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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병진노선, 핵실험과 제재의 악순환

道雨 2022. 11. 1. 09:28

김정은의 병진노선, 핵실험과 제재의 악순환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100(2011)년 12월17일 8시30분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

 

2011년 12월19일 정오 <조선중앙텔레비전>은 ‘중대보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두번째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숨을 멈췄음을 세계에 알렸다.

 

열하루가 지난 2011년 12월28일 눈발이 휘날리는 금수산기념궁전 광장에서,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등 권력 핵심들과 함께 김정일의 주검을 직접 운구했다.

20대 후반 ‘3세대 최고지도자’ 김정은(1984년 1월8일생)의 등장은 “한반도 정세 전반에 불확실성을 드리우고 있다”고 당시 <한겨레>는 짚었다.

 

그러나 외부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달리, 김정은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날 노동당 고위 간부들한테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는 경제관리방법들을 다 참고해 우리식의 경제관리방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정은식 경제개혁’에 나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김정일 사망 두달여 뒤인 2012년 2월29일 ‘2·29 북-미 합의’가 발표됐다. 김계관 북 외무성 제1부상과 글린 데이비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월23~24일 베이징에서 3차 고위급 회담을 한 결과다.

미국은 북을 적대시하지 않고 양자 관계 개선에 나서고 영양식품 24만t 등을 제공하며, 북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영변 우라늄농축 활동 임시 중지에 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허용”하기로 했다.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출범 뒤 첫 북-미 합의다. 안으론 경제개혁, 밖으론 대미관계 개선, 20대 ‘영도자’의 초기 행보는 외부 예상보다 안정적·전향적이었다.

 

그런데 합의 발표 16일 만인 2012년 3월16일 평양에서 이상신호가 발신됐다.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 발사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북은 미국 등의 반대에도 2012년 4월13일 오전 7시38분 평안북도 철산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광명성 3호’를 발사했다.

 

합의 위반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북은 주권국의 권리인 “평화적 목적의 위성 발사”로 2·29 합의와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도발”(백악관 대변인 성명)로 규정하고, 북이 2·29 합의를 파기했으니 식량지원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의 2차 핵실험에 대응해 발표한 결의 1874호(2009년 6월12일)의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어떠한 발사도 금지”라는 규정엔 장거리로켓 발사도 포함되므로, 미국 반응을 과하다 할 수 없다.

글린 데이비스가 항의하자, 김계관은 “내가 약속한 건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단이지 로켓이 아니다”라고 둘러댔다고, 당시 사정에 밝은 고위 외교소식통은 회고했다.

 

북은 왜 2·29 합의 직후 장거리 로켓 발사라는 불신을 자초하는 모순된 행위를 했을까?

‘김정은 3세 승계’의 기반을 다질 국내 정치적 필요가 컸던 듯하다. 어쩌면 대외정책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서로 다른 생각이 원만히 조율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북은 로켓 발사 이틀 전 노동당 4차 대표자회를 열어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김정은을 ‘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했다. 로켓 발사 당일엔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김정은을 국방위 제1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북의 사정이 어떻든 이런 일방적 행보가 워싱턴의 대북협상파를 궤멸시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김계관한테 뒤통수를 맞은 데이비스는 협상 창구로서 권위와 신뢰를 잃었고, 그 뒤로 누구도 북과 협상해야 한다고 나서지 않았다. ‘북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워싱턴 하늘을 오래도록 뒤덮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8년 임기를 마친 2017년 1월20일까지 북-미 사이에 추가 합의는 없었다.

 

북은 2012년 4월13일 광명성 3호의 궤도진입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그해 12월12일 장거리로켓 은하 3호를 쏘아올렸다. 유엔 안보리가 제재 결의 2087호(2013년 1월22일)로 대응하자, 북은 두시간도 안 돼 “핵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인 군사력을 질량적으로 확대·강화하는 임의의 물리적 대응조치”(외무성 성명)를 예고하곤, 21일 만인 2013년 2월12일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유엔 안보리는 제재 결의 2094호(2013년 3월7일)로 대응했다. 북의 핵실험·미사일(로켓) 발사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가 맞물리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그리고 ‘김정은의 폭주’가 본격화했다. 김정은은 2013년 3월31일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한 보고(연설)를 통해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킬 데 대한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제시”했다. 저 악명 높은 ‘경제·핵 병진노선’의 시작이다. 말이 병진이지 실제론 북의 부족한 자원을 ‘핵능력 강화’에 쏟아붓겠다는 공개 선언이다.

 

김정은은 “미국의 공화국 압살 야망”을 거론하곤 “핵무기보유국들만은 군사적 침략을 당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는 김일성 주석의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나라에는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던 호언(1991년 12월18일 스티븐 솔러즈 미 하원 외교위 아태소위 위원장 면담), 핵실험을 하고도 “비핵화는 수령님의 유훈”이라고 거듭 다짐한 김정일의 모호한 태도와 전혀 다른 노골적인 ‘핵무장 선언’이었다.

 

2016년 1월6일 북은 4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 안보리는 제재 결의 2270호(2016년 3월2일)로 대응했다.

미국과 중국의 밀당 끝에 ‘민생 목적 석탄 수출 예외 인정’이라는 단서가 달리긴 했으나, 북의 독보적 1순위 외화소득원인 석탄 수출이 금지됐다. 유엔 대북 제재가 북 경제를 실질적으로 옥죄는 수준으로 강화된 것이다.

 

그 두달 뒤 김정은은 36년 만의 노동당 대회인 ‘7차 당대회’(2016년 5월6~9일)에서 병진노선을 “항구적 전략노선”이라 선언했다. 그러곤 넉달 뒤인 2016년 9월9일 5차 핵실험을 했다. 한해 두차례, 8개월 만의 핵실험이다. 북의 핵실험 주기가 엄청 빨라졌다.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 2321호(2016년 11월30일)는 5차 핵실험으로부터 83일이 지나서야 발표됐다. 그러나 제재 수위는 높았다. ‘연간 750만t 또는 4억87만달러 상당’을 넘어서는 석탄 수출은 무조건 금지됐다. ‘민생 목적’을 앞세워 제재를 회피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2017년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는 빠르게 전쟁 위기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북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4일 “대륙간탄도로켓 ‘화성-14형’”을 쏘아올리고는 “세계 그 어느 지역도 타격할 수 있는 최강의 대륙간탄도로케트를 보유한 당당한 핵강국”(<조선중앙텔레비전> 특별중대발표)이라 주장했다.

김정은은 화성-14형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며 “미제와의 기나긴 대결이 드디어 마지막 최후계선에 들어섰다”고 했다.

7월28일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가 이어졌다.

유엔 안보리는 북의 석탄 수출 전면 금지와 국외 파견 노동자 규모 확대 금지 등을 담은 결의 2371호(2017년 8월5일)로 대응했다.

 

북은 “미국이 경거망동한다면 그 어떤 최후수단도 서슴지 않고 불사할 것”(8월7일 ‘공화국 정부 성명’)이라며, 추가 군사행동을 예고했다. 바로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회견에서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에 북한이 직면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번엔 조선인민군 전략군 대변인이 나서 “괌 주변 포위사격 검토”를 입에 올렸다. 그러곤 9월3일 6차 핵실험을 했다.

유엔 안보리가 이례적으로 빠르게 핵실험 8일 만인 9월11일 결의 2375호로 대응하자, 북은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2형’을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지나 북태평양 바다에 떨어지게 쏘며 맞섰다.

결의 2375호는 북의 1위 수출품인 석탄에 이어 2위 수출품인 섬유·의류제품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원유·정제유 대북 수출 총량제한제를 도입해 대북 압박의 강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한반도가 전쟁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간다는 위기의식이 감염병처럼 빠르게 번졌다. 2017년 5월10일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의 공포에 맞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7월6일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라며 “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이라고 절규해야 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