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정부

道雨 2022. 10. 25. 08:48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정부

 

 

 

 

참으로 희한한 논리다.

부처를 없애고 그 부처의 기능을 다른 부처의 본부에 두면, 해당 조직의 발언권이 커지고 정책 집행력이 강화된단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7일 정부조직개편안 설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가부 폐지 뒤 보건복지부에 그 기능을 넘겨받을)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가 만들어지면, 복지부 장관과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장도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성평등 추진 체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스피커가 2명이고, 두분이 일원화된 목소리를 낸다면 더 강화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독립부처로 있는 것이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김 장관은 이후 여러 언론 매체와 인터뷰하며 이런 ‘스피커론’을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20일 여성단체와 한 간담회에서는 이번 정부조직 개편안을 두고 “성별 건강불균형 해소, 여성 빈곤, 여성 장애인 문제, 사회복지 등 보건복지 분야 전반에 걸쳐 양성평등 정책의 집행력이 강화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말들이 참이라면, 정부조직개편안은 모순덩어리일 뿐이다. 정부는 지난 6일 발표한 개편안에 여가부 폐지와 함께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종합적·체계적 보훈 정책을 추진하고, 국가보훈 체계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김 장관 말대로라면, 보훈 정책과 보훈체계 위상 강화를 위해서는 보훈처를 독립부처로 격상할 것이 아니라, 국방부나 복지부 등 유관 부처 본부로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김 장관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 대선 공약에 비춰봐도 스텝이 꼬인다. 윤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여가부는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밝혔다. 여가부를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시대적 소명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김 장관 말대로 앞으로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가 만들어져 성평등 추진 체계에 강화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양성평등 정책의 집행력이 강화된다”면, 이것을 시대적 소명이 다한 조직의 종국적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시대적 소명이 다했으니, 힘을 뺀다고 해야 정상 아닌가?

시대적 소명이 다했다는 이유로 여가부를 폐지한다면서, 관련 목소리와 정책 집행력이 강화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김 장관 말은 여가부 폐지 반대 목소리를 덮기 위한 억지 포장에 불과하다.

 

여가부 폐지 시도가 있었던 14년 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여가부 폐지 등이 담긴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을 때,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임기를 한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여성부가 왜 생겼고, 그것이 왜 (참여정부에서)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되었는지, 그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까? 보육과 가정교육의 중요성, 가족의 가치를 살려보자고 여성부의 업무로 해놓은 것입니다. 여성부에서는 귀한 자식 대접받던 업무가 복지부로 가면 여러 자식 중의 하나, 심하면 서자 취급을 받지 않을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설적이지만 여성부는 ‘여성부가 없어지는 그날’을 위해 일하는 부서”라고 자서전에 썼다. 그의 말에 비춰보면, 여가부 폐지 시점은 여성 차별과 폭력이 우리 사회에 사라지는 때이다.

 

지금이 과연 그때인가.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는 2020년 기준 31.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이고, 한국은 세계경제포럼이 올해 발표한 ‘성 격차지수’ 순위에서 조사 대상 146개 나라 가운데 99위에 머물러 있다. 불평등뿐이랴. ‘엔(n)번방 사건’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잔혹범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여가부 폐지’를 내건 이명박 대통령은 그 뜻을 관철하진 못했다. 다만, 청소년·가족 업무를 떼어 복지부로 이관한 뒤, 여가부를 여성부로 축소했다. 그리고 2010년 3월 여성부를 다시 여가부로 되돌렸다.

그 실패한 정책을 윤석열 정부는 다시 꺼내 쓰려 하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정부는 그 역사를 다시 살 수밖에 없다.

 

 

 

김경욱 | 스페셜콘텐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