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서방님 자랑(흥선대원군)

道雨 2009. 1. 15. 12:03

 

 

 

서방님 자랑(흥선대원군)


흥선 대원군의 연인, 추선의 사랑


저는 19세기 후반에 오로지 흥선 대원군만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여자, 추선(秋善)이라 해요. 전직은 기생입니다.

오늘은 꼭 눈이 올 것만 같이 하늘이 꾸물꾸물하니 뼈 마디가 쑤시네요. 첫 눈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목화 송이처럼 큼직한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바바리 코트를 입고 허리 끈을 질끈 졸라매고는 옷깃을 빳빳이 세운 채 낙엽이 싸인 오솔 길을 산책하고 싶어요.

곁에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분이 있었으면 더욱 좋겠어요. 눈만 오면 강화도의 전등사가 떠오르고 나를 찾아 먼 길을 오셨던 그 분이 생각납니다.

1996년 7월, 제 15대 국회를 개원한 기념으로 ‘전․현직 국회의원소장서화전’이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는데, 그 중에 대원군께서 저의 치마폭에 그려준 난초 그림(음양괴석도) 한 쌍이 출품되었어요.

이 그림은 저의 도움으로 고종이 등극하자,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대감께서 제 속치마에 그려준 그림으로 우리 만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괴석의 위아래에 난을 배치하고 난꽃이 무성하게 핀 그림으로 ‘청한노절(晴寒露節)’이라 화제까지 달았지요.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친히 국정을 총괄하시자, 저의 집을 찾아오시는 것도 뜸해졌어요. 아마도 개혁을 추진하느냐 시간이 없었을 것이고, 저는 외롭기도하고 또 대감의 만수무강을 빌 참으로 강화도 전등사에 머무르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대원이 대감이 찾아 온 겁니다. 그 날은 눈도 수북히 쌓이고 칠흑같이 어두웠는데 등불 앞에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며 임금의 아버지인 대감이 서 계셨던 겁니다.

저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흐르고 목은 잠겨 그대로 그 품으로 빨려들어갔어요.

그 가슴은 언제나 넓고 따뜻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서릿발같은 그 분이지만 나에게만은 언제나 춘풍에 꽃향기처럼 달콤한 그런 곳이었어요.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를 사랑하고 또 그 분이 뜻을 펼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행복은 아닌지요?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파락호 생활을 하던 대감은 언제나 저를 찾아와 울분을 달랬어요.

저는 그 분이 괴석에 난초를 그릴때면 안동 김씨에 대한 복수의 칼날과 사라진 왕권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불같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어요.

그 분은 가슴에 천하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밖으로 내 비친 적은 없어요. 사내 중에 사내지요.

세상에서는 서방님이 밥과 술을 얻어먹고 다니니까 ‘궁도령’이라 놀렸어요.

서방님에겐 4명의 심복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그들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이라 불렀어요.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가 바로 그 분들이여요.

서방님은 그들과 어울려 놀음과 방탕한 생활만 계속 했는데, 그것은 칼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저는 몸과 마음을 다바쳐 그 분의 찢어지고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주었어요.

드디어 때가 온 거여요. 무식한 나뭇꾼 철종이 후사도 없이 죽음에 이루자, 서방님은 익종 임금의 왕비인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자기의 둘째 아들 을 장차 임금에 등극시킬 것을 약속받았어요.

드디어 철종이 승하하자 12살 된 명복이를 임금에 올렸고 그 분이 바로 고종이여요.

서방님은 파락호에서 일약 임금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에 봉해지고, 저는 일개 기생에서 최고 권력자의 애첩이 된거지요.

그 후 서방님은 불같이 개혁을 주도하였고, 저는 천한 몸에 정신을 빼앗기면 안되니까 몸을 강화도로 피신한 겁니다.

여자는 아무리 개성과 자존심으로 포장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가 제일로 행복한 것은 아닌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가장 행복한 여자라 생각해요.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