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정책선거 가로막는 선관위

道雨 2010. 5. 3. 11:13

 

 

 

           정책선거 가로막는 선관위

 

1970년대 가톨릭 국가 이탈리아이혼과 낙태의 합법화 여부를 둘러싸고 엄청난 몸살을 앓았다. 1974~1981년 사이 치러졌던 총선거지방선거, 국민투표에서 교회, 정당, 시민단체들은 이를 놓고 치열한 논쟁과 대결을 벌였다. 강론과 설교, 성명과 시위가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한 미국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낙태를 반대하는 보수 시민단체는 이를 선거쟁점으로 부각시키려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진보 시민단체와 여성운동 단체도 대응 운동을 벌인다. 수많은 배지가 제작·배포되고 거리엔 낙태를 지지 혹은 반대하는 스티커를 붙인 차들로 넘친다.

 

1976년 총선에서 스웨덴 환경운동단체들이 전개했던 핵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은 핵발전소 건설을 적극 추진하던 사회민주당 정부에 치명타를 안겼다. 사회민주당은 무려 45년 동안 유지해 왔던 정권을 보수 연립정부에 넘겨줘야 했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1차 선거에서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후보가 리오넬 조스팽 사회당 후보를 누르고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충격적 결과가 나왔다. 르펜과 시라크가 맞붙게 된 결선투표에서 르펜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격렬한 거리시위가 파리 시가지를 뒤덮었다.

 

위에 제시한 어떤 사례도 선거의 공정성을 해쳤다는 시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4대강 사업과 무상급식 등 선거쟁점에 대한 찬반활동을 금지하고 나선 우리나라 선관위의 행위가 얼마나 후진적이며 비민주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정부의 정책이나 시민들의 요구는 그것이 국민의 삶에 영향을 주는 크기에 비례해서 쟁점화한다. 이 쟁점에 대한 시시비비를 억누르고 치르는 선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심판과 평가를 억제한 가운데 치르는 선거가 얼마나 민주적일 수 있는가.

 

정책선거와 투표참여를 독려해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정책선거를 위축시키고 선거 무관심 확산을 획책하고 있다. 세종시 논란도,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따지는 일도,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모행사도 선거 공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돼야 할 판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인민의 지배는 다수의 지배로 환원된다. 이명박 정부 역시 다수결의 원칙에 입각해 수립됐다.

민주국가에서 다수의 지배가 민주적 정당성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소수의 반대 권리가 적극 보장돼야 한다. 권력을 쥔 세력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출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또 반대세력을 조직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민주국가이다.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이유이다.

선관위 내부에 있는 수많은 율사와 정치학자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어쩌면 이들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 부당한 압력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신교 성전들이 즐비한 서울 강남의 한 귀퉁이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어느 스님은 빨갱이로 몰려 절에서 내쫓기게 생겼다.

생명과 자연의 고귀함을 내세우고 4대강 개발 반대 의견을 표명한 천주교 사제들은 이상한 두뇌 구조를 가진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다.

법원은 여당에 의해 조폭집단으로 매도되고 법원의 판결은 휴짓조각이 됐다.

급기야 공명선거를 관장해야 할 책임을 진 정부기관이 관권선거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민주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과연 누가 훼손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국격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놓고 있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