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비운의 노래 ‘한잔의 추억’

道雨 2011. 8. 24. 13:09

 

 

 

          비운의 노래 ‘한잔의 추억’ 

 

36년 만에 ‘음주 조장’이란 똑같은 이유로 19금 판정을 받았으니 이 노래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

 

 

» 김종구 논설위원
지난 6월27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매우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렸다.

폭력성 짙은 비디오게임을 미성년자들에게 판매·대여하는 것을 금지한 캘리포니아주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었다.

다수 의견을 대표해 판결문을 쓴 앤터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펼친 논지 중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들어 있다.

 

그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읽히는 동화책이나 청소년 권장도서 중에도 잔인한 묘사가 들어 있는 책들이 많다”고 논박했다.

마녀를 화덕에 넣어 태워 죽이는 <헨젤과 그레텔>, 나쁜 왕비에게 빨갛게 달군 쇠구두를 신겨 죽을 때까지 춤추게 한 <백설공주>,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의 눈을 달궈진 부지깽이로 지져버리는 <오디세이> 등도 폭력성으로 따지면 오십보백보라는 이야기다.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요즘 논란을 빚고 있는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위원회의 마구잡이 대중가요 ‘19금 판정’과 견주어 음미할 대목이 많다.

누리꾼들은 맹광호(68) 청소년보호위원장을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니 ‘구닥다리 할배’니 하며 비꼬지만, 나이를 따져보면 스칼리아 대법관은 맹 위원장보다 7살이나 많은 75살에 자식이 9명, 손주도 32명이나 된다. 문제는 정부의 청소년 보호 방식과 한계 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지, 나이 많음이나 어버이로서의 책무 따위와는 상관없는 일임을 보여준다.

 

술·담배 등의 단어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 여성가족부의 시각에서 보면, 청소년 권장도서 등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국어 교과서와 참고서부터 뜯어고쳐야 할 형편이다.

 

“한잔 먹세 그여, 또 한잔 먹세 그여.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 그여”로 시작되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제목과 가사에서 온통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의 시 구절은 붉게 타들어가는 석양을 배경 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싶은 흥취를 자극한다.

여성가족부는 한시바삐 교육부와 협의해 이런 문학작품들을 학생들이 접하지 못하도록 해야 마땅하다.

 

 

여성가족부가 19금 조처에 앞서 특정 노래와 청소년 음주욕구 증가의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과학적 조사나 한번 해보았는지도 의문이다.

폭력적 내용이 담긴 비디오게임의 악영향을 놓고 그동안 미국에서는 수많은 연구가 진행됐지만 의견이 팽팽히 엇갈린다.

오하이오주립대학과 텍사스 에이앤엠(A&M) 인터내셔널 대학 연구팀이 대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쪽은 폭력성 짙은 비디오를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은 비디오를 보여준 뒤 반응을 체크하는 동일한 방식의 연구를 각각 실시해 똑같은 결과를 얻었으나 해석은 정반대로 할 정도로 이 문제는 정답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여성가족부는 최소한도의 실증적 연구도 없이 그냥 어림짐작으로 19금 딱지를 남발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마구잡이 19금 판정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가요 정화 운동’ ‘건전가요 운동’의 유구한 전통과 맥락이 닿아 있다.

불건전한 정권일수록 건전한 대중문화를 외치는 것이나, 시대착오적인 통제로 사회를 숨막히게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수 이장희씨는 지난해 12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1975년에 자신의 히트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인 사연을 들려주면서 “<한잔의 추억>은 가사에 ‘마시자’는 내용이 있어 술을 권한다고 그러더라”고 말해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결코 과거지사로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36년 전과 똑같은 이유로 다시 19금 딱지가 붙었으니 이 노래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

 

이씨가 다시 텔레비전에 나와 “2011년에 <한잔의 추억>이 청소년들의 음주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19금 판정을 받았다니까요”라고 말해 좌중을 배꼽 쥐게 하려면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가.

 

< 김종구, 한겨레 논설위원  kj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