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결혼 30주년 기념 강원도 답사여행 2 (양양, 고성) (2012. 5. 27)

道雨 2012. 6. 13. 18:24

 

 

 

  결혼 30주년 기념 강원도 답사여행 2 (양양, 고성) (2012. 5. 27)

 

 

영월 답사를 마치고, 옛 추억을 더듬어보고자 장평의 팔석정과 봉산서재를 보고난 뒤,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양양까지 이르렀다.

양양에서 숙소를 정해 자고, 아침에 진전사터로 향했다.

2003년 답사시에 가본 선림원터를 가 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바로 진전사터로 간 것이다.

 

진전사터에 대한 기억은 잘 생긴 탑과 겹벚꽃의 추억이다. 2003년 답사시에 만개했던 겹벚꽃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 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깊은 곳이다.

비록 절은 폐사되어(이번에 가 보니 진전사라는 새로운 절 건물이 들어섰다) 없어지고, 삼층석탑과 부도만이 남아있지만, 도의선사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진전사는 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창건한 절이다. 

도의선사는 당시 교종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을 소개한 인물이며,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선사가 있다'라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 선종의 종조(宗祖)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종의 맥이 도의선사(1조)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 염거화상(2조)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3조)에게로 맥이 이어진다고 하였다.

보조선사는 구산선문 중 맨 앞에 나오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짓고 선종을 펼친 분이다.

 

진전사터는 이처럼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삼층석탑과 부도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전하는 증언자이다.

 

 

 

 

* 설악산 아래 호젓한 곳에 자리한 진전사터 삼층석탑. 국보 제122호이다.

 

 

 

* 약간 거무스름한 빛이 도는 화강암 석재로 되어있으며, 하층 기단, 상층 기단, 1층 몸돌에는 두드러지게 화려한 조각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다.

 

 

* 전형적인 신라의 삼층석탑에 비해 하층 기단이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거의 완전하며, 화려한 조각이 장식을 강조한 9세기 경 통일신라 탑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하층기단에는 비천상, 상층기단에는 팔부중상, 1층몸돌에는 여래상(사방불)을 조각해 놓았다.

 

 

* 상층기단부에 새겨진 팔부중상의 모습

왼쪽에 보이는 것이 팔부중상 중의 하나인 '아수라' 상이다. 팔이 여러 개(여기에서는 6개인데, 8개인 경우도 있다)인 것이 특징이다.

 

 

 

* 아수라가 화가 나서 날뛰면 팔이 여러 개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아수라장'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로 추정되는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다. 보물 제439호.

 

** 선종이 들어온 이후로 스님들의 사리를 안치한 부도가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맥락상으로 볼 때 도의선사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효시라 볼 수 있겠다. 

 

 

 

* 고즈넉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한 도의선사 부도.

기단부는 석탑의 모습을 닮았고, 연꽃 받침 위에 팔각의 몸돌을 얹었다.

 

 

* 몸돌의 전면에는 문 모양이 얕게 새겨져  있다.

 

 

* 부도 옆에 예전에는 없었던, '진전사' 이름을 가진 새 절이 들어섰다. 절에서 키우는 개(모녀간인 듯 보이는데)들이 손님(우리들)을 배웅하는 듯이 100여m 정도 되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다.

 

 

 

* 차를 세워 놓은 곳 까지 따라 내려와, 우리가 차를 타고 떠날 때 까지 자리를 잡고 앉아, 아쉬운 듯 쳐다보고 있는  견공들. 너무나 온순하고 기특한 녀석들이다.

 

** 나는 어릴 때 부터 개를 매우 좋아하지만, 지금은 여건이 되지 못해 개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 목줄을 매지 않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사람과 더불어 살수 있도록 되었으면 좋겠다. 

안전과 위생문제가 따른다고는 하지만, 나는 개를 일괄적으로 묶어두는 것에 대해서는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집에서  키우는 개는 반려동물이니 친구처럼 지내야 좋은데, 목줄을 매고 끌고 다니면서 친구가 되라고 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이번의 진전사터 답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바로 이 기특한 개들이 될 것 같다.

 

 

 

 

진전사터 답사를 마치고 간 곳이 건봉사(乾鳳寺)이다.

건봉사는 우리가 처음 와보는 곳이다. 부산에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도 하고, 휴전선 가까이 위치해 있는 관계로 출입에 제한이 된 탓도 있다.

건봉사는 금강산의 초입이자 끝자락이라고도 할 건봉산(911m) 기슭에 있어서, 금강산 건봉사라고 소개된다. 그러니 우리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고도 금강산에 다녀온 것이 된다.

 

건봉사는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 등을 말사로 두고 있었으며, 조선 세조 임금의 원찰이기도 하였고, 조선 4대사찰 중의 하나로 불릴 만큼 거대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되었으며,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구역에 포함되어 접근조차 어려운 사찰이었다. 그러다가 1988년에 건봉사로 출입하는 길만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게 되었다.

현재 건봉사는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 그리고 양양의 설악산 봉정암이다. 

혹은 봉정암 대신 바로 이 금강산 건봉사를 5대 적멸보궁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혹은 8대 적멸보궁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5대 적멸보궁인 양산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에다 강원 고성 금강산 건봉사, 경북 태조산 도리사와 달성 비슬산 용연사의 적멸보궁을 합해 8대 적멸보궁으로 꼽히기도 한다.

 

적멸보궁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임진왜란과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통도사의 사리가 왜구에 의해 도난당했는데, 백옥거사가 왜구의 포로로 있다가 사리를 다시 찾아왔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또 한 얘기가 영조 2년(1726)에 건립된 건봉사 석가치상탑비에 적혀 있는데, 사명대사가 왜구로부터 다시 찾은 통도사의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와 대구 옥포의 용연사 석조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는 것이다.

 

 

 

 

* 건봉사 입구에 있는 부도밭. 상당히 많은(50여기) 부도가 모여 있다.

죽은 나무를 타고 올라간 담쟁이가, 근위병 처럼 서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 부도비의 이수에 새겨진 범어 문자.

 

 

 

* 부도밭 앞에 넓게 조성된 광장 한편에 사명당 송운대사 유정의 조각상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의 명을 받아, 이곳 건봉사에 있던 사명대사가 6,000여 명의 승병을 일으켜 훈련시켰다고 한다.

건봉사 안에는 사명대사 기념관이 있는데, 왜국에 끌려간 포로(3,000여 명)를 송환해서 돌아오는 등, 사명대사의 행적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 건봉사 불이문.

'不二門'이란 현판의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다.

돌기둥에 새겨진 문양(금강저)가 특징적인데, 보통의 절에 있는 금강역사상을 대신한다고 보면 될 듯 하다.

 

** 한국전쟁 이전에는 건봉사가 모두 642칸의 건물이 있는 대가람이었는데, 모두 불타고 이 불이문만 남았다고 한다.

 

 

 

*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인 능파교. 보물 제1336호인데, 개축한 탓인지 예스런 멋이 적어진 듯...

 

 

* 우리나라 5대(8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건봉사 적멸보궁 원형출입구에서...

 

 

* 적멸보궁의 모습.

전면을 유리로 만들어 놓았고, 건물 안에서도 적멸보궁 뒤의 사리탑을 경배할 수 있도록 벽을 터 두었다.

 

 

* 적멸보궁 뒤의 사리탑과  부도, 석등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통도사에서 옮겨온 부처님 진신 치아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 십바라밀 석주 2개 중의 하나.

 

 

* 십바라밀 석주 또 다른 하나.

양쪽의 석주에 새겨진 문양은 모양상으로 볼 때 좌우로 비교 대상이 되는 듯하다.

 

* 십바라밀 석주 안내판.

 

** 십바라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별도 소개함.

 

 

 

 

* 건봉사 주차장 근처에 지붕이 떼로 덮여있는 건물.

이 건물은 무슨 용도로 쓰일까?

이 건물 설계자(또는 사용자)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지네.

 

 

 

건봉사를 나와서는 강릉 쪽으로 내려오면서, 왕곡전통마을을 들렀는데, 사람들이 현재 살고있는 마을임에도 방문자(관광객이나 답사객)들과는 뭔가 따로 논다는 느낌?

 

어두워지기 전에 강릉에 가서 몇 군데라도 돌아보자고 내려오는데, 차도 밀리면서 생각보다 꽤 먼 거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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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바라밀 석주 및 해설

 

이 석주에는 십바라밀(十波羅蜜)의 도형이 음각되어 있어, 이를 십바라밀석주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비록 조성연대는 1920년 이라 하지만,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문화재이다.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기본 수행법인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6바라밀에다, 이 여섯 가지를 보조하는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知)의 4바라밀을 첨가하여 구성한 것이다.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까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 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원월(圓月) 이는 보시바라밀을 나타낸다.

곧 재물과 진리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3종의 보시를 베풀되, 그들을 만족시킴이 마치 청정한 허공에 보름달의 광명이 두루 비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둥근달을 묘사한 것이다.

 

 

 

 

반월(半月) 이는 지계바라밀을 나타낸다.

계율을 지켜 그릇됨과 악한 것을 방지하고 선행을 쌓아감이, 마치 초생반월(初生半月)이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여 반달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신날(鞋經) 이는 인욕바라밀을 나타낸다.

해탈의 바라밀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욕됨을 참고 나아가야만 가능하다. 마치 신날이 돌부리 등 바깥의 모든 장애물로부터 발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앞으로 나아감을 도우 듯이, 인욕의 자세로 나아가면 어떠한 어려움이 부딪혀 와도 해탈의 저 언덕으로 나아가는 발을 보호하여 쉽게 도달할 수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가위(剪子) 이는 정진바라밀을 나타낸 것이다.

반야(반야)의 지혜에 의거하여 수행하되 결코 물러나지 않음을 마치 가위로써 물건을 자름과 같이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음(有進無退)을 보여 주고 있다.

 

 

 

    

 

구름(雲) 이는 선정바라밀을 나타낸 것이다.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깊은 삼매(三昧)를 이루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 이 선열락(禪悅樂)이 마치 열기로 가득 찬 대지를 구름이 덮어서 시원함을 안겨 주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선정을 구름 모양으로 묘사한 것이다.

 

 

 

  

 

금강저(金剛杵) 이는 지혜바라밀을 나타낸 것이다.

 

지혜는 능히 두터운 번뇌의 산을 파괴하여 불성(불성)이라는 보배광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지혜로써 피안에 도달하는 것은 마치 견고함(堅)과, 예리함(利)과 밝음(明)의 세 가지 특성을 함께 갖춘 금강저가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 같다고 하여 이러한 모양을 나타낸 것이다.

 

 

 

 

 

좌우쌍정(左右雙井) 이는 방편바라밀을 나타낸 것이다.

 

물 한 점 없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편안한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갖가지 방편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것은 물이다. 따라서 하나의 원천에서 좌우로 두 우물을 나누어 모든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듯이, 보살은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전후쌍정(前後雙井) 이는 원바라밀(願波羅蜜)을 나타낸 것이다.

 

위 아래로 하나씩의 우물을 둔 것은 귀하고 천함,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신분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피안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 위로 우물을 배열한 것이다.

 

 

 

 

고리두퇴(卓環二周) 이는 역바라밀(力波羅蜜)을 나타낸 것이다.

수행을 할 때 힘을 투입하면 집중력이 생겨서 올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마치 집 주위에 담장을 쌓고 주야로 잘 돌보면 재산을 보존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하여  고리두퇴의 형을 취한 것이다.

 

 

  

 

성중원월(星中圓月) 이는 지바라밀(智波羅蜜)을 나타낸 것이다.

 

삼계(三界)와 삼세(三世)의 세간적인 지식<遍知>을 세 개의 조그마한 원으로 표시하고  불교의 정지(正智)를 바깥의 큰 원으로 표현하였다. 곧 정지를 갖추어서 반야의 지혜를  올바로 성취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십바라밀도는 상징적인 표식으로만 이용되지 않고 실제적인 수행과 의식에 활용되었다. 곧 큰 불교의식이 있을 때 참여한 사람들은 이 십바라밀도의 모양에 따라 행렬을 지어 돌면서 염불을 하였다.

이를 '십바라밀 정진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탑돌이 행사 등에서는 이 정진을 행하고 있다.

 

또한 도는 방법도 아침과 저녁이 다르며, 아침에는 본체를 쫒아 작용을 일으킨다 (종체기용從體起用)라고 하여 왼쪽부터 돌고, 저녁에는 작용을 거두어 본체로 돌아간다 (섭용귀체攝用歸體)라고하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돈다.

 

[ 십바라밀 자료는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카페에서 옮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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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이은정의 문화재사랑'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건봉사 부처님 진신사리의 귀환

 

지금은 해제되었지만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민통선내, 고성에 건봉사(乾鳳寺)라는 사찰이 있다. 위치적인 이유로 인해 일반인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건봉사는 신라시대 사명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자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고 있는 대사찰 중의 하나로서 이 곳에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1986년 이 진신치아사리가 도굴·절취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불교조계종에는 총무원의 전 재산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는 전국의 사찰 3천여개소를 뚜루룩 꿰고 있으며, 어느 절에 어떤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는지, 어느 사찰이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는지도 훤하고 알고 있다. 그런 그의 꿈에 어느날 밤 부처님이 현신(現身)하셔서 도굴당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 이상하여 다음날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를 찾아간 그는 사리탑이 훼손되어 돌뚜껑과 사리함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급하게 부재들을 수습하여 상경한 그는 다음날로 문화재 사범단속반에 신고하였다. 이 때가 1986년 어느 봄날이었다

 

이 사건은 부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알려준 것으로 시작하여 도난된 사리를 찾는 과정도 드라마틱한데 다음과 같다.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신고를 받고서 문화재 매매가 주로 이루어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및 장안평 등지에서 그 분야의 고참들에게 소문도 흘리고, 알고 있지 않느냐고 은근한 협박도 하면서 관련자 주변을 내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문화재 사범단속반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50대로 여겨지는 남자목소리였는데, 내용인 즉 고성 건봉사에서 도굴·절취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사거리,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가야파크호텔’에 있고, 그 호텔 프런트에 가서 ‘강원도 신흥사 해법스님이 맡겨둔 약을 달라’고 하면 물건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만을 마치고 전화는 끊겼지만 당시 전화라는 것이 녹음이 되기는커녕 발신자 전화번호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난전화로 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즉시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봉천동의 가야파크호텔로 가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종업원이 호치키스로 꼼꼼하게 찍어서 삼중으로 포장한 누런 꾸러미 하나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받는 즉시 손에 땀이 배었다.
하지만 부처님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귀중한 신앙의 대상인 사리를 마음이 급하다고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선 대한불교조계종 기획관리부장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객실로 들어가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모셔 놓고 기다렸다.
약 1시간쯤 지나서 총무원에서 스님 3분이 도착하여 함께 손을 깨끗이 씻은 다음 불교의식에 따라 엄숙한 절을 올린 뒤, 삼중으로 포장된 누런 꾸러미를 열었다. 사리함이었는데 외함은 청동으로, 내함은 은제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은제함을 여니 그 안에 또 금제함이 들어있었다. 후령통(候鈴筒)을 싸고 있는 명주천을 풀자 수정후령통 안에 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조계종총무원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에 따르면 건봉사의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는 모두 12과라 한다. 신라 자장율사가 가져와 경남 양산 통도사에 모셨던 것을 임진왜란 때 일본 놈들이 약탈해갔고, 선조 38년(1605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서 동 사리를 환수받은 후, 당시 제일 큰 사찰인 강원 고성 건봉사가 안전하다 하여 석가모니사리탑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호텔방에서 열어 본 사리함 안에는 8과만이 들어 있었다. 그 때가 오후 3시경이었는데, 사리를 보고 있노라니 그 빛깔이 은색으로 변하면서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리가 나머지 4과를 찾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어서 그랬을까.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사리를 모시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은 종로구 광화문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문화관광부 건물 8층에 있었으며, 일단 도굴·절취된 석가모니 사리함과 진신치아사리 8과에 대해 회수 보고한 뒤, 미회수된 사리 4과를 찾기 위해 달아난 범인을 추적할 차례였다.
동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민간인이 출입 금지된 민통선지역이니만큼 분명 출입자명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즉시 신흥사스님께 전화해서 비밀리에 검문소에서 출입자 명단을 확보해 달라고 부탁하여 다음날 출입자 명단을 입수, 살펴본 결과 강릉에 있는 문화재매매업자 류○○를 포함한 문화재 전문도굴범 3명의 신원을 확인하였다.
서울지검 문화재 담당검사에게 동향보고 후 주변 관련자 대상으로 탐문수사 하고 있던 중, 어찌된 영문인지 민간인이 출입 못하는 민통선 안에서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가 도굴·절취 되었다고 언론에 크게 공개되고 말았다.
즉시 관련자 신병 확보를 위해 검사지휘를 받아 수사에 착수, 먼저 관할 지역 군 사단을 찾아갔다. 조계종 사람들과 사범단속반 소속 수사관 2명이 동행했다. 용의자는 고, 류, 황, 이를 포함한 4명으로 모두 이 바닥에서는 한 솜씨 하는, 면식이 있는 이들이었고 그 중 류씨는 강릉에서 골동품매매업을 하는 친구였다. 먼저 류씨를 검거하기 위해 강릉으로 향했는데 주소지에 찾아가 보니 어찌된 영문인가 가게가 없어진지 한참 됐다는 것이었다. 혹시 이미 도주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주변을 수소문한 결과 시내 대형마트 2층으로 가게를 옮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를 건너편에 세워두고 가게로 올라가 보니 류씨는 없고 부인만 있었다. 부인한테 류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로 남편을 찾는지 꼼꼼히 묻는 것이 아닌가. 이미 늦었구나 하면서도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서울서 보러왔다”고 하였더니 “잠깐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곧 올테니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는데 범인은 아직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고 도망을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혹시나 해서 류씨의 집을 들러봤더니 단칸방에 초등학생 등 어린 4명의 남매가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고 사는 것이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상황에 가장을 잡아 구속시키면 어떻게 살아갈는지... 인간적인 고민을 하면서 돌아와 20분쯤 기다리자 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간만이라고 하면서 반갑게 악수를 하고 있을 때, 길 건너 가게 앞으로 보안대 지프차 2대가 들이닥치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차에 류씨를 태우고 출발했으니 보안대는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고 바닥을 쳤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오던 중 류씨가 집에서 걱정할 테니 전화하게 해달라고 해서 연결해 주고 돌아앉아 있었더니 급한 일이 생겨서 서울에 있다고 둘러대는 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날 18:00경 서울 중구 소재 덕수궁 사범단속반에 도착해서 밤샘 조사를 한 끝에 석가모니 사리탑을 도굴·절취한 일당이 확인되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작성하여 청와대에 보고하였다. 동 사건이 매우 중요하고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서울지검 특수3부와의 공조수사를 지시했다. 관련자를 검거하기 위해 서울지검 특수3부장의 지휘 아래 5개 팀이 편성돼, 새벽 4시에 일제히 출발했다. 수사대가 나누어 탄 검은 세단들이 새벽녘의 조용한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진다.
대구, 대전, 천안, 청주, 장안평으로 출동해 4명의 범인을 검거하였고 중형인 류씨 등은 법원에서 10년형을 받았다. 범인 중 이씨와 류씨는 매제간이었으니 집안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싶기도 했고, 이 사건의 경과와 관련하여 유능한 장교 2명이 옷을 벗게 된 것도 마음이 아프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나머지 사리 4과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범인들에 의하면 원래 8과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범인을 잡는 한 편에서는 돌아온 석가모니 진신사리의 제자리찾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은 진신사리를 꽃가마에 모시고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실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옮겨서 조계사 법당에 모셨다.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하려는 불교인의 행렬이 종각까지 길게 늘어섰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일로 인하여 불교문화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불교문화의 역사가 오랜 나라이고, 당시 도난되는 문화재는 그 70%가 탱화, 목각동자상, 부도 같은 사찰문화재였다. 그 후에도 도난당한 사찰문화재를 회수하여 원 사찰에 돌려준 것이 얼마인지 셀 수도 없다.
그 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90년 여름에 선배 등 세 가족이 함께 대관령 골짜기에 피서를 하고 있는데 한 후배가 찾아와서 강릉 류씨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힘들고 긴 5년이란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고 얼마 전에 모범수로 출감, 지금은 강릉 경포대 강문 솔밭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지 걱정도 되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찾아가려 하니 같이 있던 친구가 보복을 당하면 어쩌려고 하냐면서 강하게 말렸다.
그러나 나는 문화재 사범단속이라는 업무를 하면서 일말의 거짓 없이 죄가 밉지 사람은 밉지 않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해왔다.
보복의 두려움보다는 사람의 도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경포대 내 솔밭으로 류씨 가족을 찾아갔는데, 마당에서 닭 모이를 주려고 배추를 자르고 있는 류씨를 보는 순간 반가움인지 미안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눈가에 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가서 류사장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화를 내야 할 류씨는 나는 보자 뛰어와서 나를 부둥켜 안으면서 반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식당으로 달려가 부인에게 문화재관리국 강부장이 왔다고 하자 부인 역시 뛰어나와 둘이서 나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끌고 들어가서 푸짐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 류씨는 그 사건 후 문화재절취나 도굴에서 손을 씻고 강릉 경포대 내 솔밭에서 오골계와 닭을 키우며 아내와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어울려서 살아간다. 그 가운데에서 참 모습을 발견하고 또 감동을 받으면서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국 강신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