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다스리는 사람의 첫번째 자질

道雨 2022. 2. 12. 10:22

다스리는 사람의 첫번째 자질

 

 

1974년 4월3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 “‘민청학련'이라는 단체가 ‘인민혁명당과 조총련, 일본 공산당, 혁신계 좌파'의 조종을 받아 민중봉기를 통해 정부를 전복하고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180명을 기소하였다.

이듬해 4월8일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게 사형, 15명에게 징역 15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다음날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다음, 사법부는 민청학련 사건 피고들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사건 외에도 다양한 사유로 긴급조치의 피해를 입은 이들은 1204명에 이른다. 그중 가장 많은 사례가 술자리에서의 정부 비판, 수업 중에 언급한 유신체제 비판으로 282건에 달한다.

오종상씨는 버스 옆자리에 있던 여고생에게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영장 없이 연행되고 온갖 고문을 당한 뒤,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혐의로 3년의 옥살이를 했다. 오씨와 가족들은 201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0년이 지난 2021년 9월 대법원은 국가가 오씨에게 1억1500만원, 유족들에겐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이 판결 4일 후 오씨는 8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받은 이들 중 많은 이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165명은 재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어진 이 피해자들의 억울한 고통, 아물지 않은 처절한 상처를 돈 몇억원으로 어찌 기워 갚을 수 있단 말인가?

 

1975년 11월22일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는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던 재일동포 유학생 등 21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 청년들은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에 시달리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감과 긍지를 얻으려, 모국의 대학에 유학 와서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던 젊은 인재들이었다.

군사정권은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들을 지원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살인적인 고문과 폭행으로 간첩 혐의를 조작하여, 자신들의 정권 연장의 먹잇감으로 삼았다. 수사요원들은 지하 밀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고문으로 이들의 육신과 정신을 철저히 파괴하며, 간첩 행위를 강제로 자백하게 만들었다.

장기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후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어떤 이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들은 정신질환으로 폐인이 되었다.

군사정권 시절 이렇게 조작된 간첩 혐의로 인생이 파탄 난 재일동포가 130명에 달했다. 40년이 지난 뒤에야 재심이 허용되고, 이들 중 36명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어떤 이들은 한국인들과는 모든 인연을 끊고 잠적했다. 몇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한들 그들의 빼앗긴 인권, 잃어버린 고귀하고 존엄한 생의 한 조각이라도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장기간 중형을 살게 하고,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살게 한 공직자들 모두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 유린하고 파괴한 수사관, 검사, 판사들은, 국회의원,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총리,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의 자리에까지 이르며, 이 나라 권력의 최상층부를 점유해왔다. 이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주도하고 가담하고 방조한 범죄와 불의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거나 용서를 구한 일이 없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인생을 난도질당한 수많은 의인과 무죄한 시민들의 울분과 억울함은 누가 언제 어떻게 기워 갚을 수 있단 말인가? 몇십년 지나 무죄라고 선언하고 돈 몇푼 쥐여준들,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인간의 인격들에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입힌 국가는 어떻게 죗값을 치를 수 있단 말인가? 국가란 존재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력하고 무능하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승객 172명이 구조되고 304명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때, 승무원들은 도주했고, 관련 국가기관 공무원들은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제주 출신 화물차 기사 김동수씨는, 해경이 꼼짝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데 시시각각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혼자 소방 호스를 몸에 감고 단원고 학생들과 승객들을 20여명이나 살리는 초인적인 일을 해냈다.

그러나 그는 절규하는 더 많은 아이들을 미처 구해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도 심각한 트라우마의 늪에 가라앉았다. 그는 사우나 욕탕에 몸을 담그면 세월호 아이들이 ‘우리는 차가운 물속에 빠져 있는데 아저씨는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나요?’ 하고 외치는 것 같아 도로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몇년이 지나도 국가는 사고의 진상과 책임 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과 관심은 세월호의 비극에서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김씨는 더욱 절망과 분노를 금치 못한다.

김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자해를 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그의 아내와 두 딸도 함께 엄청난 심적 고통과 불안에 시달려왔다.

김씨는 2019년 5월 자해 후 구급차로 이송된 병원에서, 극도로 불안한 상태 중에 응급실 의료진과 실랑이를 벌였고, 의사는 그를 응급의료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법원은 그에게 벌금 3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세월호 사고 이후 끔찍한 트라우마에 홀로 시달려온 한 의인을 국가가 죄인으로 판결함으로써, 쓰라린 상처에 2차 가해를 보탰다. 훈장과 포상으로 위로해도 부족한 마당에, 국가는 의인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는 사고 후 제주 숲길 지킴이로 일하고 있어, 나는 숲길을 걸을 때마다 그가 잘 있는지 안부를 묻곤 한다. 그는 숲길 탐방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줍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정리하기도 하지만,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면 난방도 안 되는 컨테이너 안내소 간이침대에 쓰러져 있다. 최근 설 연휴 이후 컨테이너가 비어 있고 몇주째 그가 안 보여 무슨 일은 없는지 많이 염려된다.

 

나라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한달도 채 안 남았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국민에게 회복할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덮어씌우는 지도자를 선출해서는 안 된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헌법 7조1항)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10조)

 

그런데 지금까지 국가와 권력을 행사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이러한 헌법 정신과는 동떨어진 발자취를 곳곳에 남겼다. 이번에는 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아픈 사람을 위로해주고, 상처받은 사람을 감싸고 치유할 어진 사람이 뽑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강우일 | 베드로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