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랑캐에게 투항했을까
▣ 이덕일 역사평론가
인조반정 다음날인 인조 1년(1623) 3월14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는 외교정책을 극력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어서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광해군 11년·1619)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인조실록> 재위 1년 3월14일)
△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그린 <사진검격도>(맨위)와 조선군의 투항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 강홍립이 광해군의 명을 받아 계획적으로 투항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사진/ 권태균) |
3번 사양했으나 결국 전쟁터로
여기에서 말하는 수신이 바로 강홍립(姜弘立)이다. 강홍립은 후금과 전쟁에 나섰을 때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투항했다는 이유로 수백 년간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당초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을 파견하며 자신이 도원수로 선정되자 강홍립은 거듭 사직했다. 광해군 10년(1618) 6월 강홍립은 “신의 성명도 천거한 명단에 끼어 있다고 하였으므로 혼자 웃으면서 ‘당당한 대국(大國)에 어찌 인재가 부족해 나 같은 사람까지도 장수 선발 대상에 끼어들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습니다”라면서 사양했던 것이다. 그는 “신처럼 걸맞지 않은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며 도원수를 사양했으나 광해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이이첨 같은 대북까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임란 때 원병을 보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강홍립은 의정부 좌참찬이었는데, 광해군이 “비국(備局·비변사)에서도 모두 경을 천거했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비변사에서도 그를 추천했다. 강홍립은 선조 30년(1597)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문관이면서도 선조 39년에는 어전통사(御前通事)를 수행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는데, 이 때문에 도원수로 선발되었을 것이다. 명군과의 의사소통을 그만큼 중시한 것이다. 이렇게 강홍립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정되었다.
당초 조선군은 포수(砲手) 3500, 사수(射手·소총수) 3500, 살수(殺手·창검 사용 보병) 1천 명으로 도합 1만 명 규모였다. 세 번의 사양 상소가 모두 거부되면서 강홍립은 광해군 11년 2월 부원수 김경서와 1만3천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昌城)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은 2월26일 “큰 눈보라 속을 행군하느라 각 영(營)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장계를 보내는데, 여기에서 명군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강홍립이 명군 도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임란에도 참전했던 명나라 총사령관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와 도독 유정 사이의 지휘부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강홍립은 ‘명군 진영에 나가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진단했다. 조선군도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홍립은 이틀 뒤 “창성에서 강을 건너던 날에 군사들은 제각기 10일치 양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지금 거의 다 되어 양식이 떨어질 날이 눈앞에 닥쳤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군량이 떨어진 강홍립은 명의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에게 요청해 겨우 소미(小米) 10포와 마두(馬頭) 2포를 군량이 바닥난 우영(右營)에 나눠주었다. 강홍립은 “화가 눈앞에 닥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호소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광해군일기>는 “박엽(朴燁)과 윤수겸(尹守謙)이 군량길을 끊어서 강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평안감사 박엽과 분호조참판으로 관향사(館餉使·군량공급 책임자)에 임명된 윤수겸이 군량 수송을 제때 안 한 것이었다. 명군과 조선군 모두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안은 채 욱일승천하는 후금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투항은 우발적이었다
함께 종군했던 장수 이민환(李民奐)은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조선군은 3월2일 심하(深河)에서 처음으로 만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승리한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헤매야 했다. 여진족 부락에서 약간의 곡식을 찾아 죽을 끓여 허기를 속인 조선군이 후금의 주력부대와 맞닥뜨린 것은 3월4일이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계획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그 부대가 강홍립과 함께 진군했던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시켰다. 조선군 중 이들과 맞선 것은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가 이끄는 좌영이었다. 조선군은 화포를 쏘아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후금의 철기군의 공격을 당해 패전하고 말았다.
이때 조선군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으나 박엽의 장계에 따르면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다”고 전하는 것처럼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바로 이런 현장 상황 때문에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유리한 쪽에 붙으라’는 밀명을 내렸는가 여부가 논란이 된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장사꾼 호족(胡族·여진족)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하서국(河瑞國·조선 역관)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광해군일기> 11년 4월2일)
광해군이 일개 여진족 장사꾼에게 국가 대사를 비밀리에 통보했다는 이야기로서,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박엽의 장계는 “(조선군이)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라고 후금이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광해군일기>가 본문이 아니라 사관의 평으로 계획적 항복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8일조는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라고 후금에서 하서국을 부르기 전에 먼저 후금과 통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물증이 없는 사관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독자적인 판단을 요구한 사실은 있다. 재위 11년 2월3일 강홍립이 명나라 경략 양호의 요구에 따라 일부 포수를 명나라 진중으로 보내자,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쓰라”고 질책한 것이다.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라는 질책이었다. 게다가 이는 밀령이 아니라 공개된 명령이었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도 투항이 우발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돼 있으면서도 정묘호란에서 조선을 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강홍립의 묘. (사진/ 권태균) |
인조반정 뒤 상황 일변
“거의 몰살당한 좌영의 한 군졸이 달려와 ‘적이 좌영에 와서 거듭 역관을 찾았으나 진영에 역관이 없어서 답하지 못했다’라고 보고하자 강홍립이 역관 황연해(黃連海)를 보냈다. 적이 ‘우리가 명과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고 힐문하자, 황연해가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이 없었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황연해가 두세 차례 왕복한 뒤에 적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책중일록>)
현장의 기록은 일관되게 후금이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라는 말도 강홍립이 아니라 황연해의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연려실기술>은 강홍립이 황연해를 보내면서 그에게 ‘지금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3월4일 밤. 항복과 결사항전을 논의하는 와중에 포위망을 뚫자는 견해도 나왔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춥고 배고픈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함으로써 전력을 보존했고 3월5일 흥경(興京)으로 들어가 후금 국왕 누르하치를 만났다. 강홍립·김경서는 흥경에 억류되었고, 나머지 장수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로써 기나긴 8년 동안의 억류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군량 수송의 임무에는 소홀했던 평안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항복 소식이 들리자 가족을 잡아 가두었다. 조정에서는 강홍립을 역장(逆將)으로 다스리고 가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명나라의 우승은(于承恩)은 강홍립이 계획적으로 항복한 것으로 의심해 조카를 창성(昌城)으로 보내어 강홍립의 가속을 구금하였는지를 탐문했다. 계획적 항복설의 진원지가 명나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족 구금 주장에 대해 광해군은,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11년 4월8일)라고 일갈했다. 억류된 강홍립은 비밀 장계를 써서 종이 노끈 등을 만들어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밀서 덕분에 후금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입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대북이 쫓겨나고 인조와 서인들이 집권하자 상황은 일변한다. 인조 정권에게 강홍립의 동향은 큰 관심거리였다. 그가 광해군의 복위를 주장하며 후금군을 이끌고 남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1년 10월 특진관 박정현(朴鼎賢)이 ‘강홍립과 김경서가 호병(胡兵) 4만을 거느리고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서 나올 것’이라는 소문을 전한 것은 이런 두려움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인조는 “강홍립은 본국을 배반할 것 같지도 않고 얼음이 언 뒤에 나온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인조 4년(1626)에는 이괄과 함께 봉기했다 죽임을 당한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망명해 인조 정권이 강홍립의 노모와 처자를 죽였다고 무고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다시 긴장했으나 다른 일은 없었다. 같은 해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도원수 강홍립은 아직 머리를 깎지 않았기 때문에 달녀(?女·여진족 여성)를 주지 않고 한녀(漢女·명나라 여성)를 아내로 주어 아들을 낳았다”라는 치계를 전했다.
고국에 정착하자마자 병사
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비판하며 후금과 단절하면서 인조 5년(1627)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막게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후금군은 안주와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남하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으나 평산까지 남하했던 후금군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는데, 그 배경에는 강홍립이 있었다. 인조 5년 2월 비변사에서 “강홍립은 적에게 함몰당한 지 10년이 되도록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으며 지금은 또 화친하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니, 종국(宗國)을 잊지 아니한 그의 마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인조실록> 5년 2월1일)라고 말한 것처럼 강홍립은 후금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화의를 맺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정묘호란 때 부원수를 지낸 정충신(鄭忠信)이 ‘그대의 혀끝으로 수만의 후금군이 물러갔으니 조선 백성 가운데 누가 그대의 덕에 감사하지 않겠는가’라는 편지를 보낸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두 나라는 형제의 의를 맺는 화약을 맺었고, 강홍립도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정착하자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강홍립은 그해 7월27일 예순여덟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인조가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물품도 지급하게 했으나 승정원과 대신들의 반대가 잇따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의 신산스런 삶에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여전히 친명 사대주의 명분론이 우세했고, 이는 10년 뒤인 인조 14년(1636)에 정묘호란보다 훨씬 뼈아픈 병자호란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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