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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장악’ 논란 경찰국 수장의 ‘수상한’ 과거 행적

道雨 2022. 8. 8. 09:45

경찰 장악’ 논란 경찰국 수장의 ‘수상한’ 과거 행적

 

 

 

 

 
* 1989년 10월18일자 <한겨레> 신문.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은 1989년 8월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에서 경찰 경력을 시작했다. 대공수사3부는 8월부터 인천·부천 등지의 노동자들의 정치의식화 작업을 펴왔다는 혐의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수사를 개시했다. 한겨레DB

 

 

윤석열 정부가 위헌·위법 논란까지 무시한 채 신설을 강행한 행정안전부 경찰국의 첫 책임자가, 1980년대 노동운동단체 활동을 중단한 직후 ‘대공 특채’로 경찰에 들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가뜩이나 경찰국이 권력의 ‘경찰 장악’을 위한 도구가 될 거라는 비판이 거센 터에, 하필 내무부 치안본부 시절의 혹독한 민주주의 탄압과 음습한 공작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을 경찰국장에 임명한 것은 어떤 경위에서건 매우 부적절하다.

 

<한겨레> 등의 보도를 보면,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은 1989년 8월 경장으로 채용됐다.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로 분류된 특채였다. 그 뒤 ‘홍제동 대공분실’로 불리던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에 처음 배치돼, 1998년 경감 승진 때까지 줄곧 같은 분야에서 일했다.

 

앞서 그는 1988년 2월 결성된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4월께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고는 넉달 만에 자신이 활동해온 분야와 관련된 경찰 업무를 맡은 것이다. 그가 종적을 감춘 시기를 전후해, 인노회 회원 15명이 경찰에 줄줄이 구속됐고, 조직은 사실상 해체됐다.

1989년 인노회 활동으로 조사를 받은 뒤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 분신한 최동씨가 끌려간 곳도 홍제동 대공분실이었다.

 

1980년대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이런 전후 사정을 들어 그의 행적을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경찰 ‘프락치’(끄나풀)로 활동하고 대공요원으로 특채된 게 아니냐는 얘기다.

 

김 국장은 <한겨레>에 “황당한 억측에 불과하다”며 “관련 내용을 수사에 이용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인노회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을 한 게 아니고 주사파운동을 한 것”이라며 “민주화운동으로 미화하거나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7일 열린 ‘최동 열사 32주기’ 행사에서,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과거의 의문스러운 행적에 대해 낱낱이 소명하고 회원들의 의혹 제기에 진실로 답해달라”고 요구했다.

 

김 국장은 인노회 활동을 평가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다. 설령 자신이 직접 연루되지 않았더라도, 고문과 불법 연행 등 당시 경찰의 만행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권력의 경찰 장악 논란 한가운데 서 있는 경찰국 초대 국장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즉각 김 국장의 과거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 밝히고, 인사 적절성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 2022. 8. 8  한겨레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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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넘어 배신?…김순호 ‘경찰 특채’ 뒤 노동운동가 줄줄이 구속

 

 

 

 

1989년 치안본부 대공 특채 이듬해
인천 노동운동가들 잇단 연행·구속
김순호 “아는 사람 없어…수사 활용 안해”

 

 

 

1980년대 후반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조직책으로 활동했던 김순호 경찰국 초대국장(치안감)이 1989년 8월 ‘대공특채’로 경찰에 입문한 직후, 그가 활동했던 인천·부천 등지 노동운동가들이 잇달아 연행되는 등, 대공수사 표적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김 치안감은 “당시 활동 내용을 수사에 이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7일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인천 부평갑)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김 치안감은 1989년 8월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에서 경장 특채로 근무를 시작했다. 1992년 2월 경사로 승진해 경찰청 보안5과로 이동하기 전까지 약 2년6개월간 대공수사3부 소속이었다. 당시 학생운동 사건을 전담했던 대공수사3부는 ‘홍제동 대공팀’으로도 불렸다. 인노회 활동으로 경찰 조사를 받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90년 분신한 최동씨도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 1989년 10월18일자 <한겨레> 신문.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은 1989년 8월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에서 경찰 경력을 시작했다. 대공수사3부는 8월부터 인천·부천 등지의 노동자들의 정치의식화 작업을 펴왔다는 혐의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수사를 개시했다. 한겨레DB

 

 

김 치안감이 합류했던 1989년 당시, 대공수사부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로 수사가 주춤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당시 ‘김순호 경장’이 속했던 대공수사3부는 1989년 10월18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 대한 전면 수사에 나섰다.

 

인민노련은 1987년 6월 결성됐다. 김 치안감이 몸담았던 인노회는 이곳에서 사상노선 차이로 갈라져 1988년 2월 결성된 그룹이다. 이때 보도를 보면, 대공수사3부는 김 치안감이 공식 채용된 그해 8월말부터 인민노련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뒤 10월15일부터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10월19일 인민노련 중앙상임위원회 오동렬 위원장을 비롯해 15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대공수사3부는 이듬해 1990년 4월10일에는 인천노동상담소장과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인노협) 간부들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해 조사했다. 경찰은 당시 영장도 없이 해고노동자 이형진씨의 부천시 중동 거주 지역을 압수수색하고 연행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 치안감과 인노회 활동을 같이했던 박아무개씨는 “인민노련도 인노회와 일부 연대했던 조직이다. 김순호는 당시에 인노회의 조직책이라, (인노회가 아닌) 인천 쪽 노조와 관련한 얘기도 알 수 있던 위치였다”고 했다. 이성만 의원은 “당시 공단이 밀집된 인천에서 노동활동이 활발했고, 그 주변인 부천까지 활동 지역이 포괄돼 함께 노동운동이 진행됐었다”고 말했다.

 

 

* 7일 오전 경기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최동열사 32주기 추모제에서 안재환 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인노회 제공

 

 

이와 관련해 김 치안감은 경찰에 특채되기 전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을 수사에 활용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김 치안감은 이날 <한겨레>에 “줄곧 노동현장에 들어와 부천에 있었다. 인천은 알지 못하고 살아본 적도 없다. 그 단체(인민노련·인노협) 사람 중에서도 내가 아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공3부는 (학생운동) 전담이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업무분장상 그렇게 돼 있다는 것뿐이다. 대공 혐의점이 발견되면 업무분장과 관계없이 발견한 곳에서 (수사를) 한다”고 전했다.

 

자신과 관련한 의혹에 대해 김 치안감은 “황당한 억측에 불과하다. (인노회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을 한 게 아니고 주사파 운동을 한 것이다. 이들은 순수한 노동운동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식화, 조직화 운동을 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 미화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한편 이날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선 ‘최동 열사 32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은 행사가 끝난 뒤 입장을 모아 “김 국장은 과거의 의문스러운 행적에 대해 낱낱이 소명하고, 회원들의 의혹 제기에 진실로 답해달라. 행정안전부 장관은 김 국장의 인사 검증을 실시하고 검증 결과를 공개하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경찰국장 김순호 과거…‘노동운동→대공분실 경찰’ 180도 변신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53705.html곽진산 기자 kj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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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호 경찰국장님, 고문후유증 사망 ‘최동’을 기억하십니까

 

 

 

* 1990년 8월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리다 분신한 노동운동가 최동의 운구행렬이 당시 모교인 성균관대 교정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장지로 떠나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인간파괴’의 책임자를 처벌하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의 분신과 관련해, <한겨레>가 1990년 8월10일치에 쓴 사설 제목이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행정안전부 경찰국의 초대 수장 김순호 치안감의 과거 행적 논란이 불거지지 않았다면, 옛 기사를 찾아 그의 이름을 떠올릴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최동.

이란의 혁명지도자 호메이니에 빗대 ‘최메이니옹’이라 불릴 정도로 원칙주의자이면서도 다정다감한 문학청년이었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성균관대 4학년이던 83년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내 시위를 주도해 실형을 선고받은 그는, 복학 대신 노동 현장을 택했다.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프레스공으로 일하며, 88년 인노회(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 결성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상해, 너무 많은 걸 알아” 최동이 동생에게 남긴 말

 

89년 4월 그를 치안본부 홍제동 대공분실에 가둔 이른바 인노회 사건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노태우 정부 들어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구성죄가 적용됐던 이 사건은, 판사가 노동단체에 해당한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하기도 했다.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온 건 2020년이었다.

 

연행 뒤 치안본부의 준비된 조직탄압 수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동은, 20여일간의 조사 과정에서 동료들이 피할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며 두차례 자해를 했다.

여동생 최숙희씨는 통화에서 “면회 끝엔 늘 오빠를 꼭 안아줬는데 그때마다 ‘이상하다, 너무 많은 걸 안다, 다 피하라고 해’라고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밀실에서 며칠씩 잠을 재우지 않는 정신적 고문과 안기부로 넘기겠다는 협박, 자해 등이 겹치며, 송치 후 그는 실어증이 나타나는가 하면, 심각한 우울증, 정신분열을 겪었다. “나를 죽이려 감방에 분말가루를 뿌린다” “주사기로 에이즈균을 투입했다” 같은 말도 했다. 외부 입원이 필요하다는 의사 소견은 묵살됐다.

 

                   * 89년8월에 최동의 가족들이 발표했던 호소문. 최숙희씨 제공

 

 

 

집행유예 뒤에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종종 “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 나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폐인이 됐다”고 했다.

분신한 날 아침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다짜고짜 책상서랍을 뒤져 그의 메모를 가져갔다. 최씨는 “‘미제국주의와 치안본부의 00을 폭로한다’같은 제목만 어렴풋이 봤을뿐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어쩌면 오빠의 유서와도 같은 건데”라고 말했다.

 

최동이 아끼던 서클 한 해 후배이자 인노회 동료였던 김순호는, 부천지역 조직책이던 89년 초 갑자기 자취를 감쳤다.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등을 통해, 그가 그해 8월 경찰로 특채됐고, 대공분야에서 근무하던 90년대 범인검거 유공 포상을 몇차례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인노회 등 관련자 검거와 관련돼 정보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자신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주사파와 단절”을 위해 경찰을 찾아갔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상식적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이다.

몇년 전 김순호는 90년 최동의 죽음 때 왜 안 왔냐는 지인의 물음에는 “당시 절에 들어가 경찰시험을 준비해 소식을 몰랐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 행안부 초대 경찰국장 김순호 치안감. 경찰청 제공

 

 

아직 어떤 의혹도 단언할 일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때 가장 가까웠던 동지 중 한 명은 치안본부의 조사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대공경찰 특채 뒤 고속 승진을 해, 그 치안본부의 부활로 불리는 경찰국의 수장이 됐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라는 말만으론 다 담을 수 없는 현실, 지금 역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민주화 ‘유공자’가 되지 못한 ‘관련자’ 최동

 

지난 7일은 김순호의 의혹이 기억을 소환한 최동의 32주기였다. 그는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등과 마찬가지로 아직 민주화운동 ‘관련자’일 뿐이다.

 

민주화운동·의문사 유가족들의 442일간 농성 끝에, 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그들을 ‘유공자’라 부르지 못했다. 가까스로 처음 정권교체가 됐던 시절, 우리 사회의 합의 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16대 국회부터 매번 그들을 ‘유공자’로 대우하는 법이 발의됐지만 폐기를 반복한 끝에, 최근 170여명 의원들은 2020년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민주유공자법’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4·19, 5·18 유공자법 선례에 맞춰 구속수감된 이까지 대상으로 삼았던 역대 법안과 달리, 2020년안은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이미 ‘관련자’로 인정받은 이들 중 사망·행방불명·상이자로 대상을 대폭 제한했다. 전체 대상자는 829명, 유가족 지원까지 포함해 한 해 추산 예산은 12억원, 취업지원 대상인 30살 이하 자녀 또한 통틀어 5명 이하(유가협 추산)일 뿐이다. 그런데도 ‘운동권 특혜법’이라는 일각의 공격은 여전하다.

 

그들에 대한 예우를 언제까지 ‘관련자’ 같은 반쪽짜리 표현으로 두는 게 맞는 일일까. 지금 당연시되는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것도 아니고, 늘 흔들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법은 과거 민주화 희생자의 ‘명예’를 위한 것을 넘어, 그들을 온전히 기억하며, 우리 사회가 다시는 그런 시절로 퇴행하지 않겠다는 현재의 약속이자 다짐일 것이다.

그 약속을 윤석열 정부나 여당 또한 더 이상 외면할 이유나 명분은 없다.

 

 

 

김영희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