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덫'에 걸린 한국..정책마다 제동
비자·마스터사 수수료 문제 ‘저탄소차협력금제’ 도입 등…사안마다 “위반 가능성” 거론
정부 담당자들 심적 위축…제도 마련하고도 시행 난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정부 주요 정책에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다.
각 부처 실무담당자는 미국 기업과 관련한 규제를 주저하는 등 '심리적 위축'을 호소한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를 쉬쉬할 수밖에 없다. 마치 'FTA 덫'에 걸린 듯하다.
최근 불거진 금융위원회와 미국 비자·마스터 카드의 갈등에서 정부의 정책기능 무력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금융위는 10월 "비자·마스터 카드를 사용할 때, 국내에서 결제해도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연회비 상승 요인으로 작용한다"며 제도 개선을 선언했다. 언론을 통해 "금융당국이 비자카드 등에 전면전을 선포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11월부터 미국 대사관과 비자카드 등이 한·미 FTA 위반 가능성을 거론하며 항의하자, 아예 이달 예정됐던 관련대책 발표를 취소했다.
미국계 회사가 국내 금융정책을 사실상 무력화한 첫 사례가 됐다(경향신문 12월26일자 20면 보도).
제조업 분야에서는 한·미 FTA를 '방탄'처럼 활용하는 미 업계의 움직임이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다.
환경부는 탄소배출량이 많은 차량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저탄소차협력금제' 도입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 한국에 배기량이 많은 대형차 중심으로 수출하는 미 자동차업계가 통상당국을 등에 업고 강력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무역대표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이 참여하려면, 자동차분야 비관세 장벽을 없애고, 금융서비스 자료를 공유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내년 하반기부터 휴대폰의 전자파 방출량을 제품 케이스에 표기하도록 한 '전자파등급제'를 시행한다.
당초 준비한 규제안은 전자파량에 따라 1~2등급으로 나눠 표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행하면 삼성전자 제품은 1등급, 애플 휴대폰은 2등급이 된다. 그러나 애플 측의 항의로 등급 또는 전자파 방출량 자체만 표기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업계 관계자는 "'전자파 2등급'이라고 표기하면 소비자가 쉽게 위험도를 인식할 수 있지만 '전자파 2.1W/㎏'식으로 하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정부 부처의 일선 담당자들은 극심한 심적 위축에 시달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부처 한 공무원은 26일 "문제점을 고치기 위한 개선안을 밤새워 마련했는데, 미국 업체가 FTA를 앞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골치가 아파질 수 있으니, 내부적으로 미국 업체 관련한 규제는 기안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부처 관계자는 "미국 측의 부당한 압박에 원치 않게 반미주의자가 될 판"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부처 담당자들은 이 같은 압박을 쉽게 공개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자칫 미 당국의 반감을 살 수 있고, 국민적으로도 협정 자체의 문제점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FTA 체결국 업체에도 '위축 효과'가 확산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독일 자동차업체 벤츠의 실내 배기가스 유입량을 문제삼았지만 벤츠가 "우리 기준대로 생산하겠다"고 버티자 정부가 관련 규제 마련을 주저하고 있다. 한·유럽연합(EU) FTA 위반 등 통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 홍재원 기자 jwhong@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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