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글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 (2002. 3. 13 )

道雨 2007. 6. 14. 01:07

 

 

  당신이 오늘 메일로 보낸 내용을 잘 읽어 보았소. 서너 번 읽어보고 답장을 쓰는 거요. 내일이 소위 화이트데이라는데, 남자가 사탕을 주는 날이라고 하던데..

  어쩔까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멋쩍고 유치한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소.  당신이 서운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겠다 생각하오.


  당신 입에서(비록 메일이지만) '봉렬씨'라는 말을 듣고 보니, 여러가지로 생각이 드는구려. 좋게 말하면 옛날의 연애감정으로 돌이켜보자는 것도 같고, 안 좋게 생각하면 이제는 남남으로 가기 위한 호칭의 변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힘든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는 웃기도 울기도 하는 것이 인생사'라고 누구 말을 빌릴 것도 없소. 당신도 알고 있듯이 올해가 결혼 20주년이고, 5월 19일(석가탄신일, 일요일)이 결혼기념일이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기간을 같이 살아온 것이오. 그동안 아이 둘이 생겨 큰놈은 벌써 성인의 대열에 들어섰소.


  지난번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내 마음에 두고 있는 여러가지 생활 속의 생각 중의 하나가 '나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자'는 것이오. 당신이 생각을 달리 한다해도 나의 생각은 아직 그대로이오. '나'를 확대 해석하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고, 진정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인 것이오.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진정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란 것을 당신도 알 것이오.

 

  나는 유학을 배운 바 없지만 선현들이 남긴 좋은 말씀들은 귀담아 듣는 편이오. 그것을 현대식으로 응용해야 할 것이지만...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주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했소. 자식이 귀하고 미운 것이 어디 있겠소만, 내심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새겨 들어야 할 것이오. 지금의 매가 나중에는 떡이 될 것이고, 지금의 떡이 나중에 매가 될 것이 아니겠소.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우라고도 했소. 엄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사회의 규율을 생각하면 누군가는 엄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오.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냉철하게 사리판단을 할 사람도 필요하고, 과단성 있게 결단을 내릴 사람도 필요한 것이오.

  나는 우리 집에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하였소. 훗날에 자식들이 그것을 알아주던 몰라주던 난 자식들을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오. 이 힘든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헤쳐나갈 능력을 키워줄 책임이 있는 것이오. 지금은 힘들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고 사회에 접촉을 해 보았고 사람들을 대해보았기에 최소한 우리집에서는 그러한 판단과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내가 비록 직업군인이었고 지금 한의사라 하더라도, 수입이 여의치 않아 당신에게 생활비를 여유있게 주지 못하고, 애들 용돈도 넉넉하게 주지 못해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이 보람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고, 최소한으로 양보한다 해도 경제적이나 정신적으로 파탄나지 않게 할 책임이 있는 것이오. 미리미리 판단하고 준비하지 못하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이오.

 

  우리 식탁에도 당신이 써 놓았지 않았소? '약무원려 필유근우'(한자를 어떻게 바꾸는지 몰라 그대로 쓰오)라고. '만약 멀리(미리미리) 생각하고 준비함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일에 근심거리가 생긴다‘고.

 

  범진이 학원 문제도 그렇소. 공진이가 가르치면 학원비도 줄이고 공진이 용돈도 도움이 되라라 생각했겠지요. 그것이 멀리 보지 못한다는 것이오.

  내가 예전에 학원 다닐 때(검정고시, 재수학원) 제일 못나게 생각하는 것이 학원을 이리저리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아이들이었소. 또 옮길 때마다 새로운 준비(책,진도,분위기 등) 때문에 마음들이 흩어지기 일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소.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였소. 지금 범진이는 자꾸만 마음이 산란해지고 있소. 지금의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작년 한햇동안 서전학원을 다니고 선생들이 노력해준 덕이라고 생각하오. 범진이가 공부한 것에 비하면 엄청 잘 나왔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그것은 저학년이기에 가능했고, 앞으로는 갈수록 힘들어지는 것이오. 마음을 꼭 잡고 일심으로 노력해도 힘들어지는 때인 것인데 학원을 옮기려는 따위의 생각으로 낭비할 때가 아닌 것이오. 지난 겨울방학 때 보충수업을 하지 않고 보낸 것도 학업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본 것이오. 그리고 자식 교육은 남에게 시키라고 했소. 부모도 피하는데 공진이가 범진이를 가르칠 능력도 되지 못하려니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오. 지금까지의 수학 실력으로는 범진이가 공진이보다 더 나은 상태요(최소한 진도 나간 곳에 관해서는). 다만 범진이가 노력하지 않고 공부에 시간 투자를 하지 않기에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학원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해야 겨울방학 때 같은 실수를 면할 것이오.

 

  그리고 아이들과 난 당신이 모르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걱정할 것 없소. 남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오.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오.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생각이 건전하고 착하기에, 크게 그릇됨이 없이 잡아주기만 하면 될 것이니 크게 염려하지 마오.

 

  내 생각의 90% 이상은 내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소. 올해는 구회장일 맡느라고 신경이 조금 더 쓰이지만, 어쨌든 내 집안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다만 책임을 지고 있으니 할 일은 해야겠지.

 

  늘 얘기하지만 나는 여러 번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성격이라, 평소 쉽게 대답하거나 장담하지 않는 터라 당신도 늘 불만일 것이오. 그건 내가 입으로 뱉은 말에 대해 천금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에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금방 대답을 못하는 것이니 양해를 바라오.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함을 지향하는 성격이라 내 자신이 늘 피곤하고, 당신이나 아이들도 피곤할 것이요, 나와 가까운 사람들도 힘들 것이오. 그러나 이것이 내 가정을 위하고 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면 난 피곤하더라도 계속 이 길을 갈 것이외다.


  가장(누가 부여했는가?)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내 삶을 불사를 것이오. 권위를 가진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사랑한다고 권위를 무시해도 좋은 것이 아니오. 지켜야 할 사항은 지켜가면서 살 것이오. 비록 속으로는 다 내던진다 하더라도...


  내 삶이 끝나는 날 나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 생각하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남편 오 봉 렬 씀.

 

 

 

* 위의 편지는 2002년 3월 13일 아내가 나에게 보낸 e-메일편지에 대한 답신 편지글임.

 

** 약무원려 필유근우(若無遠慮 必有近憂)  : '만일 멀리 보고 미리 염려함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시기에 근심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뜻.

 

 * 2006년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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