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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고진이 폭로한 ‘다극체제’의 실상

道雨 2023. 6. 30. 12:39

프리고진이 폭로한 ‘다극체제’의 실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3년 철권통치 비결은, 특권층의 권력과 돈, 안전을 지켜줄 ‘쎈 지도자’임을 증명해온 데 있다.

정보기구와 군부 출신 측근들인 ‘실로비키’들이 에너지·군수산업 등을 장악해, 막대한 이권을 독점한 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푸틴은 암살과 전쟁, 핵 위협, 가짜뉴스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한 통치를 해왔다.

이권에서 배제된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러시아 제국의 위대한 부활’을 약속해 지지를 끌어냈다.

‘제국의 부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구소련 국가들을 ‘속국화’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해왔다.

 

 

지난 주말 용병부대 바그너그룹 수장 프리고진의 ‘36시간 반란’은, 일주일이면 손쉽게 친러 꼭두각시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제 푸틴을 위협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푸틴의 권력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러시아인들은 궁지에 몰린 푸틴의 취약한 모습을 목격했고, ‘무적의 지도자’ 신화는 깨졌다.

 

푸틴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동진해 러시아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특수군사작전’에 나섰다고 선전해왔다.

프리고진은 그것은 거짓 명분이며, 러시아군 내 특권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침공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러시아가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속국화하려 한 제국주의적 본질, 그리고 푸틴이 ‘차르’ 행세를 하면서 러시아는 군벌화한 용병집단이 할거하는 중세국가처럼 퇴행했다는 현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프리고진의 반란은 푸틴과 ‘무제한의 협력’으로 ‘미국 패권에 맞서는 다극체제’를 만들겠다고 다짐해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곤혹스럽게 했다. 

 

*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19년 11월 13일(현지시간)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개막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제11차 정상회의 참석 전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이 모스크바를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동안, 중국 정부와 관영언론은 조용했고, 중국인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푸틴 만세’를 외치는 애국주의자들 사이에서, 프리고진을 8세기 당나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켜 결국 당을 멸망의 길로 향하게 한 안록산에 비유하는 글들, ‘중국인민해방군이 지금처럼 당의 군대여야 하는가’라는 논쟁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개인들끼리의 대화방에선 검열을 피해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하다가는 중국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대만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수근거림이 이어졌다.

 

최근까지 중국은 미국 등 서방의 경제 제재에도 러시아가 큰 타격을 받지 않자, 세계 질서가 더이상 미국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우크라이나 전황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대만 전쟁 상황에 대비한 여러 시나리오를 연구해왔다고 중국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가 중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중국은 ‘푸틴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반란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가는 동안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것이 푸틴의 통제력 약화를 의미하는지를 주시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푸틴 체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원하면서도, 중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대책들을 마련 중일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여온 한국 ‘진보 진영’도, 이번 사건을 중요한 성찰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동안 러시아의 주장에 동조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다극체제’를 만들고 있다고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2월 대선 토론회에서 이재명 당시 민주당 후보가 “초보 정치인(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것”이라고 했다.

이달 초 민주당 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물러난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은 “푸틴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발부는 원천무효” “전쟁 책임은 서방과 우크라이나 엘리트에게 있다”, “중국의 신장위구르 탄압은 미국의 날조” 등의 주장을 해왔다.

티베트를 방문하고 온 민주당 의원들의 ‘인권 탄압은 70년 전 일’이라는 발언은 큰 반발을 불렀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일 일변도’ 외교로 중국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반중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위태로운 외교를 해온 것은 분명하다. 검찰을 내세워 폭주하면서도 민주·자유의 ‘가치 외교’를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가치 외교’에 대한 비판이 ‘무가치 외교’로 흘러서는 안 된다. 진보가 ‘균형 있는 가치외교’로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 여론의 동의를 받아야 변화의 희망이 생긴다. 세계의 혼란과 불평등을 수습할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려면 국제정세의 변화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진보 외교’의 전체상을 재정립해야 한다.

 

‘미국 패권’에 대한 비판이 중국·러시아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일 수는 없다. 중국·러시아와 관계를 관리하고 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두 나라의 문제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흑인 차별, 난민 문제, 경찰 폭력을 직시해야 미국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침략·소수민족 탄압·인권 문제를 제대로 보아야 러시아와 중국의 현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외교 원칙을 세울 수 있다.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한국 진보가 독재와 맞서 싸웠던 역사마저 지워져버릴까 두렵다.

 

 

 

박민희 I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