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해상왕 장보고

道雨 2021. 5. 21. 20:54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張保皐, 787년~846년)는 신라사람으로,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 무장이자 해상 호족이다.

 

생애

 

 

장보고는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알 수 없으나,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다. 그의 이름 장보고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그의 본명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 적고 있다.

 

일찍부터 친구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 그곳에서 승마와 창술에 특출난 재주를 보이며, 군인으로서 출사해,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년) 초에 신라로 돌아온 그는 왕에게 신라인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참상을 전하며, 완도에 군사 거점을 세워 이를 금지시켜 줄 것을 청했다. 마침내 승인을 얻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835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사라졌다고 《신당서》 및 《삼국사기》는 평가하고 있다.

 

장보고는 해적 토벌에 그치지 않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북쪽의 발해와 탐라, 우산국과 같은 신라의 속국들, 참파, 스리위자야, 마타람 왕국, 크메르 왕국, 라보 왕국, 팔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프리티하라 왕조, 아바스 왕조 등, 남방, 서역 여러 나라와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신라인들이 많이 이주한 산둥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신라인들이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려 하자, 그는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신라인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받아 석방시켰으며, 이들은 신라 출신 이민자들이 건너간 산동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 이상이 되었으며, 토지를 기부하여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 성장했고, 법회를 열 때 200~400명까지 인파가 몰려들었다. 

 

골품제와 같은 기존의 신분제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였고, 또 자신의 진영에 환대하여 신분을 따지지 않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그들의 능력을 적극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빈민들을 규합하고, 새로운 활동 무대를 찾아 모여든 인재들을 포용하여, 8세기 이래 왕성하였던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 이것들을 묶어 조직화하였다.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에 머무르며 구법행을 했던 일본의 승려 엔닌은, 자신이 당에 체재하는 동안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현지 신라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구법행을 완수할 수 있었고, 장보고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귀국한 뒤 엔닌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자신이 체재했던 등주(登州)의 신라인 사찰 적산법화원을 본떠,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 도교의 신인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모시는 적산선원의 건립을 발원하기도 했다.

 

흥덕왕이 재위 11년만에 죽고, 신라에서 일어난 왕위 다툼에서 김제륭(희강왕)에게 패하고 피살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그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김제륭도 재위 3년만인 838년 김명이 일으킨 정변으로 피살되고, 김명이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하자, 예전 김균정의 편에 섰다가 패하고 달아난 김양이,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와서, 김우징을 만나고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에 동의한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의 군사 5천을 내주어 김양과 함께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다. 장보고와 정년이 이끄는 청해진 군사는 무주와 대구를 거쳐 왕경에 입성, 왕경군을 격퇴한 뒤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신무왕)을 추대한다. 이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문성왕 2년(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846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문성왕 13년(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평가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지기였고, 당에서 무령군중소장이 된 사실을 소개한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의 저본은, 중국 당나라 두목(杜牧)이 지은 장보고전, 즉 《신당서》권220 신라전이다.

장보고가 먼저 신라로 돌아가 높은 관위(청해진대사)를 얻은 뒤, 반대로 관직에서 물러나 한미하게 지내던 정년이 장보고를 믿고 그를 찾아갔을 때에, 정년을 예를 갖추어 환대한 것, 환영 연회를 벌이던 도중에 국왕이 살해당하고 수도가 혼란에 빠진 소식이 전해지자, 장보고가 기꺼이 정년에게 군사 5천을 내어 주어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진압할 수 없다.”며, 반란을 토벌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게 했으며, 이 공으로 장보고는 재상에 등용되고, 정년이 청해진대사를 이어받은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나아가 두목이 장보고와 정년의 교제를 안녹산의 난 때의 곽분양(郭汾陽, 곽자의) ㆍ 이임회(李臨淮, 이광필)의 교제에 빗대어 인의(仁義)의 사람이라 칭찬한 것을 전하면서, 《신당서》열전을 편찬한 송기(宋祁)의 평으로 국난의 시기에 의(義)를 품고 국가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사람으로서, (晉)의 기해(祁奚)와 당의 곽분양, 그리고 장보고를 거론하고 "어찌 동쪽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하고 있다.

 

이를 다시 《삼국사기》에 기재한 김부식은, 신라본기와의 기사와 서로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는 한편으로, 장보고에 대한 두목과 송기의 평가를 지지한다. 또한 김유신전의 말미에서도 김유신의 공적을 뛰어나다고 칭찬하면서도, 고구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무용을 함께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 조선조의 안정복에게까지 이어졌다.

 

적산대명신과 신라대명신

 

장보고가 활약했던 9세기 전반, 산동 반도의 항구도시였던 적산(赤山), 지금의 룽청 시(荣成市)에는, 장보고와 연계한 당시 많은 신라 상인이 거류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세웠는데, 이 무렵 당 조정의 명령으로 서둘러 귀국해야만 했지만, 당에 남아서 천태종을 배우기로 결의한 일본의 입당청익승(入唐請益僧) 엔닌을 위해, 그를 적산법화원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현지의 중국 관인들과 교섭해, 공험(公驗, 여행허가증)을 얻어내주기도 하는 등, 엔닌의 9년 6개월에 걸친 구법행(行)을 물심 양면에 걸쳐서 지원했었다.

 

오늘날 일본 교토시 북쪽 히에이 산에 위치한 적산선원에 모셔져 있는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은, 엔닌의 제자가 엔닌의 뜻을 이어, 신라인들이 섬기던 신을 모시기 위해 닌나 4년(888년)에 세운 것이다. 흔히 도교의 최고신인 태산부군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신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 신이 장보고를 모티브로 한 신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적산대명신과 함께 엔랴쿠사 경내에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을 모신 신사도 존재하고 있는데, 현재 일본 시가 현 오쓰 시의 온조사(園城寺)에도 마찬가지로 이 신라대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남아 있다.

 

엔닌과 마찬가지로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오던 승려 엔친(圓珍)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붉은 옷을 입고 흰 활을 들고 나타나’ 풍랑을 잠잠하게 가라앉혀 엔친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가 가지고 돌아오던 경법(經法)을 영원히 수호할 것을 맹세한 신이었다 하여, 엔친이 가지고 온 경전과 법구를 이 온조사에 보관하게 된 것이라 한다.

센고쿠 시대 다케다 집안의 시조로 추앙되었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이곳에서 관례를 올리고 신라사부로(新羅三郞)를 칭한 이래, 다케다 집안에서도 이 신라대명신을 가신(家神)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신라선신당 건물은 조와 3년(1347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기부한 것이다.

앞서 엔닌이 당나라에서 오대산의 하나인 북대엽두봉(北台葉頭峰, 해발 3,058미터)에 올랐을 때 얻은 향나무로 만든 문수상을, 귀국한 뒤인 죠간 3년(861년) 10월에 엔랴쿠사 경내에 따로 문수루(文殊樓)을 지어 모셨는데, 이 문수루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가 히에이 산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고 현재는 재건된 것이다. 이 문수루 옆에는 현재 장보고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장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송징장군(송징)을 주신(主神)으로 정년장군(정년)과 혜일대사를 좌우에 모신 사당에서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2년부터 장보고를 함께 합사하여 당제를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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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신라인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소탕했다.
838년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과 함께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 삼각 무역을 했다.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신라의 무장 장보고는 일명 ‘해상왕’이라고 불린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인신매매를 일삼던 해적을 소탕하며, 일약 별처럼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바다의 왕이라는 별명답게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며 무역 사절로도 활약했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평민 출신이라고도 하며 노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골품이 뚜렷한 신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껴 어린 시절 당나라의 쉬저우(徐州)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본명을 버리고 ‘장보고’라는 이름을 택한 이유도, 당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던 장씨(張氏)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 적산 법화원의 장보고 동상

 

당시 당나라 동해안에는 신라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양쯔(揚子) 강 하류부터 산둥 성에 걸쳐 살던 신라인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과 교역이 잦았다. 신라와 일본을 오가며 국제 무역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해적은 그곳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중앙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닷가에서 해적들은 신라 해안까지 침투해 백성들을 잡아다 당나라에 노비로 팔기 일쑤였다. 노비로 잡혀 온 신라인의 삶은 처참했다. 장보고는 이에 분노하여 무령군(武寧軍)의 소장직을 사직하고 신라로 귀국한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 왕에게 해적을 소탕할 것을 주청했다. 이를 위해서는 남해 해상 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나라로 가는 황해 무역로를 확보하고 해적을 근절하자는 것이었다.

왕의 승인을 받은 장보고는 민군(民軍) 1만 명을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했다.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내린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은 당시 관직 체계에는 없던 별도의 직함이다. 장보고는 완도에 성책을 쌓아 전략 거점으로 삼았고,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다.

 

해적을 소탕한 장보고는 해로를 통해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을 시작했다. 신라인은 구리거울, 모직물, 향료를 내다 팔고 비단과 면을 들여갔다.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향신료도 중계 무역을 통해 신라의 귀족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장보고는 이 밖에도 가죽, 문방구를 함께 취급했다.

장보고의 무역은 외교를 겸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는 일본과 당에 각각 무역 사절인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를 파견했을 정도로 일반 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임을 과시했다. 해상을 장악한 장보고의 위세는 일본의 한 지방관이 “승려 엔닌(圓仁)과 귀국하려고 하니 길을 봐 달라.”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장보고가 당시 해상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와 선박을 보유한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치로 옮겨 갔다. 836년(흥덕왕 11)은 장보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훗날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피신한 것이다. 당시 김우징은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려 했다가 패하고 쫓기는 신세였다.

왕권은 흥덕왕을 폐위시킨 희강왕이 잡았다. 하지만 2년 뒤 다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 이번에는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839년(민애왕 2) 4월 장보고의 지원을 받은 김우징이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장보고는 신무왕이 즉위하자마자 공로를 인정받아 감의군사에 올랐고, 뒤를 이은 문성왕 대에는 진해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장보고는 중앙 귀족들도 두려워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귀족들과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무엇보다 장보고가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자신의 딸을 천거하면서 갈등이 부각되었다. 군신들은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결국 문성왕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했다. 장보고 사후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들이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청해진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