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디케’가 울고 있다

道雨 2010. 4. 2. 12:41

* 아래의 글은 한겨레신문(2010. 4. 2)에서 옮겨왔습니다.

 

 

              ‘디케’가 울고 있다

 

눈을 가린 채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의 형상은 고대 그리스의 여신 ‘디케’에서 연원한다.

 

디케는 이후 로마시대에 ‘유스티치아’로 바뀌고, 이것이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가 된다.

서양의 법 관련 기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대법원, 사법연수원, 대한변협 건물에도 디케의 상을 세워 놓았다.

 

그렇다면 디케로 의인화된 가치는 무엇일까?

 

 

먼저 디케와 구별해야 할 두 여신이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적이나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용서없는 복수를 의인화한 것으로, 로마시대에는 장군이나 검투사의 수호여신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손에는 저울이 들려 있지 않으며, 검과 채찍이 들려 있을 뿐이다. 그에게 권력과 실정법에 대한 성찰, 사용되는 수단과 방법의 ‘비례성’ 등은 애초에 결여되어 있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집권세력은 네메시스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의 눈에 반대파나 일탈자는 대화와 소통의 파트너가 아니라, ‘조인트’를 까서 ‘대청소’해야 할 대상, ‘척결’하고 ‘적출’해야 할 암적 존재일 뿐이다.

 

다음으로 디케는 자신의 생모인 신법(神法) 또는 자연법의 여신 ‘테미스’와 구별된다. 지상의 법과 질서를 뛰어넘는 그의 혜안과 예지력은 매우 소중하며, 이는 지상의 법과 질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테미스는 자신의 판단을 세상에 강요하지 않는바, 그는 디케가 들고 있는 칼도 저울도 들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친정부 성향의 특정 종교인들은 ‘준정치인’ 행세를 하며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임하려 하고 있고, 게다가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으며 자신의 교리를 국가와 사회 속에 강제주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다면 디케의 형상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첫째, 디케의 상 중 다수는 눈이 가려진 모습이다.

이는 법과 정의를 실현할 때 사건 관련자의 계급, 지위, 신분, 개인적 연고 등과 거리를 두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함을 말한다. 특히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눈치를 보는 법이란 그 자체로 부정의를 잉태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디케는 저울을 들고 있다.

심판을 내리기 전에 특정 사안에서 상반되는 두 개의 입장을 충실히 듣고 엄밀히 형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저울은 불법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상쇄하는 사정은 없는지 살필 것을, 그리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제재하더라도 과도한 수단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디케는 ‘양날의 검’을 들고 있다.

이는 형벌권을 남용하는 자는 언젠가는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에 다치게 될 것임을, 시민이 모든 문제를 형벌권을 동원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에 동조한다면 이는 시민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됨을 상징한다.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잡은 군부가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뒤 내세운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비통한 역설이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십년”을 회복하겠다고 선전하며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금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무리한 형사처벌을 시도하고, 게다가 사형집행 재개, 보호감호 부활까지 추진하는 것을 보니, 정치적 민주주의의 수준을 십년 전이 아니라 ‘제5공화국’ 시절로 돌리려는 것이 아닌지 염려될 지경이다.


디케의 눈가리개가 풀리고, 저울의 추는 편중되고, 검의 한쪽 날만 번득거릴 때, 디케는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정의와 형평을 추구하는 여신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함을 명심해야 한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