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미륵사, 639년 백제 왕후가 창건

道雨 2009. 1. 19. 10:02

 

 

 

익산 미륵사, 639년 백제 왕후가 창건

     - 석탑서 금제사리기.사리봉안기 발견

 

'무왕 왕후=선화공주' 설화 '흔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창건 시기와 내력이 설화성 짙은 기록으로만 전하는 전북 익산 미륵사가 설화처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그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설화에서는 무왕과 그 왕비인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善花)가 같이 사찰을 중건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백제 당시 기록에서는 그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돼 주목된다.

나아가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나타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백제 사리장엄구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품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발견이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567년)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 발굴됐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미륵사 석탑 자체는 물론이고 미륵사라는 사찰 창건 내력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적었다.

아직 완전한 판독과 해석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나아가 이 기록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이 구절은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로,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기록했다.

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된 데다 가공수법 또한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이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백제 무왕-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은 전설로만 남나

 

익산 미륵사는 백제 서동왕자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도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목적 등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동안 설화로 전해져온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의 사실 여부를 유추, 해석해볼 수 있는 주요 유물들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11호이자 '백제 문화유산의 진수'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무려 500여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고 19일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지난 14일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하던 중 1층 심주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무왕 재위 기해년(639년)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설'로 널리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백제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확실히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무왕 재위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金製 舍利壺)와 석탑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등 다양한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이중 금제사리호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병 모양의 사리호.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 있었다. X선으로 사리호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번 발굴에서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출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와 설화로 널리 전파돼온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간 사랑'이 단지 '전설'로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향후 명문을 정확히 해석해봐야 하나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돼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백제 왕후를 백제 고관의 딸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이처럼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유물은 매우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무 청장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아울러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견이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익산 미륵사지서 금제사리기 발견

문화재청 19일 발굴성과.현장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동 왕자'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이 창건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西塔)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탑 창건 내력을 밝혀주는 금제(金製) 사리기(舍利器)를 비롯한 중요 유물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18일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19일 오후 발굴현장에서 유물과 함께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륵사지 서탑 해체 발굴조사단인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청 주요 관계자들은 이건무 청장의 함구령에 따라 이와 관련한 모든 취재에 응하지 않고 있다.

백제 사리기는 지난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견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 사리기 이후 두 번째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인 567년에 제작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국보 288호)이 출토됐으나, 이 사리감 안에 있었을 사리기는 없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사리기(舍利器)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담는 그릇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불교에서는 탑(塔)을 부처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까닭에 탑을 만들 때는 거의 예외없이 심초석(心礎石) 주변에 안치하며, 탑을 조성한 내력을 적기 마련이다.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 청동합(靑銅盒) 안에 좀 더 작은 은제(銀製) 사리호(舍利壺)를 넣고, 다시 그 안에다가는 금제(金製) 사리병(舍利甁)을 안치하는 3중 구조로 제작했다.

이번 미륵사지 서탑 금제 사리기 명문은 연구소에서 판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특히 빼어난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하며, 그 정확한 창건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금제 사리기는 이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의문점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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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 유물 발굴 의미

 

'작은 무령왕릉' 백제사 연구 큰 획
석탑, 백제 독자기술로 건립 중요한 자료로 평가
'무왕 아내는 선화공주' 기록과 배치… 논란 여지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이 국보 제11호인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에서 금제 사리기가 봉안돼 있는 심주를 발굴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작은 무령왕릉'에 비견되며 백제 역사 연구에 큰 획을 긋는 발견으로 평가된다. 베일에 싸였던 미륵사 창건 비밀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찬란했던 백제 시대 문화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번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에서는 무왕의 아내를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좌평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서동요' 설화 등 무왕의 아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라는 일부 기록과 배치되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라고 해석된 부분은 판독자에 따라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좀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가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을 했고 그 결과 결혼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내용의 삼국유사 '서동요'에 대한 진위 논란은 예전부터 제기돼왔다. 고려 후기 고승이었던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가 삼국 통일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쓰여진 데다 당시 한반도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백제와 신라의 왕이 사돈관계를 맺는 게 과연 가능했는가란 게 논란의 핵심이다. 이에 따라 이번 발굴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설이 제기됨에 따라 백제 미륵사 석탑이 신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하지만, 금제사리봉안기의 명문 내용은 선화공주와 관련된 내용을 빼고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그간 백제 무왕 재위 시절에 창건된 것으로만 알려진 미륵사는 이번 사리봉안기 발견으로 639년 전후라는 비교적 정확한 창건 시기도 알게 됐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백제 왕후가 기해년(639년)에 미륵사 서측에 위치한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어 중앙에 자리 잡은 목탑 등 미륵사의 창건 시기를 639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백제의 가공수법 또한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도 이번 발굴의 중요한 성과물이다. 특히 금제 사리호는 크기는 비록 작지만 최첨단 금속공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이귀영 미술문화재연구실장은 "매우 섬세하고 세련됐으며 생동감이 있다"며 "국제적 양식을 수용하면서도 백제 나름의 주체적 양식을 가진 뛰어난 유물"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이 사리장엄구를 공개한 19일 익산 미륵사지 발굴 현장에는 수백명의 취재진과 주민이 몰려 국보급 문화재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사리장엄이 일괄 출토된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유물들 역시 국보급 중 단연 최고"라며 "국보급 유물 일괄이 1400년 세월을 넘어 완벽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어려운 시기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라고 감격을 대신했다.

익산=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서동요는 허구” 결론 아직 이르다

 

[서울신문]익산 미륵사 석탑에서 창건 당시의 전말을 담은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가 출토됨에 따라 창건 주체가 백제의 무왕선화공주라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륵사 석탑은 서동설화에 나타난 선화공주가 아닌, 무왕 당시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가 서기 639년 세운 것으로 사리봉안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리봉안기를 처음 해석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말한 대로 "훗날 무왕이 되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결혼 설화는 후대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사리봉안기의 출토로 곧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 두 사람의 미륵사 창건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사리봉안기는 미륵사터 석탑이 완공된 서기 639년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륵사의 건립을 시작한 단계의 상황은 전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륵사가 백제 무왕 시대에 지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대부분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선화공주 대목만을 들어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번져가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다.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미륵사 사리봉안기는 일단 무왕의 부인이 몇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택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미륵사는 3개의 영역이 하나의 사찰을 이루는 삼원(三院) 형식이라는 점에서, 해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서탑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가람만 사택씨 왕후가 짓고 나머지는 다른 왕후가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미륵사에선 이번 발굴 이전에 기축년(629)이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절의 중앙과 동서의 삼원구조는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이번에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를 꼭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백제시대 사리장엄이 발견된 부여 왕흥사도 서기 600년부터 634년까지 창건에 35년이 걸린 것으로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는 만큼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는 최소한 40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따라서 재위기간이 서기 600년에서 641년으로 매우 길었던 무왕 시대에는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 이전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미륵사 창건 당시의 왕비가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사리봉안기의 출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무왕이 40년 이상 재위한 만큼 선화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왕비를 들였을 것이고, 그 새로운 왕비가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사택덕적의 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사찰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발원문에는 왕은 물론 태자의 안녕을 비는 대목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에는 태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근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무왕이 새로 맞이한 왕비가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아들을 낳았어도 태자로 책봉되기는 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미륵사는 한 왕비 집안이 재력을 투입해 지은 사찰이라기보다는 백제의 국가적 역량 총동원하여 조성한 사찰"이라면서 "따라서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창건의 전모를 보여준다기보다는 무왕의 젊은 왕비가 이전의 왕비, 이를테면 선화공주의 흔적을 지워버린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교수는 그동안 알려진 무왕의 장인인 좌평 '사택적덕(沙積德)'은 '사탁적덕'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