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극우와 손잡은 정권, 마지막은 시민 심판

道雨 2015. 11. 3. 12:31

 

 

 

극우와 손잡은 정권, 마지막은 시민 심판
耽讀 | 등록:2015-11-03 09:18:10 | 최종:2015-11-03 09:19:3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전국역사학대회장 양호환 서울대 교수(종이를 든 이) 등 참석자들이 30일 오전, 전국역사학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 서울대학교 문화관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고, 역사학 교수들의 국정 역사교과서 제작 불참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동안,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방해하고 있다.<한겨레>

 

 

 

‘반역자’ ‘지적 장애인’ ‘나라 망치는 일’ ‘국가 반역자를 가장 많이 길러낸 서울대를 폐교하고 재설립해야 한다’

지난 29일 서울대에서 열린 역사학계 가장 큰 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에서 고엽제전우회와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보수단체들이 들이닥쳐 쏟아낸 막말들입니다.

이들은 “전국 교수사회가 동물적으로 ‘국정화 반대’ 행동에 동참했다. 교수사회에 이성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반지성 집단광기가 지식테러로 대학을 점령하고 있다”며 맹비난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서울대가 단일 대학으로는 가장 많은 382명의 교수가 참여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을 낸 것을 두고 “존경받는 서울대 교수는 없고, 지식 팔이 지적 장애자들만 넘쳐난다”며, “나쁜교과서를 만든 나쁜 교수들의 본산, 반역자를 가장 많이 길러낸 대학이 서울대라면, ‘서울대 폐교론’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고민해 봐야한다”며, 서울대 폐지까지 주장했습니다.

우익세력이 학자들 성명 발표장까지 난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승만 정권 말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1958년 대법원 아수라장 만든 대한반공청년회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30%라는 지지를 받아 이승만에게는 가장 큰 정적이었던 죽산 조봉암.

검찰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그를 간첩죄로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2일 1심 재판부(재판장 유병진)는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죄’ 부문에서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1심재판부가 조봉암을 간첩죄 부문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자, 사흘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의 ‘대한반공청년회’ 200명이 대법원에 난입하여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 죽산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고,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죽산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가 간첩죄는 무죄라고 했으니, 이승만으로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대한반공청년회 같은 정치깡패가 있었고, 야당이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면 무조건 잡아가고, 반공청년회가 대법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도 눈을 감아버리는 경찰이 있었습니다.

결국 2심과 대법원은 이승만에게 충성을 표시하여 간첩죄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1959년 7월 31일 죽산을 죽여 버렸습니다. 1심에서 간첩죄 무죄판결이 난 지 1년 만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죽산만 제거하면 영원한 대통령이 될 줄 알았지만, 불과 아홉 달 후 4·19혁명으로 하야했습니다.

그런데 55년이 지난 오늘 그런 일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빨갱이’나 ‘좌편향’으로 몰아 색깔론으로 단죄한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런 독재정권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민주시민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자 박정희도, 1972년 유신쿠데타와 긴급조치 그리고 1979년 YH사건, 김영삼 제명과 부마항쟁으로 긴 독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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