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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술국치 100년, 되돌아보는 문화재 수난사의 이면?

道雨 2010. 2. 4. 17:55

 

경술국치 100년, 되돌아보는 문화재 수난사의 이면

 

 

 

 

 

 

 

수리비 약 5만원, 시멘트 세례 속 문화재 수난사

 

그 사이에 뜻하지 않게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해체작업에 이만한 시간이 걸린 것은 이 석탑에 덧대어진 수난의 상처가 그만큼 크고도 깊었던 탓이었다. 치과용 전동드릴까지 동원하여 조심스럽게 떼어낸 콘크리트 잔해물만 무려 백여 톤이 넘는 분량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형편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미륵사 석탑의 존재가 이른바 ‘조선고적조사’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의 조사대상에 처음 노출된 것은 우연찮게도 딱 100년 전의 일이다.

동경제대 건축과 교수인 세키노 타다시 박사가 이끄는 조사단 일행이 속리산 법주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와 화엄사 등지를 거쳐 호남지역 일대를 두루 탐방한 끝에 마지막 행로로 익산 미륵사지에 당도한 것은 식민통치가 막 시작된 1910년 12월 3일이었다.

 

그들이 남긴 ‘조선유적조사약보고서’에는 긴 조사목록과 더불어 긴급수선이 필요한 유물로 미륵사 석탑(서탑)이 지목되었으며, 여기에는 “수리비 약 5만원, 응급수리비 약 2천원”이 든다는 의견도 덧붙여졌다.

이에 따라 1915년 12월에는 실제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응급수리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콘크리트 범벅이 된 미륵사 석탑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고적수리라는 명분으로 시멘트 세례를 받은 경우는 미륵사석탑에만 그치지 않고 석굴암을 비롯하여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유인원기공비 등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그러한 몰골로나마 간신히 보존은 되었을지라도,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 도리어 문화재의 원형과 그 가치를 크게 훼손시킨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던 것이다.


 

 

문화재 수탈의 촉진제 역할을 했던 경술국치


세키노 교수가 처음 우리나라의 고적조사에 착수한 것은 1902년 여름이었고, 이때의 조사결과를 ‘한국건축조사보고’라는 책으로 남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우리나라 전역을 대상으로 조사탐방을 본격적으로 재개한 것은 1909년 가을의 일이었으니, 일제에 의한 문화재 침탈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벌써 가시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황태자가례의 축하사절로 온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가 멀쩡하게 잘 남아 있던 경천사 석탑을 몰래 빼돌려 자기 나라로 가져간 때가 아직은 국권이 엄연히 살아있던 대한제국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형편을 잘 말해준다. 더구나 고분군이 두루 포진했던 개성, 강화, 평양 등지에서 무분별한 도굴행위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일본인 골동상의 손을 거쳐 특히 남한강 유역의 폐사지에 흩어져 있던 석조부도와 같은 중요 유물들이 마구잡이로 서울로 옮겨지거나 일본으로 무단반출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나마 총독부박물관에 수습된 것이 흥법사 진공대사탑, 염거화상탑,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정도일 뿐 나머지는 그 행방을 모르는 것이 부지기수이며, 현물이 발견되었다 할지라도 그 출처조차 알 수 없는 사례들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형편이 이러하다 보니, 경술국치는 확실히 또 다른 문화재수난사의 촉진제가 되었다.


1915년에 경복궁에서 벌어진 조선물산공진회는 그러한 사례의 전형이었다.

이 당시 박람회장의 야외전시유물로 삼겠다는 핑계로 경기도 개성과 이천, 강원도 원주, 충북 충주 그리고 멀리는 경북 경주에서 무수한 석탑과 석불과 철불과 부도와 비석이 잇달아 박물관으로 옮겨지는 수난이 벌어진 바 있었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약사불, 감산사지의 석불상,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 이천 안흥사 오층석탑, 원주 영천사 보제존자사리탑, 충주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 등이 제자리를 벗어나 서울로 옮겨진 것은 모두 이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일제 초기에 실시된 금석문조사사업을 통해 수집된 탁본류와 비편을 비롯하여 1910년 후반기부터 본격 시행된 고적조사사업의 결과로 고분출토품과 취기유물들도 지속적으로 모여들어 박물관의 수장고를 하나씩 채워나갔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의 박물관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느 정도 유물보전의 기능을 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때로는 문화재 반출과 수탈의 주역이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간혹 일본으로 한번 유출되었다가 다시 국내로 반환된 문화재도 전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그러한 사례는 손꼽을 정도이지만, 경천사 십층석탑,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그리고 불국사사리탑이 이 경우에 속했다. 그 사이에 무수하게 불법반출된 문화재의 규모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던 셈인데, 이들 유물이 되돌아온 연유가 더욱 가관이었다. “어차피 조선은 영구히 일본 땅이 된 마당에 구태여 일본으로 옮겨갈 것이 뭐에 있느냐”는 것이고, “그러니까 조선의 것은 조선에 두어도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아마도 100년 전의 그 시절부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문화재수난사의 진면목을 그대로 가늠케 하는 대목이 아닌가도 싶어 씁쓰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풀지 못한 숙제, 문화재 반환


일제강점기가 종결된 지 벌써 6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미륵사지 석탑이나 석굴암과 불국사 다보탑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된 수리작업의 폐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서화류와 같은 동산문화재까지 포함하면 그 전모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해외유출문화재의 반환문제와 같이 아직 풀어야할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수난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문화재수난사의 가해자와 주역이 반드시 식민통치자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몫만은 아니라 때로 우리들 스스로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해방 이후의 문화재관리연혁을 살펴보면, 전란이나 재해를 통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진 소중한 문화재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보물급 이상의 지정문화재만 간추려보더라도, 청평사 극락전, 보림사 대웅전, 관음사 원통전, 진주 촉석루, 안동문묘, 송광사 백설당과 청운당과 같은 것들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소실되거나 파괴되어 사라진 것들로 이미 기억조차 무뎌진 경우들이다. 또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1962년 이후로도 쌍계사 적묵당(보물 제458호, 1968년), 쌍봉사 대웅전(보물 제163호, 1984년), 금산사 대적광전(보물 제476호, 1986년) 등과 같은 사례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산불피해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1997년)가 대파되고 낙산사 동종(보물 제479호, 2005년)이 녹아내린 기억이 생생하고, 이와는 별개로 2008년 정초에 벌어진 방화사건으로 문루가 무너져 내린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몇몇은 다시 복제품이 만들어지거나 건물이 복구된 사례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한번 상실한 문화재의 가치가 그대로 회복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구역이었던 경복궁의 한쪽 뜰에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지난 2005년 박물관의 용산이전 때에 다른 야외전시유물과 함께 옮겨지지 못하고 저렇게 홀로 남겨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실상은 현묘탑의 옥개석과 상륜부 쪽이 온통 시멘트 덩어리로 이뤄져 있어서 함부로 손을 대어 해체 이전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가만히 세어보니 현묘탑이 원위치인 강원도 원주의 법천사지를 벗어난 1911년 이래로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이 최소한 여덟 차례가 넘는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난리통에는 포탄을 맞아 온몸이 크게 파괴된 전력까지 있었으니, 한번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의 고단함이 잦아질 날이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나 산불을 핑계로 들먹이고 몇몇 사람들의 부주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거나 문화재는 반드시 사라지기 이전에 지켜내야 하는 존재라는 명제를 여기서도 실감할 수 있다.

문화재보존의 현실을 제대로 짚어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여 우리들 스스로 되새겨야 할 교훈의 핵심이자 반성의 출발점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선일보/글·사진 |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2010.2.4>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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