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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박근혜 책임론 빠진 언론의 '엘리엇' 보도

道雨 2023. 6. 28. 17:54

이재용·박근혜 책임론 빠진 언론의 '엘리엇' 보도

 

 

 

국민 세금으로 투기자본에 거액 배상금 내야 할 판

정경유착이 패소에 영향…책임 가려 구상권 청구해야

조중동, 경제지 등 이재용·박근혜 책임 언급 안해

한겨레·경향·민들레·KBS·MBC 등은 '구상권' 제기

 

국민이 낸 피 같은 세금, 혈세(血稅)로 무려 1300억 원이나 되는 돈을 해외 투기자본에 물어주게 생겼다. 민간 기업이 아닌, 정부가 국제 소송에서 패소해 국민 세금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내야 한다면, 이는 언론이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니다. 사건의 전말과 문제점, 책임을 분명히 따져 물어야 한다.

 

지난 20일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상설중재재판소(PCA)가 한국 정부에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대해 약 1300억 원을 손해배상과 이자 등으로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엘리엇이 지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을 동원해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입었다며, 이른바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ISDS)’를 제기한 결과다.

 

이 판정에는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표를 던지도록 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승계를 도왔다는, 지난 2019년 우리나라 대법원의 국정농단 재판 결과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마디로 한국 정부와 재벌기업 간 정경유착과 불법행위로 인해 해외 투기자본이 입은 손해를, 우리 국민이 (세금으로) 물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 민변 공익변론센터와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관계자들이 지난 2020년 2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부당하다며 관련 주주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제기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이에 대해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에서는 배상금 지급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불법행위로 이익을 봤으면 그 당사자가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들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이 손해를 입은 것도 문제인데, 왜 국민 세금으로 거액의 배상금까지 내야 하나?

 

합병으로 삼성그룹 경영권 강화와 승계라는 이득을 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그리고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력을 넣고,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거액 배상금에 책임져야 할 당사자다.

 

하지만 국내 여러 언론은 이런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엘리엇에 한국정부가 거액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정결과가 나온 당일, 여론을 주도하는 여러 주요 매체들은 이 소식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스트레이트 기사로 판정 내용을 전달했을 뿐, 그 의미와 책임소재를 따지는 언론은 많지 않았다. 이재용·박근혜 책임론에 대해 언급한 매체도 소수였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5년 5월 7일 오전 경기도 평택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내 부지에서 열린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식에 참석, 기공 발파식을 마친 뒤 이재용 부회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21일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PCA 판정 내용을 1면이 아닌 사회면 중·하단 정도에, 중앙일보는 사회면 톱에 배치해 보도했으며,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책임을 묻는 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거대 족벌신문들은 삼성의 최대 광고 수혜자인데다,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하고야 만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키고 지지했던 원죄 탓에, 이재용·박근혜에 대한 구상권 청구에 대해 차마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일까?

 

특히 동아일보는 22일자의 한 논설위원이 쓴 ‘횡설수설’ 칼럼에서 “(박근혜) 정부가 합병 승인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해 삼성에 도움을 줬는지는 합병이 불법이었는지와는 상관없다”면서 “정부가 벌이고 정부가 바로잡는다고 한 그 일로 인해 세금으로 엄청난 손해배상을 하게 됐다. 우릴 자책할 수 없긴 한데 정확히 누굴 탓해야 하나”라고 했다.

엘리엇 소송에서 한국 정부 패소의 원인이 된 대법원 판결 – 국민연금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받은 대법원 유죄판결 - 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내 ‘누굴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의 ‘횡설수설’ 주장을 펴고 있는데, 누굴 탓해야 할지 답은 간단하다.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탓하면 된다. 엘리엇은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중재재판소의 배상금 결정에는 박근혜-이재용 간에 오고간 ‘암묵적 청탁’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 판결이 영향을 끼쳤다.

 

조선일보는 ‘엘리엇과 9900억 소송 정부, 690억 배상해야’ 제목의 12면(사회면) 맨 하단 기사에서 “엘리엇이 청구한 손해배상 금액의 7%만 인정된 것”이라고 전하며, 관련 기사를 짧게 보도했다.

 

이후에도 한국정부가 거액 배상금을 물게 된 데 대한 문제를 지적하거나 책임을 따지는 보도 대신, 오히려 다음날인 22일자 1면에 ‘삼성 이재용, SK 최태원 기업도 부산 엑스포 유치 총력전’ 제목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엑스포 유치에 힘을 보태는’ 이재용 회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 경제지들은 중재재판소 판정 소식을 1면에 게재하고는, ‘기업사냥꾼 맞서 잘 싸운 정부’(매경), ‘정부, 1조 배상 위기 벗어나 선방’(한경)이라며, 오히려 정부를 두둔하는 주장을 펼쳤다.

국민 세금으로 1300억원을 해외 투기자본에 물어주게 생겼는데, 정부가 잘 싸웠다고 두둔할 때인가?

‘배상금의 7%만 받아들여졌으니 93% 승소한 것’이라는, 정부의 무책임하고 안이한 논리와 같다.

메이슨 캐피탈이 엘리엇과 같은 이유로 낸 소송에서 패소해, 한국 정부가 또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맞게 되어도 ‘선방’이라고 칭찬할 것인가?

 

매경과 한경은 사설에서 ‘ISD판정 불복절차 나서야 해외투기자본 공격 막는다’, ‘정부 배상 서두를 이유 없다’는 주장을 폈다. 정경유착과 불법 행위가 개입된 삼성의 기업 합병, 그로 인해 결국 국민 세금으로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지적은 없다.

해외투기자본 공격만 문제이고, 국내 재벌기업의 불법과 정경유착은 괜찮다는 것인지, 그로 인한 손해와 책임은 국민이 고스란히 져도 괜찮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아무리 경제지라 하더라도 재벌기업 이익이 국민이 입게 될 손해보다는 앞설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언론이라기보다, 재벌기업의 기관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여러 매체에서도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상권 청구 언급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재용·박근혜의 이름을 기사와 칼럼의 제목에서 아예 찾아 볼 수 없다.

이를 두고 삼성이 광고를 이용해 언론 매체들에 ‘이재용 부회장의 이름을 제목에서 빼달라’고 강하게 압박했고, 광고 수익에 목을 맨 언론사들이 이를 받아들여 결국 보도를 자제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마침 23일에는 일부 종이신문에 수백~수천만 원 짜리 삼성의 전면 광고가 게재된 것이 우연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겨레, 경향, 한국, KBS, MBC, SBS, YTN 그리고 시민언론 민들레 등은,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름을 넣은 ‘구상권 청구’를 제목에 뽑아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주장을 전달했다. 

 

 

‘박근혜·이재용이 배상하라…엘리엇 판정에 법무부는 고심’(한겨레),  ‘엘리엇에 배상, 박근혜·이재용에 변제받아야’(한겨레, 사설), ‘엘리엇 1,300억 배상, 이재용·삼성물산·박근혜에 구상권 청구해야’(경향), ‘1,300억원 배상… 박근혜, 이재용에 구상권 청구 가능’(SBS), ‘삼성 승계에 세금 1,300억원? 구상권 청구해야’(KBS), ‘과거에서 날아온 청구서…박근혜, 이재용 물어내야’(MBC), ‘엘리엇 1,300억 패소 판결문에 이재용, 박근혜 이름 있나?’(YTN), ‘엘리엇 1,300억 배상, 이재용·박근혜가 물어내게 해야’(시민언론 민들레) 

 

 

 

삼성 등 재벌대기업이 광고를 통해 언론을 조종해온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이재용 부회장 이름이 보도에서 언급되지 않도록 언론사에 광고 압박을 가했을 수도 있다. 국민 세금 1,300억원을 해외 투기자본에 갖다 바쳐야 할 판인데도,  삼성으로부터 광고를 받지 못할까봐 언론이 ‘이재용 부회장에 구상권 청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 여전히 현실이라면, 언론이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겠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 뿐이다. 

 

 

 

김성재 에디터seong680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