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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영실만 있나?… 이순지-이천도 있다

道雨 2008. 1. 17. 16:34

장영실만 있나?… 이순지-이천도 있다

세계 최고 과학 수준 자랑한 세종 시대 과학자들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는 □□□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질문에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바로 장영실이다. 그러나 국내 과학사학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장영실이 비록 천재적인 기술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당대 최고 과학자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드라마 방영으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세종대왕 시대의 최고 과학자는 누구일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를 3명 들라면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꼽고 싶다”며 “장영실은 일반인들에게 최고의 인기 과학자이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최고로 꼽히는 과학자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 세계 최고 과학이 꽃핀 세종시대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도 “세종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면 이순지와 이천”이라며 “강의를 해보면 학생들도 오직 장영실만 알고 그를 최고로 치는 사실이 아쉽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취재한 다른 과학사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학계에 따르면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 과학사학계의 원로인 전상운(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박사는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학회’에서 15세기 전반을 세종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낸 ‘과학기술사 사전’에도 세종시대 세계적인 과학기술 업적이 29개나 실렸을 정도다. 같은 시기 중국은 3, 4개, 일본은 아예 없었다. 전 박사는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런 업적을 이뤄낸 과학자들은 누구일까?

세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과학 프로젝트 중 하나가 천문학, 당시 동양 용어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시간을 알아낸 역법이었다. 세종 시대에 중국의 역법을 뛰어넘어 우리만의 역법이론을 세운 과학자가 바로 이순지다.

실록에 따르면 병약하다고 알려진 이순지는 세종의 명을 받아 조선 고유의 역법 체계를 완성해 ‘칠정산내외편’을 지었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이천은 천문기구의 제작 책임을 맡은 과학기술자였다. 금속기술자이자 무신이었던 이천은 혼천의, 앙부일구 등 천체 관측 기구의 제작을 책임졌다.

이 밖에도 이천은 갑인자라는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50여 년 앞선 발명품이었다. 화포 등 무기 개발도 이천이 맡았다.

이 밖에 농사직설 등을 펴내는 등 여러 문헌 편찬을 맡았던 정초와 정인지, 의학책 향약집성방을 지은 노중례, 지도를 만든 정척과 양선지 등이 세종 시대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 극적인 삶이 낳은 장영실 신화

문 교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이천 밑에서 과학 기구 제작을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며 “스스로 시간을 알려주는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가 장영실 고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과학사학자들은 세계 수준의 천문 이론을 독자적으로 만든 이순지나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최고 책임자였던 이천이 자격루와 옥루 제작만 책임졌던 장영실보다 업적 면에서 더 훌륭한 과학자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왜 일반 사람들에게는 장영실이 최고로 알려졌을까? 문 교수는 “장영실이 훌륭한 과학기술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민족의 자존심 살리기와 노비에서 출세한 드라마적인 그의 삶이 결합되면서 다소 과대포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과 관련된 일부 민간단체가 ‘장영실 신화’를 확대 생산했다는 것이다.

장영실이 신화가 되다 보니 엉뚱한 주장이 마치 사실처럼 둔갑했다. 측우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 세자 시절 아이디어를 내 만들게 했던 것인데 많은 사람은 마치 장영실 혼자 만든 것처럼 알고 있다. 문 교수는 “역사 기록에는 장영실이 측우기 개발에 참여했다는 흔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장영실이 원나라에서 귀화한 고위 기술자와 동래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분명한 기록도 현재 엉뚱한 족보로 바뀌었다.

전 교수는 “세종 시대 우리 땅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이 꽃피었다”며 “장영실의 극적인 삶에 가려 있지만 세종과 함께 위대한 과학을 이뤄낸 다른 과학자들이 더 많이 조명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동아일보/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2008.1.11>

 

 

 이천  [李蕆]

 

1376(우왕 2)~1451(문종 1).
조선 초기의 무신·과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자현(子見), 호는 백곡(栢谷)·불곡(佛谷). 아버지는 군부판서 송(竦)이고, 어머니는 곡성염씨(曲城廉氏)이다. 1393년(태조 2) 별장(別將)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 1410년 무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세종이 즉위한 후 동남연해(東南沿海)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충청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지시로 1403년(태종 3) 만들어졌던 계미자(癸未字)의 기술상의 결점을 해결하기 위해 남급(南汲)과 함께 새로운 청동활자와 인쇄기를 만들었다.
이어 1434년 7월 지중추원사로 있으면서 보다 아름다운 글자체를 만들기 위해 김돈(金墩)·김빈(金鑌)·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과 새로운 청동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사업을 감독하여 20여 만 자의 크고 작은 청동활자를 완성해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 조판할 수 있게 되었다.
 
1431년 배를 만드는 데 판자와 판자의 연결 부분에 생기는 틈을 막아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갑조법(甲造法)을 쓰게 했다.
1432~37년 서운관(書雲觀)에서 정초(鄭招)·장영실·김빈 등과 함께 천체관측기기 개발에 노력하여 천문대용 관측기인 대간의(大簡儀), 휴대용 관측기인 소간의(小簡儀), 천구의(天球儀)인 혼의(渾儀)·혼상(渾象), 해시계인 일구(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누호(漏壺), 측후기(測候器)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제작했다.
또한 병선·군기·화포 등 전술무기를 개량했다. 1437년 9월 평안도절제사로 8,000명의 정벌군을 이끌고 삼로(三路)로 나뉘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소탕했다. 그뒤에도 서북 방면에서 침략해오는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0년 판중추원사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이순지(李純之)

 

1406년 - 1465년 조선 초기 최고의 천문역산가(天文曆算家)

자(子)는 성보(誠甫),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세종 때 가장 대표적인 천문학자가 이순지였다.

이순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406년에 태어나 1465년까지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공조와 호조 참의를 지냈고 원주 목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거친 양반 집안이었다. 당시 천문학자나 산학자는 대부분 중인이었으나 이순지는 당대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에서 근무했다. 그 뒤 세종이 1432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높이 8m나 되는 '간의대'라는 천문관측대를 세웠다. 간의대는 매일밤 5명의 천문관이 천문을 관찰했는데 이순지는 이 관측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이전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이 있었던 이순지는 이때부터 천문학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은 그가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 있을수 없게 되자 믿을 많나 관측자를 놓칠까 봐 근심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지는 어머니가 죽자 당시 관습대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려 했다. 이순지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유별난 것이었다. 5살까지 이순지는 아주 병약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자라지도 못했을 거라고 뒷날 스스로 회고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순지만한 천문 관측자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를 철저히 믿었다. 그래서 세종은 그가 관직을 떠난 지 1년만에 그를 억지로 다시 불러들였다. 3년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서울의 위도를 정확히 계산
<세종실록>에 보면 이순지가 서울의 위도를 정확히 계산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1430년대의 어느 날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출지'가 38도 남짓이라고 계산했다. 처음에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온 천문학 책에서 그 값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이순지는 <칠정산> <제가역상집> <천문유초> 등 천문학에 관한 책들을 만드는 데 힘썼다. 그 중에서도 <칠정산>의 완성은 큰 업적이었다.
'칠정산'이란 '칠정'의 계산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칠정이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 즉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말한다. <칠정산>은 바로 해와 달, 그리고 행성의 운동을 계산하는 기술을 완성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천문 역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보려고 했다. 그때는 중국의 천문법을 대부분 사용했다. 중국의 모든 천문 역법을 정리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수정한 것이 <칠정산 내편>이었다. 또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천문 계산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놓은 것이다. 이순지는 특히 <칠정산 외편>의 완성자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칠정산> 내편과 외편 모두에 중요한 몫을 했다.
이렇게 <칠정산>이 완성되어 조선의 천문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표준으로 한 역법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천체 운동의 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순지는 1445년(세종 27년)에 <제가역상집>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은 주로 천문, 역법, 의상 구루의 4부에 걸쳐 당시의 지식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의상이란 천문 기구를 말하고 구루란 해시계와 물시계를 말한다. 세종 때 수많은 천문기구와 해시계, 물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자연 과학의 연구에는 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이순지는 수학에도 전문가였다. 그래서 토지 측량사업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세조 11년(146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정평군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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