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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은 ‘바둑 왕국’… 세종도 푹 빠져

道雨 2008. 1. 17. 16:34

조선은 ‘바둑 왕국’… 세종도 푹 빠져

 

(사진은 단원 김홍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둑 그림)

 

 

고대 사서에 만 가지 놀이의 제왕으로 기록된 바둑.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21세기에 이르러 한국이 세계 최강의 실력으로 우뚝 서게 된 바둑. 그 바둑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소설가이자 한학자인 이청(48·사진)씨가 『한국 바둑사』를 처음 펴냈다. 중국의 수많은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실록에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승정원일기까지 뒤져 한국 바둑에 관한 기록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조선실록의 바둑에 대한 기록은 380건, 승정원일기는 260건. 비변사 등록원 등에서 찾은 기록이 1000건이 넘는다. 4년여에 걸친 작업이다.

책에 따르면 조선은 바둑의 유토피아였다. 조선의 바둑은 당대 제일의 기예이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그 인기는 500년 내내 식을 줄 몰랐다. 태종의 친위세력들은 거의 바둑을 즐겼고 세종은 고수 조순생을 아예 관원으로 발탁했다.

 

세조는 ‘바둑왕’으로 꼽힐 만한 인물. 정무가 끝나면 상금을 걸고 측근들의 바둑 시합을 구경하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세조 때에 오면 바둑은 궁녀·환관·내의원에까지 미친다. 여자가 바둑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교자 안에서 바둑을 두다가 고변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는 왕과 사대부는 물론 시골 아전이나 기생들조차 바둑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바둑 고수를 외교전에 동원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선조·이순신·유성룡,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 명나라의 심유경 등 3국의 수뇌부가 모두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병법과 정책 등을 말할 때 바둑은 약방의 감초가 된다.

일례로 명장 진유격은 선조에게 왜군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한 판의 바둑입니다. 이 정도에서 판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는 인조 이후 바둑은 왕궁 등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는 오히려 숱한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다시 국기(國棋)·도기(道棋)·군기(群棋) 등으로 나뉠 정도로 극성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반대자도 많았다. 정조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바둑을 두지 않았고 실학자 이익은 바둑의 폐해를 규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조선의 최고수로 숙종 때의 장문익과 영조 때의 한대수를 꼽는다. 조선 국수들의 계보를 시대별로 정리한 것도 이 책의 성과로 보인다.

고대
기자조선과 더불어 한반도에 바둑이 유입되고 마한에서 한국의 바둑사가 시작된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삼국이 다 바둑을 즐겼지만 백제에서 특히 성행했다. 고려에 와서는 금기서화(琴棋書畵)라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귀족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 이것이 조선에 와서 전국적인 융성을 보인다는 기본 축은 기존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몇 가지 새로운 논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바둑 양식으로 여겨온 순장바둑의 원형이 인도의 시킴식 바둑이라는 것.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바둑으로 백제의
개로왕을 망하게 했다는 고대 바둑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삼국유사)를 소설적 과장으로 치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청씨는 청동기 시대인 3000년 전의 갑골문자집에서 당시에 이미 바둑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재미있는 자료도 찾아냈다.

중국과 일본은 바둑사가 그런 대로 충실하다. 한국은 바둑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은 없었고 야사나 인물사뿐이었는데 재야에서 먼저 한국 바둑사를 정색을 하고 쓰는 바람에 학계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중앙일보 /박치문 전문기자 2008.1.11>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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