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辛未連谷舍岩精舍入門 (신미연곡사암정사입문)

道雨 2008. 8. 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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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

                                                                     -  辛未連谷舍岩精舍入門  -


1991년(신미년) 여름이었다.

내가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본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였는데,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이하였다.

나는 ‘침맥’이라는 학술동아리에 속해 있었는데, 우리 학년은 모두 6명이었다. 당시 우리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모두 함께 금오 선생(김홍경)이 충청도 진천에서 강의하는 ‘사암도인 40일 강좌’를 들으러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회원 중 한 명이 기말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애태우던 차, 다행히 재시, 삼시, 사시를 거쳐, 오시(다섯 번째 시험)에 드디어 통과하여 6명이 모두 함께 강좌를 들으러 갈 수 있었다.


6명 중에 여학생 한 명은 다른 선배 여학생과 함께 먼저 출발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상민이 차를 타고 진천까지 갔다. 상민이(지금은 어엿한 중견의 한의원 원장임)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인지라, 유일하게 차(엘란트라)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장거리 운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때인데도, 겁도 없이 나선 것이 역시 젊음의 특권이었던 것 같다.

장거리 운전에 장맛비도 속절없이 내리는 속을 하루 종일 운전하여,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진천에 도착하였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인데, 말이 진천읍이지 읍내 중심에서 자동차로도 30분 이상, 산 속으로 엄청 많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엄청나게 깊어 보이는, 큰 저수지도 지나가니 그래도 산 속에 이렇게 큰(?) 동네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 싶을 정도의 비교적 큰 마을이 나온다.

마을 전체의 집들이 아마 약 20여 채 쯤 되었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폐가도 여럿 있었고, 학교(분교)도 폐교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강좌를 들을 곳은 바로 그 폐교된 분교였던 것이다.


분교는 강의실로 사용하고, 전국 각지의 한의대에서 온 60여 명의 학생들은 각자 숙식을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강좌의 비용은 무료였지만, 장기간의 숙식비가 제법 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들은 운 좋게도 동네의 입구 쪽에 있으면서, 분교에서도 가깝고, 그 동네의 유일한 가게를 겸하고 있던 집을 찾아 들었다. 그 집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함께 하기로 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민박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일부는 민박이 부족하여 폐가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 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들이닥쳐, 조용한 산 속 마을이 갑자기 활기가 넘치는 마을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도 호기심 반, 즐거움 반으로 우리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해 주셨다.


강좌를 들으러 온 학생들은 모두 60여 명 쯤 되었는데, 당시에 있었던 9개의 한의과대학에서 모두 왔으며, 예과 1학년부터 본과 4학년까지 있었다. 졸업생도 한 명인가 있었던 듯한데 확실치 않다.

경원대학교에서 오신 분(예과 2학년)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당시 36세로서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내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우리 두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20대로서 나이 차이가 많았다.


그동안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곳 진천에서는 처음 하는 강좌인지라, 초기에는 생활 시설에 대한 준비 작업(화장실이 부족하여, 운동장에 화장실을 신축하기도 하였다)을 하는 등,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나날이었다. 운동장에 만든 화장실에 금오 선생은 붓글씨로 큼직하게 ‘解憂所’라고 써 놓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해우소가 화장실을 뜻하는지를 몰랐었고, 그저 금오 선생이 그럴듯하게 이름을 지은 줄로만 착각했었다.


어쨌든 강좌는 진행되었는데, 강의 초반에는 거의 잠을 자는 시간이 없을 정도(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약 두세 시간 정도의 수면 및 휴식시간이 주어진 것 같다)의 강행군이었다. 모든 강의 시작 전에 입정(入定)을 한참 하는데, 허리가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잠이 부족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고단한 것보다도 졸리운 것이 더욱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오선생과 다른 몇 분이 돌아가면서 강의를 하는데(대부분의 강의는 금오 선생이하고, 부분적으로만 다른 분도 보조적인 강의를 했다), 몇 시간 동안을 쉬지 않고 강의를 하니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오 선생 말로는 이런 40일 강좌를 끝내고 나면 몸무게가 10여 kg이나 빠진다고 했다.

그래도 식사는 어차피 해야 되니까,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위해 숙소로 식사하러가는 것이 유일한 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또 이어지는 입정과 강의로 잠 잘 시간은 굉장히 부족하였다.


그런데 정말 젊음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다. 지금 같아선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밤늦게 강의를 마치고 나면, 그 짧은 수면 시간을 쪼개서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술을 마시면서, 한의학과 일상에 대한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가 묵는 숙소가 동네의 유일한 가게였기 때문에, 우리도 가끔 맥주를 사서 마셨지만, 다른 학교의 사람들도 가게로 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니, 우리와 접촉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그리고 우리 학년(본1)이 가장 많아서, 또한 쉽게 자리를 함께 한 듯하다. 폐가에 숙소를 정한 사람들과 함께 폐가에서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술을 사러 우리 숙소에 와서는 우리를 초대한 듯하다)

초기에 매우 타이트하게 진행되던 강의도, 더운 날씨에 강사마저 지치게 되면서는 약간 느슨해지게 되어서, 잠자는 시간에 약간의 여유도 생기니, 그 때부터는 어느 정도 생활에 익숙하게 되어 힘들다는 것도 잊어지게 되었다. 간혹 우리 팀만이 아는 계곡으로 몸을 씻으러 가기도 하였다.  


강좌는 몇 명씩 조를 짜서 과제를 내어 토론하게 하고, 각 조별로 토론하여 정해진 사항을 전체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는 주입식이나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도출해나가는 방식으로서, 당시로서도 꽤 신선하고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자연물의 형상이나 자연 현상에 대해, 관찰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새벽에 일찍 모여서 산을 넘어 백비(글씨를 새기지 않고 비석 형태만 있는 비석)가 있는 곳까지 운동삼아 다녀오기도 하였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 유적지에서 오락을 하는 시간도 가지는 등, 다양한 시간을 보냈다.


비록 40일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한의학 적인 것뿐만 아니라 금오 선생 자신과 자신의 스승(혜암 스님)에 대한 얘기 등, 일상적인 이야기도 포함하고, 동네 분들에 대한 예의범절이나 몸가짐, 동네에 폐해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전인적인 교육을 향한 것이었다는 느낌이었다. 요즘 말하는 시골학교의 대안교육이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사 PD가 와서 강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가기도 하였다. 나중에 무슨 퀴즈 프로그램에서 한방에 대한 상식문제를 묻는 장면으로 방영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도 주어졌다. 몇 가지의 화두를 제시하고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연구하여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화두는 ‘병 속의 새’와 ‘허수아비’가 있다. 병속에서 기르던 새를 병을 깨뜨리지 않고 꺼내는 방법을 묻는 것과,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허수아비의 옷을 바꿔 입는 것을 보고,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이 그에게 "허수아비는 어떡하라고?" 물으니, 이에 대한 대답이 뭐라고 얘기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도 답은 모른다. 나름대로 적어내면 금오선생이 판단을 내려주는데, 정답을 맞힌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한시(漢詩)를 지으라는 과제도 주어졌다. 금오선생이 운을 제시하면서, 며칠간 시간을 줄테니 전원이 다 한시를 지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금오선생이 칠판에 세로로 길게 써 내려간 운(韻)은 다음과 같다.


             

                辛 (신)

                未 (미)

                連 (연)

                谷 (곡)

                舍 (사)

                岩 (암)

                精 (정)

                舍 (사)

                入 (입)

                門 (문)


며칠의 시간은 주어졌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시를 지어본 적도 없는데다가, 한자 실력도 부족하고 한자 자전도 없어서, 한시를 짓는 것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마감 날짜가 임박해서 하나 둘 한시를 지어서 제출하였다. 한시를 못 써서 한글로 10행시를 지어 제출한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도 나름대로는 궁리한 끝에, 내 생애 최초의 한시 작품을 써서 제출하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한시들에 대한 금오선생의 평가는 강좌의 막바지에 이르러 발표되었다.



그럭저럭 강좌와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동네에서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다름이 아니고 학생들이 민박을 하던 어느 집에서 불이 나서 화장실을 태워버렸다. 당시에 화재의 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우리 측에서 화장실을 다시 만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금오선생 측에서 소요 자재의 비용을 대고, 노동력은 우리가 담당하기로 하였으며, 일부 기술적인 문제는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군대 경험도 있었으며,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금오선생은 나를 공사대장으로 지명하여, 내가 화장실 공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우선 기존의 인분을 퍼내는 것이 문제였는데, 퍼 나르는 것이 너무 어렵겠다 하여 인분차를 불러 해결하였고, 목재로 쓸 것들은 산에 가서 소나무를 베어와 기둥과 천장의 재료로 삼고, 슬레이트를 사와 지붕을 올리니, 며칠 만에 그럴싸한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우리 힘으로 건물(비록 화장실이지만)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하고, 자부심도 느껴져서 간략히 상량식 겸 준공식으로 고사도 지냈다.

이런 일 등으로 학습의 시간은 조금 줄었지만, 지겹지 않게 날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금오선생은, 화장실 공사 등으로 수고가 많았고, 날씨도 더워 힘드니 하루 휴가를 주겠다고 한다. 단체로 동해안에 가서 해수욕을 하고 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볼일이 있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하였다. 우리는 집도 멀지만 동해안 해수욕장 구경을 하고 싶어 몇 명 외에는 거의 전부가 다 참석하였다.

금오선생이 관광버스 두 대를 전세내서 강원도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름도 모르는 자그마한 해수욕장에서 꿀맛 같은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돌아올 때는 모두가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타이어 교환을 한다고 한참을 서있었는가 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모두 자느라고 차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나도 잠결에 차가 섰다는 것은 느꼈는데, 차가 밀려서 그러려니 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는데, 나중에 진천에 돌아와 금오선생이 얘기를 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 일로 금오선생은 대단히 화가 나서 우리를 핍박하였다. 차가 펑크가 나서 운전기사가 타이어를 교환하느라 애를 먹고 있는데, 학생들이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나태한 정신자세를 질타하였다.

쉬는 날 낚시를 한 학생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생명을 구하는 의술을 배운다고 하는 사람이, 재미로 생명을 앗는 낚시를 하다니 정신자세가 틀렸다고 비난하였다.

이 말에 영향을 받아, 나는 재미로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낚시나 사냥 등은 가급적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고등어 낚시를 한 번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낚시나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일로 강의도 중지하고 너무나 학생들을 핍박하는 탓에, 학생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강좌를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몇 명씩 떠나다 보니 처음의 60여 명에서 약 4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경원대에서 온 가장 나이가 많은 분도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 일행 6명 중에서도 한 명이, 몸도 좋지 않은데다가 상황도 그러하다 보니 귀향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분위기가 영 어색해진 가운데서도, 남아있는 학생들이 금오선생에게 계속 요청하여, 강좌는 다시 속개되었다.


본시 금오선생의 사암침법 강좌에서는, 40일 강좌가 모두 끝난 다음에 의료봉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금오선생은 갑자기 강좌를 마치기도 전에 의료봉사를 병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이가 가장 많은 탓인지, 군대 경험을 고려한 것이지 모르겠지만, 금오선생은 나에게 봉사대장이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의료봉사 준비하랴, 강좌 수강하랴, 인쇄물 주문하랴, 약 준비하랴, 봉사활동 홍보하랴 등등, 정신없이 보내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강좌도 봉사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2인 1조로 자침하는 실습(한 사람이 침을 놓고 다른 사람은 맞는다, 교대로 실시)도 이어지고, 처방 약에 대한 교육, 각 임무별(안내, 예진, 본진, 자침, 투약 등)로 필요한 교육 등등...

진천에서 오는 큰 도로에서 연곡리로 갈라져 들어오는 길목의 삼거리에는 현수막을 설치하고, 도로에서 보이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안내문을 나누어주고, 무료한방의료봉사에 대한 홍보를 열심히 하였다. 워낙 인구가 적은 곳이라,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집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홍보를 하였다. 


연곡리 분교에서 먼저 의료봉사를 시작하고, 1주일쯤 뒤에 3개 지역 (연곡리, 장호원, 다른 한 곳)에서 나누어 하게 되었다.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진료를 할 때도 나는 계속 연곡리 분교팀에서 진료를 했다.

진료가 끝난 후에는 밤늦게까지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를 하면서 토론을 하였다. 케이스 스터디가 보통 새벽 2시나 3시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것이었다. 동의대(한의대)에서는 그때까지 졸업생이 없어서 의료봉사활동을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한방의료봉사라는 시스템(준비와 시행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금오선생은 이러한 봉사활동의 시스템 외에도, 봉사자들의 언행과 개인위생, 복장, 마음자세 등에 대하여 많은 강조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항들이 훗날 내가 소속된 침맥 동아리의 한방의료봉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연곡리에서는 모두 15일간, 장호원 등 다른 곳에서는 1주일간의 의료봉사를 했다. 세 군데서 의료봉사를 하다 보니, 금오선생으로서는 신경도 쓰이고, 뭔가 비교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잔소리(?)도 심해지고 정신무장에 대해서도 많은 강조를 하였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의료사고나, 이동 중 차량사고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았으리라.


어쨌든 의료봉사는 성공적이었다. 접근하기 힘든 오지에 있는 분교에서 의료봉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홍보한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버스도 몇 번 들어오지 않는, 그 산골짝까지 찾아와서 진료를 받았다. 환자분들의 평도 좋아서 나날이 환자수가 증가하였으며, 이에 비례해 우리들의 수면시간은 더욱 부족해졌다. 정말로 내 인생에서 흔하지 않은 보람있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쉬는 시간에 우리는 민박집 주인아저씨가 논에 농약 치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 우리가 떠나기 전 날, 주인아저씨께서는 은어를 잡아 튀겨주시기도 하였다.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는 이미 끝났고, 의료봉사도 끝내놓고, 우리가 떠나기로 되어있는 날, 아침 10시쯤인가 의료봉사 해산식 겸 40일 강좌 종료식을 한다고 분교로 오라고 했는데, 나는 웬지 마음이 먹먹해져서 가지 않았다. 40여 일간을 연곡리에서 지내면서 여러 사람들과 정이 들었고, 내 생애 처음의 의료봉사활동으로 삶의 존재 가치와 보람을 크게 느꼈었는데, 이런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자리에 가고자하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가지 않았던 것이다.


점심시간에야 분교로 갔다. 동네 분들이 점심을 해주신다고, 점심을 먹지 말고 분교 운동장에 모이라는 전달사항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 가니 한사람이 나에게 작은 죽비 하나와 몇 권의 책을 전해준다. 한시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으로 금오선생님이 주시는 책(상품)이라고 한다. 이미 전에 강좌 중에 내가 써낸 한시가 최우수작이라고 소개가 되었었다. 그런데 상품을 마지막 날 전해주는데 책이 한 권도 아니고 너댓 권이나 되었다. 금오선생 얼굴을 보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받고,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갔다.


책상과 걸상을 두 줄로 길게 늘어놓았는데, 그 위에 한 사람당 한 마리씩, 삼계탕을 만들어 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드시지 않고, 우리들만을 위하여 그렇게 준비하시고 자리를 마련해 두셨던 것이다.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이 흐려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동네 분들의 감사의 인사말이 있었고, 금오선생은 이미 떠나고 없어서, 봉사대장을 했던 내가 또한 감사와 작별인사를 대신하여 드리고, 동네 분들의 정성이 가득한 삼계탕을 먹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헤어지게 되었다. 



* 1991년의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가 끝난 후, 겨울날, 전국 투어 중인 금오선생 일행이 부산에 왔었는데, 그 때도 부산대 앞의 어느 주점에 모여서 옛날 얘기를 나누며, 한시 짓기를 했다.


** 1991년,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강좌’로 최초로 연곡리와 인연을 맺은 이래, 한의대 졸업을 하고, 한의사가 된 이후, 연곡리를 두 번 방문하였다.

연곡 분교는 전시관(?)으로 바뀌었고, 백비(보물 제404호)가 서 있는 주변 터에는 보탑사라는 비구니 절이 들어섰다. 이 보탑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3층의 목탑이 세워져 있는데, 3층까지 계단으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보탑사에 이르기까지 아스팔트로 깨끗이 포장되어 있으며, 중간에 있는 깊고도 큰 저수지 주변으로는 휴양지처럼 조성되어 있다.   


*** 다음의 시는 금오선생이 제시한 운에 맞추어, 내 생애 최초로 지은 한시인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운좋게도 최우수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 韻 : 辛未連谷舍岩精舍入門 (신미연곡사암정사입문)



辛未夏節雨中走   신미년 여름 빗속을 달려가

未知之處鎭川至   미지의 고장 진천에 이르렀네

連谷山中有分校   계곡이 이어진 산골짝에 분교가 있고

谷中谿流皆會湖   계곡의 물들은 모두 호수로 모여드네

舍岩道人明銳智   일찍이 사암도인이 지혜를 밝혀 놓았는데

岩窟內臟數百年   암굴에 감춰진지 수백 년이라

精微奧妙舍岩針   정미롭고 오묘한 사암침법을

舍岩後人金烏講   사암도인의 후인 금오선생이 강의를 하는데

入門醫家數三年   의가에 입문한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門下凡人解得難   평범한 나로서는 해득하기 어렵구나

 

 

 

****  지금 이 글을 쓴 날은 2008년 8월 5일이며, 1991년 여름에 강좌를 들으러 갔으니 17년이 지났다. 부분적으로 내 기억에 오류가 있거나, 앞 뒤가 바뀐 것도 있을지 모른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그 때 함께 강좌를 수강하고 봉사활동을 했던, 지금은 모두 중견의 한의사가 되어있을 강좌 수강 동기생들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안부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한 부분에 큰 획을 긋게 해주신 금오 김홍경 선생님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