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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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임금의 첫 나들이 | |
2002-01-03 오전 10:02:18 |
태조는 임금 자리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황해도 평주(平州)의 온천에 나들이를 합니다. 정신없었을 한 달이 지나고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는 얘기겠지요.
새 나라 새 임금의 첫 거둥이니만큼 사헌부에서는 법도를 지켜 후세에 본보기를 남길 것을 청합니다. 의흥친군위 이외 각 부서의 수행을 금지한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헌부는 차선책으로 대간, 중방(重房), 통례문(通禮門), 사관(史官) 각 1 명씩만이라도 따라가게 하자고 청해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또 중추원 상의 이인수(李仁壽)가 음식 담당으로 따라가게 되자 문하부의 낭사(郞舍)에서는 음식 만드는 재주밖에 없는 그에게 중추원 벼슬을 준 것은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일축해 버렸습니다.
도중에 천신산(天神山) 골짜기에 머물렀는데, 말이 밭 곡식을 망쳐 놓은 것을 보고 중추원 동지사 조기에게 지시해 말 주인에게서 베(布)를 받아 밭 주인에게 주도록 하고는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지금부터 말을 풀어놓아 곡식을 해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자식이나 아우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해 농사는 그리 잘되지 않은 듯합니다. 조금 뒤에 시중 조준은 세금을 적게 거두고 조정 관리를 파견해 점검토록 하자고 청하고 임금은 논이 적고 밭이 많은 강릉도와 양계 지역은 더 감면해 주라고 응수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태조로서야 가뜩이나 작황이 좋지 않은데 첫 나들이부터 곡식이나 망가뜨렸다는 구설에 말리기 싫었겠지요.
임금이 평주 온천에 가 있는 동안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실록에는 밑도끝도 없이 전 대호군 이부(李扶)와 봉상시 소경(少卿) 허해(許晐)를 순군부 옥에 내려 가두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임금이 온천에서 돌아온 뒤 사헌부는 이들이 요망한 말을 했다고 처벌을 청합니다. 그 다음 말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집안에서 여자들과 잡담을 하다가 이성계의 등극이 분수를 넘은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한 모양입니다.
임금은 명나라 황제 역시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얻었으니 그따위 얘기에 신경쓸 필요 없다며 ‘대범하게’ 웃어넘기고 이부는 지방으로 귀양, 허해는 파면토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간관은 정신질환자도 요망한 말을 하면 처벌했다는 중국의 사례를 끌어대며 처벌을 청했고, 태조는 결국 허해까지 귀양보내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첫 나들이에서는 보름 남짓 만에 돌아온 태조는 그 이후에는 수창궁에 자주 나갔다는 기록이 보이고, 유만수, 정희계 등과 함께 격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한편 간관들은 간언을 받아들이고 경연(經筵)을 자주 열라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간언에 대해서는 나라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간하라고 받아들였으나, 경연에 대해서는 그리 흔쾌하지 않았습니다. 무인이라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었을까요? 날마다 경연을 열라는 간관의 청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염과 살쩍이 벌써 허여니, 유생들을 모아 강론을 들을 필요가 없다.”
도승지 안경공이 대답했습니다.
“간관의 뜻은 전하께서 글을 읽도록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해 바른말을 듣게 하려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내가 경연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늘 편전에서 유경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케 하고 있다.”
이즈음 대사성 유경이 ‘대학연의’를 강론했다는 기사가 가끔 나오는데,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라는 사람이 편찬한 이 책은 조선 초기 임금들이 주로 공부한 필수 교재였던 듯합니다.
태조는 본디부터 유학을 존중해, 임금이 되기 전부터 군중에 있을 때라도 창을 던지는 틈을 타 유학자 유경 등을 불러 경전과 역사를 토론했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이때 즐겨 본 책도 ‘대학연의’였다고 하며, 이 책을 읽느라 밤 늦도록 자지 않기도 하고 분연히 세상의 도의를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태조는 간관이 매일 경연을 열라고 거듭 청하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유경과 내사사인(內史舍人) 유관(柳觀)에게 하루씩 교대로 들어와 이 책을 강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건국 초기의 정국을 추슬러가고 있을 무렵, 그를 추대하는 데 대표로 나섰던 좌시중 배극렴이 죽었습니다. 좌시중은 신하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죽은 것은 정국의 향배를 좌우할 수도 있는 큰 일이었을 겁니다.
임금은 곧 우시중이던 조준을 좌시중으로, 시중 바로 아랫자리인 문하부 시랑찬성사 김사형을 우시중으로 승진 발령했습니다. 서열을 그대로 존중해 빈 자리를 차례로 채운 것이죠. 조준에게는 평양의 식읍 1천호를 주었고, 김사형은 정승의 격에 맞추어 백(伯)의 작위를 주었습니다. 조준은 식읍과 함께 경기 도통사 자리도 사양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랑찬성사에는 기존의 정도전 외에 참찬이던 최영지를 새로 올렸습니다.
개국의 첫 수상이었던 배극렴이 몇 달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 그 뒤를 이은 조준은, 태조 시대는 물론 이후의 정종 태종 시대까지 여러 차례 들락거리며 정승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잡지요.
새 나라 새 임금의 첫 거둥이니만큼 사헌부에서는 법도를 지켜 후세에 본보기를 남길 것을 청합니다. 의흥친군위 이외 각 부서의 수행을 금지한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헌부는 차선책으로 대간, 중방(重房), 통례문(通禮門), 사관(史官) 각 1 명씩만이라도 따라가게 하자고 청해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또 중추원 상의 이인수(李仁壽)가 음식 담당으로 따라가게 되자 문하부의 낭사(郞舍)에서는 음식 만드는 재주밖에 없는 그에게 중추원 벼슬을 준 것은 부당하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일축해 버렸습니다.
도중에 천신산(天神山) 골짜기에 머물렀는데, 말이 밭 곡식을 망쳐 놓은 것을 보고 중추원 동지사 조기에게 지시해 말 주인에게서 베(布)를 받아 밭 주인에게 주도록 하고는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지금부터 말을 풀어놓아 곡식을 해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자식이나 아우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해 농사는 그리 잘되지 않은 듯합니다. 조금 뒤에 시중 조준은 세금을 적게 거두고 조정 관리를 파견해 점검토록 하자고 청하고 임금은 논이 적고 밭이 많은 강릉도와 양계 지역은 더 감면해 주라고 응수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태조로서야 가뜩이나 작황이 좋지 않은데 첫 나들이부터 곡식이나 망가뜨렸다는 구설에 말리기 싫었겠지요.
임금이 평주 온천에 가 있는 동안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실록에는 밑도끝도 없이 전 대호군 이부(李扶)와 봉상시 소경(少卿) 허해(許晐)를 순군부 옥에 내려 가두었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임금이 온천에서 돌아온 뒤 사헌부는 이들이 요망한 말을 했다고 처벌을 청합니다. 그 다음 말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집안에서 여자들과 잡담을 하다가 이성계의 등극이 분수를 넘은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한 모양입니다.
임금은 명나라 황제 역시 필부(匹夫)로서 천하를 얻었으니 그따위 얘기에 신경쓸 필요 없다며 ‘대범하게’ 웃어넘기고 이부는 지방으로 귀양, 허해는 파면토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간관은 정신질환자도 요망한 말을 하면 처벌했다는 중국의 사례를 끌어대며 처벌을 청했고, 태조는 결국 허해까지 귀양보내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첫 나들이에서는 보름 남짓 만에 돌아온 태조는 그 이후에는 수창궁에 자주 나갔다는 기록이 보이고, 유만수, 정희계 등과 함께 격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한편 간관들은 간언을 받아들이고 경연(經筵)을 자주 열라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간언에 대해서는 나라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간하라고 받아들였으나, 경연에 대해서는 그리 흔쾌하지 않았습니다. 무인이라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이었을까요? 날마다 경연을 열라는 간관의 청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염과 살쩍이 벌써 허여니, 유생들을 모아 강론을 들을 필요가 없다.”
도승지 안경공이 대답했습니다.
“간관의 뜻은 전하께서 글을 읽도록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해 바른말을 듣게 하려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내가 경연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늘 편전에서 유경으로 하여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케 하고 있다.”
이즈음 대사성 유경이 ‘대학연의’를 강론했다는 기사가 가끔 나오는데,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라는 사람이 편찬한 이 책은 조선 초기 임금들이 주로 공부한 필수 교재였던 듯합니다.
태조는 본디부터 유학을 존중해, 임금이 되기 전부터 군중에 있을 때라도 창을 던지는 틈을 타 유학자 유경 등을 불러 경전과 역사를 토론했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이때 즐겨 본 책도 ‘대학연의’였다고 하며, 이 책을 읽느라 밤 늦도록 자지 않기도 하고 분연히 세상의 도의를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태조는 간관이 매일 경연을 열라고 거듭 청하자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유경과 내사사인(內史舍人) 유관(柳觀)에게 하루씩 교대로 들어와 이 책을 강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건국 초기의 정국을 추슬러가고 있을 무렵, 그를 추대하는 데 대표로 나섰던 좌시중 배극렴이 죽었습니다. 좌시중은 신하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죽은 것은 정국의 향배를 좌우할 수도 있는 큰 일이었을 겁니다.
임금은 곧 우시중이던 조준을 좌시중으로, 시중 바로 아랫자리인 문하부 시랑찬성사 김사형을 우시중으로 승진 발령했습니다. 서열을 그대로 존중해 빈 자리를 차례로 채운 것이죠. 조준에게는 평양의 식읍 1천호를 주었고, 김사형은 정승의 격에 맞추어 백(伯)의 작위를 주었습니다. 조준은 식읍과 함께 경기 도통사 자리도 사양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랑찬성사에는 기존의 정도전 외에 참찬이던 최영지를 새로 올렸습니다.
개국의 첫 수상이었던 배극렴이 몇 달을 채우지 못하고 죽어 그 뒤를 이은 조준은, 태조 시대는 물론 이후의 정종 태종 시대까지 여러 차례 들락거리며 정승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잡지요.
이재황/실록연구가 |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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