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극일’이라는 보수의 거대한 착각
# 매해 6월30일 일본 아키타현 오다테시(옛 하나오카)에선 중국인 생존자·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하나오카 사건’ 희생자 추도식이 열린다.
1945년 6월30일 하나오카 광산에서 가시마건설의 수로변경공사에 강제동원됐던 중국인들이 일본인 감독 등을 죽이고 탈출했다. 1년간 이곳에 끌려온 중국인 전체 986명 가운데 사망자가 418명이란 기록에서 짐작되듯, 열악한 노동조건과 가혹한 학대 때문이었다.
‘봉기’는 금세 진압됐다. 체포된 전원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수십년 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가시마건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우여곡절 끝에 도쿄고등재판소의 권고를 통해 2000년 ‘하나오카 화해’로 이어진다. 가시마건설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중국적십자회에 5억엔을 내, 강제동원 피해자 모두에게 ‘화해금’이 돌아가게 했다.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중-일 관계가 최악일 때도 시가 주최하는 추도식은 계속됐다. 일본 시민들의 모금으로 하나오카 평화기념관이 세워졌다.
# 반면 하나오카 사건 1년여 전인 1944년 5월29일, 도와광업이 관리하던 하나오카 광산 갱도에서 일어난 ‘나나쓰다테 사건’의 현주소는 초라하다.
강제동원됐던 조선인 11명과 일본인 11명이 탄광사고로 생매장됐다. 대피 위치도 파악되고 1주일 이상 생존자가 있음을 알았지만, ‘채굴작업 지연’을 이유로 상급 관청은 피난한 이들을 ‘순직’으로 처리하고 매몰할 것을 허가한다.
이런 사실 역시 그나마 일본 작가와 지역 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으로 밝혀진 것이다. 조선인 피해자들의 유골은 수습되지 않았다. 위락시설 개발을 위해 회사가 어느 공동묘지 구석으로 옮긴 조혼비엔 설명도 없이 창씨개명된 이름만 새겨져 있다.
수십년 전 역사를 새삼 떠올린 건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회 회장과의 최근 통화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해법’ 발표에 대해 그는 “강제동원의 본질이 인권침해임을 외면한, 정말 이상한 해결책”이라고 몇번씩 말했다.
“국가 간 조약에서 포기하는 건 ‘외교적 보호권’이고,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건 일본 정부도 일본 최고재판소도 인정해왔다.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도 배상청구권은 포기됐지만, 중국인 강제동원에 대해선 기업이 사죄하고 돈을 냈고 일본 정부는 방해하지 않았다. 일본이 ‘이중기준’을 적용하는 셈이다.”
하나오카 화해 이후 일본 기업의 중국인 강제동원 문제 해법엔 △기업의 책임인정과 사죄 △소송 원고뿐 아니라 피해자 전원에 ‘화해금’ 지급 △역사교육 등이 대부분 포함되게 됐다.
한-일 외교에서 완승, 완패 식의 평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선악의 대결만 증폭되면서 정작 피해자들이 존엄성을 회복하는 길은 더 멀어진 역사를 봐왔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와 보수지들이 줄기차게 비판하듯, 문재인 정부가 대법원 판결 이후 피해자와 일본 정부·기업들을 테이블에 앉히려는 노력을 방기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번 방안이 ‘대승적 결단’이라거나 “세계 전체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줄 것”이라는 정부와 대통령의 주장은 궤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나 기업의 사죄도 없고, 배보상은커녕 화해금도 없는 해결안에 어디 피해자의 인권이 있나.
일본의 ‘이중기준’을 허용하고 부추기고 있는 이들은 지금 누구인가.
일부 보수층은 이런 ‘대승적 결단’이 ‘죽창가’ 식 반일과 달리 선진국으로 올라선 한국의 진정한 ‘극일’이자 미래지향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식민지배 받은 나라 중에 지금도 사죄나 배상을 하라고 악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냐”는, 석동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의 망언도 그런 맥락일지 모른다. 뒤틀린 역사인식에서 나온, 대단한 착각이다.
일본에 제대로 된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건 결코 ‘열등감’의 발로가 아니다. 한-일 간 역사갈등은 늘 있었지만, 현안으로 본격화된 것은 양국이 수직적 관계를 탈피해 수평적 관계로 바뀌고 나서부터다. 설사 ‘조약의 벽’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례에서 보듯 피해자 인권을 중심에 둔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인권과 피해자 권리에 대한 인식의 진전은 역사문제에 있어서도 새로운 과제를 만들어나가는 법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한·일이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다. 그런데도 미리부터 우리 패를 다 까놓고 조급하게 일본에 매달린 것은, 양국 관계를 다시 과거의 ‘수직적’ 관계로 돌려놓겠다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일본 변호사 우치다 마사토시가 쓴 책 <강제징용자의 질문>엔 2016년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중국인 강제동원에 대해 사죄한 구절이 소개돼 있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를 잘못이라고 한다.”
한국의 발표가 이런 성찰을 끌어낼 리가 만무하다. 윤 대통령 개인은 미국 정부의 노골적 칭찬과 일본 정부의 환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선 굴욕적인 ‘하수 중의 하수’를 뒀다.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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