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결혼 30주년 기념 강원도 답사기 1 (영월) (2012. 5. 26)

道雨 2012. 6. 4. 20:26

 

 

 

  결혼 30주년 기념 강원도 답사기 1 (영월) (2012. 5. 26)

   

         강원도 영월에도 낙화암이 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곡성, 구례 지역을 답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이번에 결혼 30주년을 맞아 연휴를 이용, 3일간의 답사여행을 강원도로 정했다.

예전에 아들들과 함께 캠핑여행을 했던 강원도 내륙지방(태백,영월, 정선)과 강릉을 포함한 동해안 북부지역이다.

 

금요일 진료를 마치고 저녁에 출발하여 도착한 곳은 제천인데, 이곳에서 숙소를 정해 자고난 후, 아침에 바로 영월로 향하였다.

 

제천에서 영월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며, 도로 또한 잘 닦여있다.

 

영월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읍내 한복판에 있는 관풍헌이었다.

 

관풍헌은 옛 동헌 터에 있는 객사 건물이라 하는데, 영월 군청, 영월중학교 등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되어 있다.

 

청령포에 유배와 있던 단종이 홍수로 인해 이곳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던 중,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관풍헌 앞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김병연(김삿갓)은, 이곳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하필 자신이 탄핵하여 쓴 글의 주인공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 부사 김익순이었다.

나중에서야 김익순이 바로 자기의 조부였음을 알게 된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하였다고 평생을 방랑하며 살다가 화순군 동복에서 죽었는데, 역시 아버지를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둘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영월땅 태백산 기슭에 묻어주었으며, 1982년에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의 노력으로 영월읍 와석리에서 그의 묘소가 확인되었다. 

 

 

 

* 동헌 터에 남아있는 객사 건물이라고 하는데, 소유권이 보덕사에 있어서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가운데 건물에는 '藥師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오른쪽 건물에 '觀風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청령포에 유배와 있던 단종이 홍수로 인해 이곳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던 중,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은 곳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이곳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를 욕하는 글이었기에, 자책을 하고 방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 관풍헌의 한쪽 편에 있는 자규루.

본디 이름은 '梅竹樓'(안쪽에는 매죽루란 편액이 걸려 있음)이었는데, 단종이 이곳에 올라 자신의 심정을 피를 토하며 우는 두견새(자규)에 비유한 시를 읊었기에 子規樓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 단종의 능묘인 장릉.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고, 언덕 위 담장이 보이는 안쪽에 단종의 능이 있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편으로 돌아서 언덕길을 올라가면 능 앞에 까지 갈 수 있다.

 

 

 

* 뒷 편 언덕 위에 능이 있어서 정자각을 통해서는 능이 보이지 않는다.  

 

 

 

* 건물에 현판은 걸려있지 않지만, 오른편에 세워진 안내판에 '藏版屋(장판옥)'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다.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위패가 합동으로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위패는 4종류로 구분하여 비치되어 있는데, 忠臣位(충신위) 32인, 朝士位(조사위) 186인, 宦官軍奴位(환관군노위) 44인, 女人位(여인위) 6인 등 모두 268명이다.

 

** 단종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이 분들의 위패를 '배식단사'에 놓고, 음식과 함께 진열하여 제를 올린다고 한다. 

 

 

 

* 왼쪽의 것은 환관군노위 44명의 위패,  오른쪽의 것은 여인위 6명의 위패인데, 직책과 이름까지 적혀있다.

여인위 6명을 보면 宮女 1명, 宮婢 2명, 巫女 3명으로 되어 있다. 

 

 

 

* 충신위 32인의 위패.

오른쪽으로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세조의 형제들(단종의 숙부) 다섯 명, 그리고 중간에 황보인, 김종서 등과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이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의 이름도 보인다. 맨 왼쪽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능 자리에 모신 영월 호장 엄흥도가 보인다.

** 세종대왕의 아들은 모두 18명인데(20세 이전에 요절한 3명 포함), 이들 중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 소생인 대군만 8명이다.

 

 

* 조사위 186인의 위패. 충신위를 제외한, 조정에 출사한 신하들로 보인다. 

 

 

 

* 영천(靈泉). 장릉 경내에 있는 우물로서 한식 무렵이 되면 물이 차올라 제례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 엄흥도 정려각과 정려비.

단종이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했으나 모두들 후환이 두려워 주검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때 당시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마침 노루가 앉아있던 터에만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엉겁결에 땅을 파고 시신을 묻었을 뿐인데, 풍수지리가들의 말에 의하면 단종의 묘가 자리잡은 곳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영월 곳곳에서 노루의 형상을 한 기념물을 볼 수가 있다.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엄흥도(嚴興道)는 단종이 사약을 받을 당시 영월 호장으로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강물에 떠내려가던 단종의 시신을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에서 건져, 지금의 장릉 자리에 암장하고는,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1517) 임금의 명으로 찾게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 낙촌비각(駱村碑閣)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 박충원 설화

단종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주검을 거두었던  엄흥도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려지지 않고 풀섶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후로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 일곱이 원인 모르게 죽어갔다.

중종 31년(1541)에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은 꿈 속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난 후, 여기저기 단종의 묘소를 수소문하고,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안내를 받고보니 자신이 꿈 속에서 본 곳과 일치하는지라, 묘소를 수습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렸다.

 

 

 

* 拜鵑亭(배견정).

두견새를 배알하는 정자라는 뜻일진대, 왕릉에 정자가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 이름마저 독특하니, 여기에 어떤 연유가 있을까?

 

장릉 경내에 들어서면 맨 우측 구석진 담장 가까운 곳, 고목나무로 그늘진 곳에 정자가  하나 있다. 그늘이 시원하고 좋은데, 관리가 잘 안되어 허술해 보이고 청소도 소홀한 듯 보여 앉아서 쉴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도 제법 그럴 듯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 배견정 설화

배견정은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넋이 단종묘소를 찾아와, 죽어서 두견이 되었다는 단종대왕 영혼 앞에서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서, 이 정자는 1792년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현손인 박기정 부사(朴基正 府使)가 창건하였다.

 

 

*** 사육신 박팽년과 그의 9대손인 박기정 영월 부사 

      (아래의 글은 '古今同樂'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를 둘러싼 정치 변동 속에서 순천박씨 후손을 빼놓을 수가 없다. 순천박씨 후손인 박중림과 박팽년 이하 그의 아들들은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박중림은 세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4년 뒤 문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였다. 전라도와 경기도관찰사를 거친 뒤 대사헌,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성삼문, 하위지는 그의 문인이다.

 

그는 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팽년, 인년, 기년, 대년, 영년의 다섯 아들 및 손자와 함께 처형된다. 숙종 17년에 박팽년이 복관된 이후 영조때 복관되었고 정조 15년에 <장릉충신단>에 배향된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 중 단종애사에 관한 사실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추강 남효원이 지은 <육신전>과 <장릉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장릉지는 윤순거가 영월 군수로 재직하면서 편찬한 <노릉지>에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숙종 24년 단종 복위 후 박팽년의 9대손 박기정과 안동 사람 권화가 약간의 사실을 증보하여 간행했다. 여기에는 단종의 역사, 분묘, 제축 과 육신전, 단종복위, 6신복관 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세종 16년 알성문과를 거쳐 호당에 들어갔다.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아버지 및 인년 이하 동생과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과 상왕(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헌, 순, 두 아들까지 함께 처형되었다.   숙종 17년에 복관되고 다시 충정의 시호를 받았다. 정조 15년에 왕명으로 아버지 및 6신과 함께 장릉충신단에 배향된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 수양대군이 영의정이었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박팽년이 지은 시가 장릉지에 실려 있다.

 “묘당 깊은 곳에 거문고 소리 구슬프구나. 세상만사가 오늘과 같을지 모두 알지 못하였네.”

앞날을 예견한 내용이다.

옥중에 있을 때 세조가 회유하고자 사신을 보내 “하여가”를 부르게 하였다. 이 때 그는 “아무리 여필종부라 한들 임마다 좇을손가”라는 단가로 답하였다.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유학자적 절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굳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박팽년에게는 헌, 순 등 두 아들이 있었다. 모두 함께 처형되었으므로 후손이 끊어질 뻔했다.

둘째 며느리였던 성주임씨가 임신 중이었다.

나라에서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명하였다. 이씨는 남아를 낳자 여종의 딸과 바꾸어 자손을 보존하였다.

이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박비>다. 비는 노비라는 뜻이다. 자칫 박팽년가의 후손이 끊어질 위기에서 그가 살아난 것이다.

성종 즉위 후 박비는 상경하여 자신의 신분을 고한다. 성종은 특사령을 내리고 이름을 그때 일산으로 고쳐 주었다.

 

 

* 나무 그늘이 좋은 배견정.

 

** 또 다른 배견정 설화('心鄕'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해 옮겨왔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조카에게 사약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씨 왕가의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게 하였으니, 순수한 서인(평민)홍위(弘暐)라는 이름으로 사약을 받아

10월 24일 유시(酉時.오후5시~7시 사이)에 영월의 관아 관풍헌에서 승하하시게 됩니다.

이때에 노산군을 모시던 여섯 명의 시녀(궁녀 1인, 시녀 2인, 종인 3인)는 영월을 굽이돌아 흐르는 금장강(錦障江. 동강의 옛 이름)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잘 모실 수 있을까 애를 썼었는데, 노산군이 먼저 이승을 하직하게 되자 ‘우리들이 살아서 무엇하랴, 저승에서라도 편히 모시자’ 라는 듯이, 높디높은 절벽위에서 짙푸른 강물로 뛰어내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를 후대에는 순절지처(殉節地處)라 하고, 낙화암(落花巖)이라 불리게 됩니다만, 바로 이 순절한 여섯 시녀의 영혼이 두견이 새가 되어 노산군이 암장되어 있는 동을지산(冬乙智山)을 연일 찾아와 임금의 문안을 여쭙는 듯이, 영혼을 위로하듯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단종이 승하하신지 335년 째 되던 해인 1792년에 이르러서야 박기정(朴基正) 영월부사가 귀를 열고 있었으니 아무도 듣지 못하던 영혼의 소리를, 심안으로 들려오는 두견이 새들의 문안 여쭙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가림 없이 편안하게 임금을 배알하라고 정자를 세워 그 이름을 배견정이라 짓고, 그 증거 남기기를 정자의 초석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 오른쪽에 배견암(拜鵑岩)이라 새기게 되었다 합니다.

 

*** 위 두 가지 설화의 차이점은, 

하나는 낙화암에서 순절한 여인들의 넋이 이곳에서 단종(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다 여기고)을 배알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인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이곳에  찾아와 단종의 무덤을 향해 우는 것을 애석히 여긴,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정 부사가 두견새(여인들의 넋)를 경배하여 지은 정자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간에 낙화암에서 숨진 여인들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 이제 단종을 모시던 여섯 명의 여인들이 순절한 현장, 영월의 낙화암으로 가 보자. 

관풍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월 향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쪽에 금강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낙화암 근방에 금강정이란 잘 생긴 커다란 정자가 있고, 금강정의 윗쪽에 단종을 위해 순절한 여인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민충사가 있다.

 

 

 

* 단종을 위해 순절한 여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인 민충사. 

 

 

 

* 민충사 현판 글씨가 참으로 정갈하다.

 

 

* 사당 안에는 두 개의 위패가 있다.

오른쪽에는 '侍女之神位(시녀지신위)', 왼쪽에는 '從人之神位(종인지신위)'라고 써있다.

장릉 장판각의 여인위는 궁녀 1인, 궁비 2인, 무녀 3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구분이 다르다.

또 다른 순절한 인물들을 포함하는 것인지, 같다면 어떻게 나뉘어지는지, 그냥 궁금하다.

 

 

 

 

* 민충사 사당 바로 아래 낙화암 자리에 서 있는 정자인 금강정.

금강정 밑에 흐르는 강이 동강이다. 

 

 

* 금강정 옆, 난간에서 내려다 본 동강. 

이 밑의 암벽에는 '落花巖'이라고 새긴 각자가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았다.

위험해서 접근 금지... 

 

 

 

* 낙화암과 민충사가 있는 곳에 자리한 정자 錦江亭(금강정).

이 금강정 일대의 숲이 금강공원이며, '구렁이 출몰지역' 안내판도 있다.  

 

 

*** 민충사와 관련한 아래의 글은 [이은정의 문화재사랑]에서 옮겨왔습니다.  ^**^

 

영월에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난 조선왕조의 6대왕인 단종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많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청령포를 비롯하여 관풍헌, 자규루, 창절사 등은 모두 단종과 관련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나, 강원도 문화재자료 27호로 지정된 민충사(愍忠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백제의 궁녀들이 몸을 던진 부여 백마강의 낙화암과 백화정(百花亭)은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모든 사전에 기록되었으나, 단종의 시녀들이 몸을 던진 영월 동강의 낙화암과 민충사는 단 한 줄도 기록된 사전이 없으니 널리 알려질 수가 없다.

조선왕조의 6대왕인 단종은 1441년에 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조선왕조 5대왕인 문종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며, 비는 정순왕후 송씨이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단종은 왕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모든 정치는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이 처리하였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요 문종의 다음 동생인 혈기왕성하였던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에 단종의 측근인 금성대군이하 여러 종친, 궁인,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켰다.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왕위를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양보하고, 상왕이 되어 경복궁을 떠나 수강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1456년 6월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상왕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거사하기 전에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에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을 모셨던 궁녀들과 시종인 등 6명이 영월읍 동쪽에 유유히 흘러가는 동강의 벼랑에서 투신자결하였는 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1742년(영조18년)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고 하였고, 시녀들이 떨어져 죽은 벼랑을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영월의 낙화암이나 민충사가 규모나 경치에서는 부여의 낙화암이나 백화정에 미치지 못하나 충절의 의미는 훨씬 더 크다고 할 것이다.

부여 백마강변의 낙화암에 몸을 던진 궁녀들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침략하여 임금이 시해되고 나라가 망하였으니 죽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사정에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던졌으나, 영월 동강의 낙화암에 몸을 던진 시녀들은 적이 침략한 것도 아니요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니 죽어야 할 절박한 사정이 아닌데도 몸을 던진 것은 오로지 모시고 있던 주인에 대한 충절로 같이 죽었으니 그 의미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단종의 시중을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꽃 같이 젊은 시녀들이 몸을 던진 영월의 낙화암과, 한 많은 영혼들이 쓸쓸히 잠들어있는 동강변 절벽위에 외로이 서있는 민충사가 부여의 낙화암이나 백화정과 같이 모든 사전에 기록되고, 그 참뜻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질 때, 충절의 고장 영월은 그 의미가 더욱 빛날 것이다.

 

 

 

 

 

 

* 금강공원에 있는 몇 개의 비석 중 하나인데,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상태의 충절을 기린 비석이다.  

 

 

 

공원을 둘러보고 난 후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청령포로 갔는데, 주차장에 차가 너무 많고, 배를 탈려면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 청령포는 포기하고, 법흥사 방면으로 출발, 가는 중간에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전망대를 가려고 하니, 여기도 차량이 엄청나 포기하고, 무릉리 마애불이 있는 요선정으로 향하였다.  

한반도면이라는 지명(안내판)이 곳곳에 보이는데, 2009년도에 영월군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공식 개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영월에는 김삿갓면도 있다고 합니다. 본디는 영월군 하동면이었는데, 김삿갓의 묘가 있는 곳이라고 하여, 한반도면과 마찬가지로 2009년에 공식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면의 이름까지도 바꿀 정도이니, 관광효과가 크긴 큰가 봅니다. 

 

 

 

 

* 법흥사 가는 중간에 들른 무릉리 마애불과 요선정. 

에전에 이곳에 와서 멋진 주천강의 경관을 내려다본 기억이 있어서 다시 찾았다.

나무 둥치 사이로 보이는 마애불과 정자, 그리고 조그마한 탑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 마애불의 모습.

내가 보기에 정면의 마애불의 조각만 없다면, 커다란 암탉이 알을 품고있는 듯한 형상이다.

 

 

 

* 요선정 정자에는 숙종대왕 어제 편액이 걸려있다.

** 요선정. 자그마한 정자이지만,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이 걸려있으며, 스토리가 있고, 이곳에서 주천강을 내려다보는 주위경관이 매우 훌륭한 곳이다.

 

 

* 요선정 : 1913년 요선계에서 건립... 세 임금 시문·글씨 편액 있어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번지에 위치한 요선정(邀僊亭)은, 1913년 요선계(邀僊契)에서 건립한 정자로, 숙종이 시를 짓고, 영조가 글씨를 쓴 숙종대왕 어제시 편액(肅宗大王御製詩扁額)과 정조대왕 어제시 편액(正祖大王御製詩扁額)이 걸려있는 우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유산이다.
요선정이 있는 이곳은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그 밑으로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물은 강원도에서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 4대명필가(안평대군, 김구, 한석봉, 양사언)의 한분인 양사언(楊士彦)이 평창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유숙하면서 신선을 맞이할 만한 곳이라 하여, 강바닥에 있는 넓은 반석에 요선암(邀僊巖)이라고 각인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의 19대왕인 숙종대왕은 영월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노산군(魯山君)을 단종(端宗)으로 복위시키고, 종묘에 봉안하는 한편, 노산묘를 장릉(莊陵)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왕조 애사(哀史)를 바로잡으려고 영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숙종대왕은 주천에 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수의 한시(漢詩)를 하사하셨다.


“두개의 누각이 주천에 있다는데, 몇 번이나 수리하여 아직도 온전한가. 우뚝 솟은 절벽은 푸른 구름과 접하였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끝없이 흘러가네. 산새 들새는 나무위에서 지저귀고, 들꽃 봄풀들은 뜰 앞에서 활짝 웃네. 술병 들고 누(樓)에 올라 아이 불러 따르게 하고, 술에 취하여 난간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자네.”

 

이 시문을 편액으로 만들어 청허루에 걸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청허루를 재건하였으나 숙종대왕의 어제 시문 편액을 걸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시권(詩卷)에서 청허루와 빙허루에 대한 숙종대왕의 시문을 찾아 직접 쓰시고, 영조의 심정을 서술하여 편액을 만들어 청허루에 다시 현액 하도록 하였다.

이 후 정조대왕은 영조대왕을 본받아 자신의 심정을 서술하고, 시를 지어 하사하여 청허루에 현액 하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병탄으로 청허루와 빙허루는 관리소홀로 붕괴되었고, 숙종대왕 어제시 편액과 정조대왕 어제시 편액은 주천 주재소 소장인 일본인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요선계에서 1913년 당시 5원을 주고 편액을 매입하여 요선정을 건립하고 편액을 보관하여 현재에 이른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누정(樓亭)이 있고, 그 누정에는 고관대작을 비롯한 천하 명사들의 시문들이 현판으로 남아 있는 곳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세분 임금의 시문과 글씨로 된 편액이 있는 곳은 요선정 뿐이다.

요선계가 언제 결성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95년 이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310여 년을 중단 없이 계승되었다. 1926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계의 역사는 이미 고대부터 있고, 그 목적에 따라서 동계(洞契), 문중계(門中契) 등 480여종이나 있었으며, 300~400여 년간 존속한 계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1695년에 결성되어 중단 없이 현재까지 310여년을 계승한 계는 이씨, 원씨, 곽씨가 결성한 영월군 수주면 요선계가 유일한 것이다.

               - 원영환<강원대 명예교수>

 

** 요선정(邀僊亭)은 일명 요선암(邀僊庵)이라고도 불렸는데, 무릉리 거주 요선계 계원들이 중심되어 1915년에 건립되었다.  

남한강의 지류 주천강 상류인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19대 임금인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어 의미가 깊은 곳이다.

 

어제시는 숙종이 직접하사하시어 주천면 소재지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찬을 소유하였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정자는 소주면의 원씨,이씨,곽씨(元氏,李氏,郭氏)의 삼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성이 담겨 있다고 전한다.

 

 

요선정에서 나와 법흥사로 향하는데, 법흥사로 가는 길은 계곡이 매우 깊고, 물이 많아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이며, 곳곳에 캠핑장이 들어서 있다.

법흥사는 영월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며, 태백산맥의 깊은 오지 사자산에 들어서 있다.

 

 

*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만큼은 아니지만, 이곳 법흥사 적멸보궁도 몸이 불편한 사람은 힘들다 할 정도로 비교적 많이 걸어 올라가야 한다.

무릎을 다쳐 불편한 나도 쬐끔 힘들었음.

 

 

* 적멸보궁의 뒷편에는 자장율사의 토굴로 불리는 석분이 하나 있고, 그 옆에 주인 미상의 부도가 한 기 서 있다. 석분은 실상 고려시대의 석실분으로 보이며, 안에는 돌널이 있었다고 한다.

돌방의 크기는 높이 160cm, 길이 150cm, 너비 190cm 정도라고 하며, 스님들의 수도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부도인데, 지붕돌 일부가 깨어지긴 했지만, 몸돌의 조각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애석하게도 이 부도는 주인을 알 수 없다.

 

 

* 대웅전(새로 짓는 중) 뒷편에 있는 징효국사 부도.  

팔각원당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조각이 비교적 단순하며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징효국사 부도비(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 보물 제612호

이 탑비는 고려 혜종(惠宗) 원년(944)에 세워진 것으로, 통일신라말 사자산문을 개산한 징효대사 절중(折中)의 행적과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징효대사 절중(826~900년)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798~868년)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이상으로 영월에서의 답사를 마쳤다.

청령포는 가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장릉에서 만난 문화유산해설사로부터 여러가지 스토리를 들은 것이 좋았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배견정과 장판옥의 위패들, 그리고 금강공원의 민충사이다.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월 동강의 낙화암에서 순절한 여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기리는 사당 민충사(愍忠祠)와 장릉 구역 안의 정자 배견정(拜鵑亭), 그리고 장판옥의 여인위(女人位) 6인의 위패 등이 이번 영월 답사를 풍성하게 만든  주인공들이다.

 

이 모두가 단종과 함께 순절한 궁녀(宮女), 궁비(宮婢), 무녀(巫女)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다.

자, 이제부터는 부여의 백마강 뿐만 아니라, 영월의 동강에도 낙화암이 있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왕이나 양반이 아닌 궁녀와 궁비(시종), 무녀들도 어엿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