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서방, 인류 모두의 크림전쟁+베트남전
우크라이나 전쟁은 19세기 크림전쟁과 20세기 베트남전을 합쳐놓은 양상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정학적 게임이라는 측면에서 크림전쟁을 닮았고, 강대국을 전쟁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전과 유사하다.
1853년 7월 러시아는 당시 오스만튀르크의 봉국인 다뉴브공국을 침공했다. 오스만제국 내의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목적은 발칸 지역을 장악하고 지중해, 더 나아가 중·근동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의해 쇠락하는 오스만제국이 지도에서 지워지고 유럽의 세력균형이 파괴될 위기로 파악하고 참전했다.
2년6개월 동안 진행된 크림전쟁은 파리조약을 통해 종전됐고, 교전국들은 전쟁 이전으로 영토를 되돌리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패전한 러시아는 제국으로서 쇠락하기 시작했고, 승전국인 영국 등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도 기존의 국제질서가 파괴되면서 각자도생의 제국주의 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크림전쟁의 동생이 될 수도, 형이 될 수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 뒤 유럽은 영국·프랑스·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 5대 강국의 세력균형에 입각한 빈 체제라는 40여년 이상의 평화 시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승전국인 러시아는 오스만제국이 날로 쇠락하자, 오랜 꿈인 지중해 진출을 달성하려고 전쟁을 감행했다.
냉전 뒤 국제사회는 미국의 패권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로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 없는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냉전의 승자인 미국은 그 세력권을 나토 확장을 통해서 옛 소련 지역으로 넓히고, 태평양에서 중국의 세력권을 불용했다. 크림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적인 팽창주의의 소산이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방어적 공세라고 할 수 있다.
크림전쟁 때 영국이 빈 체제라는 세력균형 질서의 와해를 용납하지 않으려 한 것처럼, 미국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규칙 기반 국제질서라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려고 한다.
발칸에서 시작된 크림전쟁은 결국 흑해 제해권을 둘러싼 전쟁으로 확전됐다. 발칸 지역에서 오스만제국의 군대를 지원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숨통을 끊으려고 결국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해군기지를 공격했다. 크림반도 안팎에서 대규모 해전과 육상전을 벌였다. 더 나아가 백해와 북태평양에서까지 양쪽이 교전하는 준세계대전으로 번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프는 흑해에서 러시아와 터키의 해군력을 금지시켰다. 러시아는 이 전쟁으로 사활적인 흑해 제해권을 상실해, 제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우크라이나 내륙에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도 흑해 연안으로 번지고 있다. 이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곡물과 비료 수출이 막혀 세계 식량위기가 고조되자,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에 오데사 등 흑해 연안 해상봉쇄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하푼 미사일 등 첨단 대함 미사일 제공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서방의 군사 관측통들은 해상봉쇄가 앞으로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미국 등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6개월 뒤면 미국의 중간선거 시기와 겹친다. 굶주리는 개도국 국민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선진국 국민들을 위해 식량과 에너지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명분이 전쟁을 확산시킬지, 혹은 끝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호전적인 애국주의가 미국에서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걸프전, 이라크전이 잘 보여줬다. 현재 지지율이 41% 안팎으로 역대급으로 낮아진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는 기내에서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400억달러 지원안에 서명했다. 올해 한국의 국방비와 맞먹는 규모이다.
식량 및 에너지 위기는 러시아의 봉쇄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도 흑해 연안에 기뢰를 설치했고, 러시아에 대한 총체적 제재로 세계 공급망이 혼조에 빠진 상황이다. 서방이 흑해 해상 봉쇄를 풀려고 들면, 이는 우크라이나 군사력만으로 불가능하다. 크림전쟁 때 영·프 연합군의 세바스토폴 공격을 제국주의 전쟁 때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러시아가 사활적인 흑해 제해권을 놓고 어떤 대응을 할지도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대목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이나 중국·소련은 지정학적 이해가 크지 않았음에도 20년간 사활적인 대리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스스로 진화하는 유기체이다. 전쟁이 터지면, 지속해야 할 이유는 추가된다. 강대국의 문 앞에서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서방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의 크림전쟁과 베트남전이 될 수 있다.
정의길 |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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