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청장관 이덕무와 초정 박제가

道雨 2021. 3. 19. 18:20

청장관 이덕무와 초정 박제가

 

- ‘기호(記號)’와 ‘소전(小傳)’, 글로 그린 자화상

 

 

# 백탑파(白塔派)와 백탑시사(白塔詩社)

 

북학파의 1세대를 이끈 사람이 박지원과 홍대용이라면, 북학파의 2세대를 주도한 인물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와 초정(楚亭) 박제가였다.

특히 북학파의 2세대 그룹을 가리켜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현재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백탑(白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을 저술하였고, 그 서문(序文)에 그렇게 제목을 붙인 사유와 자신들의 생활과 활동 상황 등을 적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일찍이 유득공, 이서구 등과 시문학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백탑시사(白塔詩社)’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이들의 시는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에 의해 청나라에까지 소개되어 그 문명(文名)을 알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한시(漢詩) 4(四家)’로 불리게 되었다.

 

 

# ‘기호(記號)’, 글로 그린 자화상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은 천문 지리 과학에서, 열하일기를 지은 박지원은 문장으로,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은 역사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박제가는 북학파의 사회 개혁론을 집약해놓은 북학의의 저자로 유명하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라는 백과사전적 저술과 기록을 통해, 18세기 당시 신학문이었던 고증학과 변증론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펼쳐보였다.

 

이덕무는 한국사를 통틀어도 전례(前例)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호를 통해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그는 호에 관한 한 생전에 수백 여 개의 호를 사용했던 추사(秋史) 김정희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희는 박제가의 제자였으니까, 김정희가 나오기 이전 가장 많은 호를 남겼던 사람은 이덕무라고 할 수 있다.

 

이덕무는 젊은 시절 자신의 호에 대해 직접 설명한 기호(記號)’라는 글을 지은 적이 있다.

이 글에서 삼호거사(三湖居士)’, ‘경재(敬齋)’, ‘팔분당(八分堂)’, ‘선귤헌(蟬橘軒)’, ‘정암(亭巖)’, ‘을엄(乙广)’, ‘형암(炯菴)’, ‘영처(嬰處)’, ‘감감자(憨憨子)’, ‘범재거사(汎齋居士)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일찍이 삼호(三湖)에 거주했기 때문에 스스로 삼호거사(三湖居士)’라 하였는데, 이것이 호의 시초라고 하였다.

 

三湖居士’ : 일찍이 삼호(三湖)에 거주했기 때문.

敬齋’ : 엄숙하고 공경하면 나날이 학문이 강해진다.

八分堂’ : 지향하는 목표로, 팔분 정도에 도달하고자 함. 성인(聖人)을 십분(十分), 九分이면 대현(大賢).

蟬橘軒’ : 가난해서 집이 작고, 매미의 허물과 귤의 껍질처럼 구부정함.

亭巖’ : 처지에 따라 행실을 닦고자 함.

乙广’ :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김.

炯菴’ : 마음을 수경(水鏡)처럼 잔잔하고 맑게 하고자 함.

嬰處’ : 어린아이가 재롱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 장차 처녀와 같이 지키려고 한다.

憨憨子’, ‘汎齋居士’ :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감추고는 어리석고 미련한 척하였다. 단정한 사람이나 장중한 선비에게도 기뻐하고 저잣거리의 장사꾼에게도 기뻐하였으니, 대개 빈 배를 홀로 띄워 어디를 가나 유유자적하지 않음이 없다.

 

대저 일마다 공경하여 닦으면 고인(古人)에 가깝고,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 하고 작은 집에 누워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비록 부엌 연기가 쓸쓸하여도, 붓을 잡아 문장을 지으면 아침에 피는 꽃과 같이 빛이 난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도 오히려 편안하지 않아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는 어린아이가 재롱을 좋아하는 것과 다름없다. 장차 처녀와 같이 지키려고 함이다라고 하였다.

 

이들 호를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철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영처지심(嬰處之心)’이다. 이덕무는 영처고(嬰處稿) 자서(自序)라는 글에서 어린아이의 재롱은 천진(天眞) 그대로의 것이요, 처녀의 부끄러워하여 감추는 것은 순수한 진정 그대로이다. 이것이 어찌 억지로 힘써서 되는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영처지심이란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순수함을 간직한 자연스러움그 자체를 말한다.

기호는 이덕무가 글로 그린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선귤당(蟬橘堂)과 청장관(靑莊館) : 매미와 귤 그리고 해오라기

 

이덕무의 삶에는 가난이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 굶주림)’(, 추위)’ 두 글자를 결코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그는 가난에 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최상(最上)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最下等)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간다.

-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이덕무의 가난의 철학은 가난에도 품격품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덕무의 삶은 선귤당청장관이라는 당호(堂號)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예전 남산 부근에 살고 있을 때 집의 이름을 선귤(蟬橘)이라고 하였다. 집이 작아서 매미[]의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다는 뜻에서였다.”

깨끗한 매미와 향기로운 귤을 마음에 간직하려는 맑은 마음이다.

 

청장관(靑莊館)’은 이덕무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며, 그의 글과 기록을 모두 모아 엮은 전서(全書)의 제목이 될 정도로, 생전과 사후 모두 항상 그를 따라다녔던 이덕무를 대표하는 호이다.

 

청장(靑莊)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에 사는데, 먹이를 뒤쫓지 않고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한다. 이덕무가 청장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 청장관전서, 형암행장(炯菴行狀)

 

위에서 든 호 외에도 이덕무는 청음관(靑飮館), 탑좌인(塔左人), 재래도인(재래道人), 매탕(槑宕), 단좌헌(端坐軒), 학초목당(學草木堂), 주충어재(注蟲魚齋) 등 다채롭게 호를 사용했다.

탑좌인은 이덕무가 백탑 주변에 거처했던 사실을 표현한 호이고, ‘학초목당주충어재는 인문학의 범위를 뛰어넘어, 풀과 나무, 곤충과 벌레 등 식물과 동물에 관한 지식까지 검색하고 탐구했던, 이덕무의 백과사전적 호기심과 지식욕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 매탕(槑宕) : “나는 매화에 미친 바보다.”

 

이덕무의 호 가운데 개성이 넘치는 호가 매화에 미친 바보라는 뜻을 가진 매탕(槑宕)’이다. ‘()’매화 매()’의 고자(古字)이고, ‘()’어리석다는 뜻이다.

북학파들은 당시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여긴 바보 혹은 멍청이라는 뜻의 한자를 자신의 호로 즐겨 사용했다.

이덕무는 매탕이라는 호 이외에도 10대 시절 간서치(看書痴)’라는 별호(別號)를 썼다. 이 별호의 뜻은 책만 보는 바보 혹은 책에 미친 멍청이.

북학파의 1세대 그룹에 속했던 정철조는 석치(石痴)’, 돌에 미친 바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떤 돌이든 깎아 벼루를 만드는 자신의 못 말리는 버릇을 자랑하듯이 호로 삼았다.

 

이덕무의 매화 탐닉은 윤회매(輪回梅)’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이라는 글에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매화는 1년 중 기껏해야 한 달 남짓 핀다. 1년 내내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매화의 풍모(風貌)를 느끼고 그 아취를 즐기고 싶던 이덕무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밀랍(蜜蠟)으로 인조 매화를 만드는 방법을 창안했고, 마침내 인조 매화 제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덕무는 인조 매화에다 윤회매(輪回梅)’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까닭을 밝혔다.

 

내가 뜻을 갖고 창안(創案)하여 밀랍을 주조해 매화를 만들었다. ··· 윤회매(輪回梅)라고 이름붙인 것은, 벌이 꽃을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꿀이 밀랍이 되었다가 다시 밀랍이 꽃이 되는 섭리가 마땅히 불가(佛家)의 윤회설(輪回說)과 전생후생설(前生後生說)과 같았기 때문이다.

- 청비록(淸脾錄), 윤회매

 

또한 편리하게 윤회매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엮어서 윤회매십전이라는 글을 저술해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벌이 꽃의 정기를 채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밀랍은 다시 매화가 된다. 그래서 이것을 윤회매(輪回梅)라고하였다. ··· 윤회매는 물론 가짜 꽃이다. 그러나 그 혈통은 꽃다운 향기를 노출해 반드시 법외(法外)의 미묘한 아취가 있으니, 진짜 매화를 만들지 못한다면 차라리 윤회매를 만들어야지, 종이를 잘라 매화를 만들지 말라. ···

- 청장관전서, 윤회매십전

 

이덕무는 특히 윤회매십전에서 인조 매화(윤회매)의 꽃잎과 꽃받침, 꽃술과 꽃, 가지 등의 구체적인 제조 방법을 그림까지 그려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 마지막 호, 아정(雅亭) : 군사(君師) 정조대왕과의 인연

 

아정(雅亭)’은 이덕무가 만년에 마지막으로 지은 자호이다. 이 자호는 이덕무와 정조의 각별했던 인연을 담고 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문치(文治)를 표방하고,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세종대왕 때의 집현전(集賢殿)을 모방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다.

교서관(校書館)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삼았다. 또한 규장각의 각신들에게 하교해, 벼슬하지 못한 여항(閭巷)의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을 갖추고 문학에 능숙한 사람들을 뽑아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檢書)’라는 관명(官名)을 하사했다.

이때 이덕무가 첫 번째 서얼 출신 검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 뽑혔다.

정조 시대 문치와 문예 부흥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서자 출신의 이른바 규장각 4검서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호학 군주이자 당대 쵝고의 학자였던 정조는 군사(君師)’라 자처하며,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의 입장으로 신하들을 대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신하들의 학문을 시험하고 시문(詩文)을 평가하는 데 엄격하고 단호했다.

 

이덕무가 검서관이 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때, 정조는 모든 검서관들에게 규장각 팔경(八景)’을 제목으로 하는 근체시(近體詩)를 짓게 했다. 이때 이덕무는 장원으로 뽑혔다. 또한 다음 날 정조는 다시 영주(瀛州)에 오르다라는 제목으로 20()의 시를 짓게 했는데, 이때 역시 이덕무가 장원을 차지했다.

 

이덕무가 죽기 한 해 전인 17924, 정조는 수도 한양을 그린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시제(詩題)로 하여 칠언고시(七言古詩) 1백운()을 짓게 했다. 여기에는 이덕무를 비롯한 검서관은 물론 여러 조정 대신들까지 참여했다. 이때 정조는 우등(優等)으로 여섯 사람을 뽑아 그들의 시권(詩卷)에 각각 어평(御評)을 했는데, 이덕무의 시권에는 어필(御筆)로 친히 ()’자를 썼다. 이덕무가 제출한 성시전도 시()’우아하다는 최고의 찬사였다.

지존인 임금이기에 앞서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정조에게 받은 극찬이었기 때문에, 이덕무는 ()’라는 어평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고, 이를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자호를 아정(雅亭)’이라 하였다.

 

성시전도를 지은 다음 해(1793) 125일에 이덕무는 청장관의 정침(正寢,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정조는 이덕무가 사망한 3년 후, 그의 아들 이광규에게 친히 내탕금(內帑金, 조선 시대에 내탕고에 넣어 두고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하사하고, 어명을 내려 이덕무의 유고(遺稿)를 문집으로 엮어 출간하도록 했는데, 이 유고집의 이름이 다름 아닌 아정유고(雅亭遺稿)’이다.

 

 

# 초정(楚亭) :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을 흠모하고 ‘초사(楚辭)’를 좋아한 까닭은

 

이덕무는 박제가보다 9년 연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북학파 그룹에서도 가장 절친한 사이였다.

박제가는 북학파 지식인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던 사회 개혁가였다.

 

그는 신라 때의 고운(孤雲) 최치원과 선조 임금 때의 중봉(重峯) 조헌과 같은 옛사람을 사모했다. 그 까닭을 자신의 사회 개혁론을 집약해놓은 북학의(北學議)』 「자서(自序)에서 밝혔다.

압록강 동쪽의 우리나라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작고 구석진 이 나라를 한 번 변화시켜 중국의 수준에 오르도록 하고자 한 이는, 오직 이 두 사람(최치원, 조헌)이 있을 뿐이다.”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를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과는 다르게, 오로지 조선을 크게 한번 개혁할 목적으로 중국(당시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선망했다.

청나라는 매우 발달한 문물과 제도를 갖춘 선진국인 것에 반해, 조선은 그에 한참 뒤떨어져 있는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정이라는 호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진()나라에 맞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부국강병책을 건의했다가, 정적(政敵)들의 중상모략으로 실각한 후, 자신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읊은 이소(離騷)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초나라의 운명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끝내 간신들의 이간질과 중상모략으로 쫓겨난 굴원은, 분통한 마음에다 자신의 충성심과 결백함을 끝내 보여줄 수 없게 되자, 돌을 안은 채 멱라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쳤다.

그 후 초나라는 날로 쇠약해졌고, 수십 년 뒤 진나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굴원이 지은 이소는 초나라의 노래라고 해서 초사(楚辭)’라고도 하는데, 박제가는 여기에서 ()’자를 따와 초정(楚亭)이라는 호를 지었던 것이다.

박제가는 27세 때 지은 소전(小傳)’이라는 제목의 자전적인 기록을 통해, 초정이라는 호에 담긴 자신의 비장한 각오와 평생의 뜻을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이 글은 글은 곧 그림이고, 그림은 곧 글이라는 북학파의 문장 미학이 잘 드러나 있는 걸작 소품문(小品文)이다.

 

나의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고, 본관이 밀양이다. 대학(大學)의 한 구절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을 취해 이름을 제가(齊家)’라고 하였다. 또한 초사(楚辭)’라고 부르는 이소(離騷)의 노래에 의탁하여 초정(楚亭)’이라고 自號하였다.

- 정유각집, 소전

 

1778(정조 2) 3, 박제가는 이덕무와 함께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청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번암(樊巖)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신 길에 따라 나선 것이다.

당시 박제가는 몇 개월 동안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조사한 청나라의 경제와 풍속, 그리고 문물과 제도 중, 조선에서 시행하면 이로움과 편리함을 얻을 만한 것들을 모두 기록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박제가는 3개월 만인 그해 9월에, 청나라에서 얻은 견문을 하나의 학설(學說)로 만들고, 자신의 개혁 구상을 총 정리해 북학의(北學議)1차 완성한 다음, 저자 서문까지 썼다.

박제가는 수 년 동안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했고, 체계를 갖추어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1798(정조 22)에는 다시 북학의의 핵심 내용을 간추리고 새롭게 보완하여, 정조에게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올렸다.

여기에서 박제가는 조선이 개국 초기부터 유지해온 농본상말(農本商末, 농업을 근본으로 삼고 상업을 말단으로 하는 경제 체계)’해금책(海禁策,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각종 교역과 교류를 금지하는 정책)’이 시대에 뒤떨어져 무용(無用)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상공업을 장려하고, 바닷길과 선박을 이용한 외국과의 통상을 추진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보다 12년 전인 병오년(丙午年, 1786) 1, 정조의 요청에 따라 지은 병오소회(丙午所懷)’라는 글에서는, 당시 사학(邪學)이라고 핍박받던 천주학의 뿌리인 서학(西學)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비난과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양인 선교사와 학자들을 초빙해 나라의 우수한 인재들을 교육시키자는 혁신적인 의견을 정조에게 상소하기까지 했다.

이때 정조의 명에 따라 소회(所懷)’를 올린 조정의 대소 신료가 370여 명에 달했는데, 국가 차원에서 서학(西學)을 도입하고, 서양인 선교사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유화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박제가가 유일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에 불어 닥친, 근대화의 길이 상공업 육성과 개항 및 해외 통상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박제가의 주장과 건의는 100여 년을 앞서 조선의 미래와 세계사의 흐름을 읽은 탁견(卓見) 중의 탁견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19세기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고, 정조의 죽음은 곧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1801(순조 1),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오자마자, 박제가는 사돈 윤가기의 동남 성문 밖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뒤집어쓴 채 유배형에 처해졌다.

 

4년이 지난 1805, 박제가는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났지만, 자신의 뜻과 크게 어긋나 버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