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두번이나 땅속에서 나온 사면석불

道雨 2010. 3. 31. 16:24

 

두번씩이나 땅속에서 나온 사면석불-굴불사지 사면석불

 

 

 

신라 사람들은 돌에 불상을 새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돌 속에는 불상이 들어 있을 뿐, 석공은 단지 불상 주변의 필요없는 돌조각을 떼어낼 뿐이라고...

그런데 돌조각을 떼어낸 것도 아닌, 땅 속에 완제품으로(?) 만들어진 불상을 단지 꺼내기만 했을 뿐이라는 불상이 전해져 온다

바로 굴불사지 사면석불이다

 

 

 

 1915년대의 굴불사지 사면석불

 

 

경주시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석불상으로 이곳은 굴불사라는 절터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에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게 했더니 4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와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掘佛 : 부처를 파냈다는 뜻)이라 절 이름을 칭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의해 사면석불 조성연대의 하한을 경덕왕대로 추측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 일제에 의해서이다.

 

 굴불사지에 대한 최근 발굴조사는 1985년 8월3일에 착수하여 10월29일에 완료함으로써 3개월이 소요되었다.

발굴결과 서면에 있는 삼존불의 연화대좌, 동쪽면 약사여래의 무릅이하 부분이 확인되어 불상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고 사면석불을 중심으로 조영되었던 정면 1칸, 측면 3칸의 법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와도 수습됨으로써 이 건물은 조선중엽에 이르기까지 목조기와를 한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층위에서는 '동사(東寺)' 라고 새겨진 명문와편을 비롯하여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결과 굴불사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때 창건되어 신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존속한 것으로 보여지며, 고려시대에는 한때 사명이 동사로 불리워 졌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 명종대에(1183) 한 차례의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때에 사찰명은 굴석사(출토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에는 굴석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로 불리워지고 있었으며 굴석사의 이름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시기인 1280년대까지 계속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절의 폐사는 몽고의 침략으로 1238년이 아니면 1250년대에 당시 사용하던 중요 불구를 땅에 매장하고 승려들은 사찰을 떠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몽고병란이 끝났으나 사찰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숙종때인 1681년에 다시 불사가 이루어진 후 100년가량 법등이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폐사가 되었고, 사면불은 자연적으로 매몰되고 겨우 머리부분만 노출되어 있는 것을 1900년대 일본인들이 발굴한 결과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350cm이다.

 

사방불(四方佛)

 

바위의 사면에 부처를 새긴 것이 사방불(四方佛)이다. 이것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었다. 원래 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사방불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대체로 서방에 아미타불과 동방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다.

 

또한 불교경전이나 불비상(佛碑像)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한데, 굴불사 사방불의 구성은 어느 한 경전에 의거했다기보다는 당시 신라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불상들을 각 면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신라 초기의 유물 중에서 최고의 거작(巨作)이다
 

 

  서쪽면(西面)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상주하시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모셨는데

본존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며 네개의 면 중에서  가장 크다.

 

서면

 

굴불사지 사방불의 서쪽 면에는 미타삼존(彌陀三尊)을 새겼다. 본존(本尊)인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부처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기준으로, 양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다른 돌로 두리새김하여

세웠다. 높이가 3.51m인 아미타여래는 바위면에 새긴 것이고, 좌우협시보살상은 다른 돌로 원각(圓角)하여 시립(侍立)하도록 하였다.

아미타여래는 극락세계 부처님으로 우리 인간 세상에서 48가지 좋은 점만 따서 서쪽에 극락세계를 이룩해놓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름만 불러도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데려가 편하고 즐겁게 해준다는 부처님이다.

아미타여래의 왼편에 서 계신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보살피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머리에 쓴 삼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이를 식별한다. 오른 편에 서 계신 대세지보살로은 아미타여래의 지혜를 받들어 세상을 보살피는 보살로, 보관 앞면에 지혜의 정병을 나타내었다. '지혜로운 사랑'을 베푸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서면 아미타삼존불 본존불

 몸체는 원바위면에 크게 돋을새김으로 하고 머리 부분은 따로 만들어서

몸체 위에 올려 놓은 형태로 높이가 3.9m에 이른다.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오른손은 떨어져 나간 상태이고 왼손은 살며시 구부려 배 위에 올려 놓은 모습이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인데 얼굴보다 크고 목에는 삼도가 명확하며, 몸의 굴곡도 뚜렷하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얇게 밀착되었으며, 하체의 V형의 의문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군의의 아랫도리를 발목에 꼭 끼운 것이 특이하다.

대좌는 잔원통인데, 항면에는 발을 올려놓고 있으며 앞몉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나 땅에 묻혀있다


 

 서면 아미타삼존불 관세음보살

높이 1.95m로 대세지보살보다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풍만하고 후덕한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다리 부분을 보면 왼발과 오른발의 표현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한쪽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는 삼곡자세(三曲姿勢)를 취하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신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방식이다

 

 

 

 서면 아미타삼존불 대세지보살

아미타삼존불의 두 협시보살은 따로 조성하여 본존불 옆에 세워 놓은 모습으로

 머리와 상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있고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북면과 동면이 함께 보인다

 

 

북면

북면에는 좌우로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려 보관(寶冠)을 쓴 부각보살입상(菩薩立像)과,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의 입상이 새겨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 인간의 11가지 걱정거리를 없애고, 11가지 기쁨을 선사한다는 보살이다. 또한 팔(譬;비)이 여섯이나 되는데, 이것은 인간을 구제하는데 많은 팔이 있어야 된다는 표시다. 이는 관음상의 변화도나 형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주술적(呪術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크게 틀어올린 머리에 보관을 쓴 북면보살입상

북면 보살입상은 돋을새김으로 새겼으나 허리 아래부분은 명확하게 표현을 하지 않고 있어

 신체의 굴곡만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에 비해 발은 바위 면을 수평으로 깍아 그 위에 비교적 뚜렷하게 표현해 놓았다

형태상의 특징은 없으나 보살 중 오랫동안 신앙되어 장차 부처가 될 미륵보살이 아닌가 추측된다.

 

  북면 선각 십일면육비(11개의 얼굴과 여섯개의 팔) 관음보살입상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희미한 선각으로 표현된 11면의 얼굴과 6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인데 마애불(바위에 조각돤 불상)로서 십일면육비인 것은 특이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다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관음상의 변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약간의 주술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이렇게 사면석불에 십일면 육비의 관음보살상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신앙된 불상 가운데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섞여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동면 약사여래상

사방불 신앙에서 동쪽을 상징하는 약사여래가 큰 바위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크고 높은 육계를 가진 머리에 상체에는 희미하게 법의가 표현되어 있고

결가부좌한 상태로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파손된 상태이다.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모습이 종교적 긴장감이 충만한 상태였으며,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다.

가슴과 무릎에 몇가닥의 형식적 의문이 표현되었으며, 광배는 두가닥의 두광, 신광이며

외연에는 화려한 화염문이 음각되어 있고,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어 동방약사임을 알 수 있다


동면

동쪽 면의 약사여래(藥師如來)는 2.06m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있다. 약사여래의 결가부좌한 모습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약사여래는 유리처럼 맑고 깨꿋한 동쪽에 12가지 소원을 모아 유리광세계(琉璃光世界)를 이룩하셨다.

때문에 병을 치유하는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약사여래는 대체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 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남면 보살입상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두 보살은 둥근 연꽃대좌 위에 서있으며, 배모양의 신광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다양한 문양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남면

남쪽에 현재 남아 있는 두 보살상과 불상은 몸체의 굴곡 표현이나 옷 주름 등을 볼 때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러나 많이 파손되어 의제(衣制)로 미루어 여래상으로 본다. 이들은 모두 높은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었다. 불상의 광배는 1.6m가량 되는 주형신광(舟形身光)과 두광(頭光)으로 구분된다.

 

남면 암석 서단(西端)에 한상을 완전히 떼어낸 자국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보살상으로 이 면에 원래 삼존상을 이룬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 굴불사에도 일본인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약탈한 우리의 문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면의 본존불의 머리와 오른쪽 협시보살이 통째로 사라졌다

 

 

<한국문화재 비화/ 김구열저1973년 >의 내용을 인용하여 보면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의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악당이 있었다. 곧 "완전 무법과 약탈의 시대" 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의 하나였다.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본인 학자나 관계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체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의심한 전문가가 없었다.

 

1960년께였다.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 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 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예리한 눈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간송이었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큰 바윗덩이의 암면 부조의 하나인 남쪽면의 오른쪽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기술적으로 쪼아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그 보살상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던 천의 자락이 얇고 섬세한 부분까지는 도저히 떼어갈 수 없었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 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 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 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판명되었다.

 

1969년에 문공부와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문화재대관) (보물편) 중편의 '굴불사터 석불상' (사면석불) 도판해설은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제 때에 오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본존상의 머리까지 떼어 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떼어져 간 비운의 '사면석불' 남면의 석가상 불두와 그 옆의 보살상은 지금 일본의 어느곳에 가 있을까.

 

  

 

 굴불사 주위에는 당시 건물터에 쓰여졌을 석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불자님은 어떤 간절한 소원을 빌었을까?

사방불을 모두 돌며 향을 올리고 합장을 하고 있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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