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소경의 한

道雨 2008. 2. 28. 10:56

 

 

 

소경의 한

원두표 정승의 운명을 점친 어느 장님의 한 풀이


아, 불쌍한 내 인생. 세상에 태어나 눈이 먼 것도 원통한데, 점을 봐주었다가 한 방에 얻어 맞고 죽은 나. 어디서 피맺힌 원한을 풀어야 하는가.

더구나 나를 때려죽인 깡패 원두표(元斗杓, 1593~1664)는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로로 정승이 되고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았으니....아! 과연 이 땅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운명의 장난은 왜 이리 심하단 말인가.

사마천(司馬遷)도 ‘천도(天道)는 있는가 없는가’하며 외첬듯이 하늘의 뜻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백이,숙제는 선인(善人)으로 평생동안 인(仁)을 지키며 몸을 삼가하고 살았으나 결국은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는 분명히 학문을 숭상하는 걸출한 인물이었으나 결국은 쌀겨조차도 먹지 못한 채 요절하고 말았다. 하나 죄없는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사람 고기로 포를 떠 먹은 도척(盜跖)같은 천하의 도적놈은 천수를 누리며 살았다.

사람이 뱀보다 싫어하는 짓을 감히 행하면서도 평생을 사치하며 살면서도 재산을 모아 후손에게 남기는 자가 있는 반면, 걸음걸이도 삼가하며 디딜 땅을 가리고, 또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고 국가의 대사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 인물인데도 화를 입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모순되고 황당한 현실을 볼 때, 나는 심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은 진정 착한 사람의 편인가 아니면 악한 자의 편인가?

내가 그 깡패를 만난 곳은 여주 관아의 감옥으로 이 자리를 빌어 그 자의 사악한 죄상을 소리 높혀 세상에 알리노라.

젊은 원두표는 몸집도 크고 힘이 장사였는데, 하루는 장터로 나갔다가 시비를 거는 불량배를 혼내준다는 것이 한 방에 죽이고 말았다. 옥에 갇힌 그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였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감방을 쓰고(?) 있었다. 나 비록 소경이지만 귀신처럼 남의 점은 잘 보았다. 부끄럽기는 비록 유부녀와 간통하다 그 남편에게 들켰고, 그 남편을 죽인 죄로 감옥에 들어 왔지만, 왠일인지 그 자의 운세가 나로써는 몹씨도 궁금하였다.

“형 씨, 내가 말이야 점을 잘 보는데 형 씨의 운세나 한 번 봅시다.”

“허, 그래. 그렇시다.”

나는 손으로 그 자의 얼굴이며 손금을 찬찬히 살폈는데 보통 인물이 아니였다.

"형씨는 말운(末運)이 좋아. 그런데 사람 둘만 죽이면 복이 터질 점괘구먼."

“뭐야. 그렇다면 또 죽일 놈은 너 밖에 없다.”

윽!

나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원두표의 한 방에 꽥하고 죽고 말았다.

당시 형법에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지방관이 형을 집행할 수 있지만, 두 명 이상을 죽였을 때는 한양에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형을 다스렸다. 그래서 의금부로 끌려 온 원두표는 여러 심문을 받은 후 사형장인 한강 ‘새남터’로 끌려 가게 되었다. 사필귀정이다. 그런데 나의 점괘에 말운이 좋다는 말을 들은 그라,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의 마음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마침 다른 점장이가 ‘운수를 물어 달라’는 뜻인 ‘문수해(問壽解)’라고 외치자, 그 소리가 원두표에게는 꼭 ‘물로겨(물로 기어 달아나라.)’라는 말로 들렸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형관(刑官)은 원두표의 옷을 벗기고 마지막 소원을 물었다. (소원은 무슨 얼어죽을! 야, 망나니. 빨리 처치해) 그는 술을 달라고 하더니, 이윽고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칼로 목을 벨 적엔 죄인의 포승을 풀고, 여러 명의 망나니가 돌아가며 춤을 추다가 그 중 한 명이 죄인의 목을 친다. 술을 먹은 원두표는 망나니 중 가장 허약한 놈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일격에 걷어차고는 한강으로 달음질을 쳤다. 워낙 몸집이 크고 걸음이 빨라 아무도 따라오지 못했다. 사형을 집행한 관리도 책임이 두려워 처형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한강을 헤엄쳐 내려 간 원두표는 마포 나루에 있는 ‘망원정’ 마루 밑에 숨어 있었다.

날이 저물어 밤이 되었을 때이다. 갑자기 많은 선비들이 정자에 오르더니 반정에 대한 모의를 해댔다. 자세히 들으니,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선비마다 각자의 역활과 행동 지침까지 정했으나, 그 중 한 명이 ‘돈화문’을 부술 사람이 없다며 한 숨을 쉬었다. 그 말을 듣은 원두표는 잽싸게 마루 아래서 기어나왔다.

“내가 돈화문을 부수겠소.”

깜짝 놀란 반정군은 그를 죽이려고 들었다. 그러나 거구에 힘까지 장사인 자라 곧 옷을 입히고 그 일을 맡겼다. 시장에 들린 원두표는 도끼 상점에 들려 제일 큰 도끼 두 개를 구했다. 마침내 거사 일, 함성을 지르며 반정군이 궁궐로 향하자 원두표는 앞장 서서 도끼로 돈화문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대문은 끔쩍도 하지않고 도끼 자루만 부러졌다. 원두표는 다시 나머지 도끼로 문을 내리쳤다. 그러자 대문이 꽝하고 열렸다. 뒤따르던 반정군은 성난 파도처럼 궁궐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인조 반정이 성공한 후, 그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이 되었다. 이 때부터 원두표는 ‘원(元)정승'또는 '도끼정승'이라 불리며, 훗날 좌의정까지 올라 국정을 총괄했고, 원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소위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아! 억울하고 원통한 것은 나 소경이다. 원두표, 시장통의 깡패가 일약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것은 순전히 내가 점을 잘 봐준 덕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의 공로와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도대체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점쟁이의 권익과 생존권은 어디서 확보해야 하는가? 여기서 전국에 있는 점쟁이들에게 알린다. 2003년 음력 7월 7일을 맞이해 광화문으로 모이자. 그래서 귀신같이 점을 잘 치고도 사형을 당한 홍계관(洪繼寬)선배를 위해 추모의 촛불시위를 갖자. 우리의 생존권은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함을 명심하자..

장님 홍계관은 귀신처럼 점을 잘 친다고 이름이 알려졌는데, 하루는 자기 스스로 점을 쳐보니, 모년모월모일에 반드시 비명황사할 운명이었다. 곧 죽게 될 운명에서 살아남기를 구하는 점괘를 뽑아풀었더니 임금이 앉아있는 용상(龍床)아래에 숨어 있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임금의 허락을 받은 그는 그날이 되자 용상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그 때 마침 쥐한마리가 난간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임금이 홍계관에게 물었다.

"쥐가 이곳을 지나갔는데 몇 마리인가?"
"세 마리입니다."

임금은 그의 터무니없는 점괘에 화가 났다. 그래서 즉시 형관을 불러 홍계관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당시 사형장은 당고개 남쪽 강변의 백사장이었다. 홍게관은 사형장에 이르러 다시 점괘를 뽑아보며 사형 집행관에게 사정했다.

"한 끼의 음식을 먹을 시간만 준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한편 임금은 홍계관을 압송하게 한 뒤에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쥐의 배속에는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다. 깜짝 놀란 임금은 사형 집행을 급히 정지시킬 것을 명하였다. 중사(中使)가 말을 달려 당고개 위에서 바라보니 사형을 집행하려는 찰나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자, 손을 흔들어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멀리서 그 관경을 본 형관은 형을 빨리 집행하라는 신호로 잘못 알고 그만 목을 베고 말았다. 궁궐로 돌아온 중사는 사실대로 임금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아차 아차"라고만 말하였다. 사람들은 그 이후로 당고개 형장을 아차 고개라고 불렀다.


<사진: 망원정의 마루 아래, 도끼정승 원두표가 몰래 숨어있다가 인조반정에 가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