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지하궁전 같은 창녕 봉산리 고인돌

道雨 2010. 3. 12. 11:59

 

지하궁전 같은 창녕 봉산리 고인돌

 

 

 

 

 

 

남해안을 중심으로 종래 고인돌 묘에 대한 상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무덤 상부에는 대형 판돌을 얹는 방식은 여타 고인돌묘와 공통되지만, 여러 계단을 지어 땅을 깊숙이 파고 내려가서 무덤 구덩이인 묘광(墓壙)을 만들고 그 안에 돌로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인 석곽(石槨)을 조성한 새로운 형태가 연이어 보고된 것이다.

 

이런 고인돌묘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지하궁전이나 지하벙커를 연상케 한다.
국립김해박물관이 2008년 11~12월에 발굴조사한 창원 봉산리 2호 지석묘(고인돌묘) 또한 이런 방식으로 무덤을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이 고인돌묘는 묘광과 석곽을 만들고자 적갈색 사질 점토층과 풍화암반층인 기반암 대지를 모두 3단으로 파고 내려간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각 단은 좁아졌다.

이 중에서도 가장 먼저 팠을 제1차 계산식 묘광은 규모가 810(장축)×504(단축)×90㎝(깊이)에 달했다. 이렇게 마련한 묘광 안에다가 고인돌묘 축조자들은 다시 구덩이를 팠다. 이 2차 구덩이 또한 규모가 만만치 않아 675×400×140㎝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인돌묘 축조자들은 이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2차 구덩이 안에다가 마지막 3차 구덩이를 파고는 그 한복판에 시신을 안치하는 석곽을 마련했다. 석곽은 크기가 310×100×115㎝였다.

따라서 석곽 바닥까지 깊이는 3m를 넘는 셈이다.
철기가 사용되지 않은 당시로는 더욱 놀라운 점은 그 축조 방식의 치밀함에 있다. 각 구덩이 단계마다 그 위에는 대형 판돌을 여러 장 얹어 지붕으로 삼은 것은 물론, 그 주변으로는 무수한 깬돌이나 강돌을 차곡차곡 쌓았다. 제1단계 구덩이를 메우는 데 사용한 돌만도 840여 점을 헤아렸다.

이 정도라면 소형 피라미드를 지하에 거꾸로 세웠다 할 만하다.
김해박물관(관장 송의정)이 한국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 고인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테마전을 '고인돌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이라는 주제로 1층 상설전시실에서 최근 마련해 선보이기 시작했다.

오는 8월1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테마전에서는 고인돌이 무엇이며(what), 언제(when), 어디서(where), 어떻게(how), 누가(who), 왜(why) 만들었는지를 창원 봉산리 2호 고인돌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보여주게 된다.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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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면 유리 고인돌

 

 

 

지석묘는 고인돌 또는 돌멘(Dolmen)이라고 하여 큰 판석을 탁자형으로 고인 것인데 창녕지역의 것은 남방식이다.


 거대한 돌덩이를 놓고 그 아래 지하에 석곽이나 석관이 축조되어 있는 중묘제로 거석을 움직여서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큰 힘과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당시의 매장유적으로 그 사회를 상징하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창녕지방은 청동기시대부터 농업이 정착되고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지석묘를 축조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이미 인간의 문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다른 지방보다 앞서서 부족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마면 유리 고인돌은 웅장한 모습을 한 고인돌이 북두칠성 형태로 7개나 있었다고 하며 거대한 남방식 지석묘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창녕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       

    
 칠성바위(장마면 유리 고인돌) : 장마면 유리 산 9번지에 지방 기념물 2호인 장마 유리 지석묘는 거석 기념물로서는 손색이 없는 위용을 갖춘 전형적인 바둑판식으로 그 모습이 매우 웅대하며 뛰어나 전국에서 유명하다. 장마면. 유리 서북쪽 낮은 구릉위에 우뚝 서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기 뿐이다. 원래 7기의 지석이 있었으나 일제치하인 1912년 영산 박진간 도로개설 사업때 일본인이 6기를 파괴하여 석재로써 공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하나만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은 7개의 바위가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되어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한다. (내고장전통가꾸기).


 만옥정 고인돌(창녕읍) : 창녕읍 만옥정 공원내에 3기가 있다. 창녕읍 만옥정 진흥왕척경비 서쪽 아래에 남방식 지석묘 수기가 있는데 1기는 그 형태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2기는 땅에 묻혀져 상반신만 보인다. 1965년 여름에 경희대학교 학술조사단 (단장 엄영식박사)에 의해서 발굴조사되었다.


 교동 지석묘(창녕읍) : 창녕읍 교동 고분군이 있는 구릉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소요의 파편 등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지대에 지금 인가(人家)는 없으나 그 옛날에 인가가 있었다는 자취가 완연한 것으로 보아 옛날 창녕의 중심부가 이 지대로 추측된다. 원주민이 낙동간을 따라 올라와 우포와 목포등의 소택지를 따라 이 일대의 구릉에 정착한 것같이 보인다.


 송현동 지석묘(창녕읍) : 무문토기가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오랜 주거지였음을 증명해 준다.
 기미(槐山) 고인돌(고암면 억만리 청학동) : 괴산에는 돌무지(고인돌)가 4기가 있어 이 돌을 석괴산, 부처바위라 불리며, 논 가운데 있는 돌에는 손을 데면 탈이 난다는 금기사항이 전해지고 있어 잘 보존되고 있다.


 대견 지석묘(성산면 대견리) : 대견리에서 돌칼이 발견되었음은 남방식 지석묘의 표식적 유물이라 할 수 있어 지석묘가 그곳에서도 있었던 듯하다.


 어름골 지석묘(계성면 사리) : 계성면 사리마을 구봉산에 수기가 있고 그 북쪽 일매암 골짜기에도 수기가 있었는데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중턱은 과수원으로 개간되었다.


 뒷들 고인돌(계성면 봉산리) : 고인돌이 있는 들이므로 금바우들, 금암들(金岩坪)이라고 한다. 고인돌이 들 중앙 작은 동산에 2기가 있다.

 

신계리 고인돌(영산면 신계리) : 6기가 있었던 것을 경지정리 공사때 파괴되고 2기만이 남아 있다.
 죽사리 고인돌(영산면 죽사리) : 영산면 죽사리 마구선 국도변의 경작지와 분묘군에 7-8기 산재 분포하고 있다고 조사되었으나 경지정리로 인하여 현재 1기 뿐이다. 모두 무지석식 지석묘로서 개석은 2-3m의 크기를 갖고 있으며 상면 1부에는 구멍이 있는 것도 있다고 전한다.


 남지 고인돌(남지읍 마산리) : 남지읍 마산리 고인돌에서도 석기류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솔밭바우 고인돌(부곡면 부곡리) : 가매실 부곡중학교 앞들 도로 좌우에 3기의 고인돌을 ‘솔밭바우’라 부른다. 3기의 바우는 부곡중학교 앞들과 도로 남쪽(가적자아래)들, 부곡농협 동쪽(옛 약국뒤) 등 3기가 있었는데 그 중 도로 남쪽(나분들)의 것은 1989년 경지정리시 파기 매몰하여 버렸다 하며 현재 2기만 남아있다. (창녕군지명사).


 장군수 고인돌(부곡면 청암리) : 인접의 청암리 520번지에서 깊이 4자 가량의 석함이 발견되었다. 이 석함의 길이가 6.5자, 넓이 1.8자, 높이 1.5자 정도의 사각형으로 그 안에는 석도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나온 석도는 현재 소재를 모르고 있다. 아마 서울 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창녕여고 역사교사 홍동식씨는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였다.


 그밖에 어도 진다리일대에 3기가 있고 만옥정 공원에 2기 만옥정 우회도로의 말흘리에 3기 그 나머지 대부분은 목마산 아래 자락과 하곤양 저택 사이의 논들에 집중적으로 250기-300여기가 있는데 아직 더 있을 것으로 현재 조사중이라 하였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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