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한약의 추억

道雨 2008. 5. 20. 13:16

 

 

 

           한약

                          - 생명을 위안하는 상형문자



병을 지칭하는 한국어의 ‘편찮다’나 영어의 ‘디지즈(disease)'는 다같이 ‘편안하지 않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를 포함하여 편안하게 해주는 행위이다. 몸만을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를 수리하듯이 또는 로봇을 점검하듯이 해서는 진정한 치료라고 할 수 없다.

서양 의학은 과학적인 치료술에 있어서는 앞서 있으나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인간적인 소통에 대해서는 매우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기를 싫어한다. 병으로 아픈 것보다는 치료쪽을 더 두려워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근대문명이 낳은 아이러니의 하나이다. 아이들이 울면 “순사가온다”고 하지않고 이제는 “의사 선생님이 꼬오하러(주사 놓으러) 온다”고 한다. 주사기를 든 의사가 칼이나 총을 든 경찰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로 생각되는 셈이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얼마나 인간적으로 오가는 정이 없는가 하는 것을 실감케 하는 방증이다.

의사의 태도만이 아니다. 위생적인 합리성만으로 구성된 병원의 환경-흰색, 스테인리스제 의료기구, 딱딱한 의자들, 모든 분위기 자체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약 이름을 보아도 그 약을 복용하게 될 환자의 마음 같은 것에는 전연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한방 같으면 그 치료효과야 어떻든 약 이름만 보아도 금세 병이 낳을 것 같은 기분과 적잖은 위로를 받는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서양의 보약이라고 할 수 있는 비타민제까지도 실험실에서 쓰는 화공약품과 다름없이 비타민 A니 B니 C니 하는 알파벳이나 숫자의 부호로 이름지어져 있다. 남녀가 서로 화합된다 하여 쌍화탕이니, 몸을 보한다고 하여 십전대보탕이니 하는 한약 이름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서양 의사에게 이 약을 먹으면 낫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그 경과를 두고 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한의사들은 대개가 다 한 첩이면 떨어진다고 장담을 한다. 전자가 환자를 과학적인 입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데 비해서 후자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인간의 마음과 그 소통에 기본을 두고 있다. 눈을 날카롭게 뜨고 청진기를 들이대는 양의사의 지적 연출과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에 잠긴 듯 진맥을 하는 한의사의 정적 연출 방식의 대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적 소통에 의해 병을 치료하는 한방의 그 궁극적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 약을 달이는 용기와 그 방법일 것이다. 모든 것이 해부도처럼 번쩍이는 스테인리스의 의료기구와 달리 한방의 약탕기는 질박한 뚝배기와 같은 질그릇이다. 약봉지에 씌어진 의사의 붓글씨는 약탕기의 뚜껑이 되어 신비한 부적 같은 디자인 효과를 발휘한다. 뿐만이 아니라 한약은 정성 없이는 달일 수가 없다. 한약은 의사에게서 환자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달이는 어머니나 아내, 가족의 손을 매개로 해서만 주어질 수가 있다.

어느 겨울날 밖에서는 추운 바람이 불고 온통 벌판은 흰색으로 뒤덮일 때 우리는 기침을 하면서 문득 약탕기와 초서로 흘려 쓴 신비한 그 상형문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한약을 달이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과 향그러운 그 감초 냄새를 느낀다. 그것은 김과 함께 아련히 피어오르는 생명과의 화해, 그리고 끝없는 위안의 언어들인 것이다.





* 윗글은 이어령의 ‘우리문화 박물지’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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