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스크랩] 서원답사기

道雨 2008. 10. 18. 16:09

1999년 여름 서원답사기

 

  99년 여름 휴가는 안동을 중심으로 근방의 문화유적을 보러 2박3일의 일정으로 출발하였다.

일정표를 짜서 잠자리와 이불을 차에 싣고 다니는 여행은 가족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데 그래서 도와가며 사는 법을 배우고 돌아오는 효과도 있다. 글쎄, 집으로 돌아오자 나만 빼고(나는 늘 해야 하는 일상을 바깥에서 하는 정도니까) 나머지 남편과 아들들은 입력된 것이 다 날라가버린 것처럼 여행 전으로 돌아갔다. 즉 손끝을 움직이는 것이 어수룩하고 귀찮아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안동 근방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머릿속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서원 답사이다.

 

  서원은 조선의 문화유산 가운데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리한다.

조선 이전 고려까지는 불교와 관계있는 유물들이 문화유산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유물들은 당시 시대 상황과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교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던 고려에서 유교가 사회 통치이념으로 바뀐 조선에서는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뀐다. 고려는 불교라는 철학적인 사상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음에도 고려라는 국가조직을 운영하는 실제에 있어서는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경제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조선은 고려에 비해서 현실적이고 현세적인 유교라는 사회 통치이념을 채택했음에도 형이상학적인 이론의 세계에서 운신의 폭이 오히려 좁았던 세계가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형성된 제도나 문화, 생활상이 있었을 터인데 서원 제도도 그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서원, 향교, 성균관이 있는데 서원과 향교는 지방의 중요한 행정기관이 들어갈 정도의 지역이면 향교는 공교육 기관으로 필히 있다. 이들 교육기관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선비를 교육시키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중 인류의 스승이 되는 성인이나 선현에게 제사 지내는 기능을 더 중요시했다. 지금도 그 흔적은 향교의 건물이 남아 있는 곳은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를 하고 있다. 지역의 명칭 중에 교동이나 명륜동이 있는데 그 곳은 향교가 남아 있거나 과거에 그 동네에 항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서원은 일종의 사립학교에 해당하는데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인물은 자유롭게 선정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초기의 서원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진정으로 스승으로 받드는 인물들이 배향되었다. 서원이 1800년이 지나 조선의 말기 무렵이 되면 성격이 변질되어 자신의 집안 어른 중 훌륭한 인물을 제사지내는 공간이 된다.  서원에는 특혜가 있었다. 서원에 소속된 땅과 사람에게는 나라에 낼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원은 세금을 안 낼 수 있는 좋은 구실로 변질되기에 이른 것이다. 서원은 조선의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는 데 기여하였으나 처음과 다르게 그 뜻도 바래갔다. 나라의 운명을 두고 토론을 벌이던 붕당정치가 무너지고 한 가문의 영광을 위한 세도정치로 넘어가자 서원도 세금을 안 낼 구실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전국에 세금을 걷을 수 없는 서원이 몇 백개가 마구 등록을 하니 나라의 재정이 염려될 정도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는 동안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등록을 취소했는데, 즉 세금을 다 내게 했던 것이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성리학의 선구자인 안향을 제사 지낼 인물로 모시고 처음에는 백운동 서원이라고 했다. 자원봉사 안내원으로부터 소수서원에 대해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명종 임금이 현판과 노비, 서적 등을 내려주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의 특권을 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하여 사액서원이 곳곳에 세워지니 지방의 유학이 부흥하고 많은 인재를 길러내게 된다. 소수서원 안에는 작은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유물 중에는 안향의 영정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두 점의 보물이 있다. 또 불교에 관계되는 유물들이 있는데 소수서원이 세워진 자리는  전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자 그 자리에 유교를 상징하는 서원이 들어섰다.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데 밀양의 영남루는 밀양의 읍성과 관아 객사중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객사가 들어서기 전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밀양강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고 한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으로 류성룡의 고향인 하회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다. 벼랑을 이룬 산과 구부러져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자리잡은 병산서원에는 만대루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는데 엄청나게 넓은 마루 공간을 가지고 있다. 초록이 짙은 나무잎 사이로 붉게 피어나 백일 동안 피고 진다는 목백일홍이 서원의 쓸쓸한 위엄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 하다.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으로 민가에서는 많이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서원은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앞쪽에 배움의 터인 강당을 두고 뒤쪽에는 제사 모시는 분의 사당을 두는 형식이다. 규모가 큰 서원은 책을 엮어내는 출판사의 역할,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의 역할도 했다. 도산서원의 문고는 조선시대에 다른 서원의 모범이 되는 문고이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인 전교당은 보물 제 20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깨끗하게 쓸고 닦아서 더욱 여름에 답사 나들이를 온 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자리가 되주었다.

 

답사를 하는 동안, 유물과 유적을 돌아보는 동안,

내가 느끼고 읽을 수 없는 엄숙함과 권위는 나의 몫은 아닌 것 같고...... 유물과 유적지를 돌아보는 동안 정말 자랑스럽고 좋았던 것은 내 나라 옛 조상들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자신 안에서 느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정신문화를 이룩한 조상이 있음을 알고 나니 어디서든 열등하다고 기죽지 않을 자존심이 강화되었다고나 할까?......

삶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는 자랑스러운 것, 못난 것,  감추고 싶은 것,  인내하며 자신을 지켜간 모든 요소들이 같이 들끓고 용해된다. 역사에 대한 해석 또한 자신의 그릇만큼 해석이 뒤따른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느끼게 된다던데, 글쎄......

안동과 근방의 답사 여행은 어쨌든 나의 삶에서 양으로라도 축적되는 그런 시간으로도 충분히 보람있다. 보았고,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좋다.  어느만큼 축적이 되어야 느끼게 되고 그리고 성숙으로 전환되는 그런 질적인 변환이 이어질까?..... 그날을 기다린다.

출처 : 해운대 부실이
글쓴이 : 부실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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