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리비아의 민주주의와 석유

道雨 2011. 2. 28. 16:14

 

 

 

        리비아의 민주주의와 석유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오늘은 2월28일이다. 엄청나게 큰 사건도 그 시작은 미미한 경우가 많다.

1960년 2월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집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다. 당국은 중고등학생들의 집회 참석을 막아보려고 일요일인데도 등교하라는 얄팍한 꾀를 냈는데, 이것이 오히려 대규모 학생시위를 촉발시켰다. 2·28 학생시위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1947년 2월28일 타이베이에서 담배 암매로 근근이 살아가던 과부가 단속반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사건이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평소 장제스의 국민당에 불만이 쌓여 있던 대만 원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중국 본토에 있던 장제스는 군대를 보내 강경진압에 나섰고, 1만명(혹은 2만명이란 설도 있음) 이상의 시민이 죽거나 실종됐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비정성시’는 198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바야흐로 아랍이 민주혁명의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그 발단은 한국, 대만의 2·28과 비슷하다.

튀니지의 한 지방도시에서 청과물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경찰의 무차별 단속에 항의해 분신자살한 사건이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독재자 벤 알리를 축출했다.

민주화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를 집어삼켰다.

민주화의 불꽃은 이제 리비아에 옮겨붙었다.

카다피가 1969년 이래 41년간 철벽통치체제를 구축해온 리비아는 악성의 독재국가다. 프리덤 하우스에서 매년 발표하는 정치적 자유 및 인권 지표에서 리비아는 최하인 7점을 받아서 이란, 시리아, 이집트보다 더 나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수도 트리폴리를 제외한 리비아 전체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와 군대 장악력에 차이가 있어 낙관은 금물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군부는 시위에 대한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중립을 지킴으로써 급속한 정권 붕괴에 일조했으나 리비아의 군대는 카다피의 세 아들이 사령관으로 있고, 다른 나라에서 온 용병도 많아 정치적 중립을 기대할 수 없고 최악의 유혈사태가 우려된다.

 

과거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카다피를 ‘미친 개’라 불렀고, 1986년에는 카다피를 노려서 수도 트리폴리를 폭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카다피는 종래의 호전적 태도를 버리고 서구에 유화적 태도를 취해왔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영국의 블레어, 러시아의 푸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왔는데, 모두 리비아의 석유에 눈이 멀어 잘못 내린 판단이다.

 

최근 이탈리아의 사업가 마르코 트론체티 프로베라는 리비아투자청의 고문역을 사퇴했고, 런던경제대학은 카다피 국제자선개발기금에서 150만파운드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항의에 굴복해서 이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한때는 석유 때문에 리비아에 접근했던 나라들이 세상이 바뀌어 비난을 받고 있으니 국익을 좇는 외교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야겠다.

 

< 경북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