게 방송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란 말인가. 정말 무법(無法)한 인간들이다.

 

변상욱 / CBS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