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재판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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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초 보고’ 첫 증언…구조하러 가는 중 연락받아
“최초 설치된 부표 위치도 오후에 위치 바뀌었다”
천안함 침몰 당시 구조에 나섰던 해경이 최초상황에 대해 “좌초라고 연락을 받았다”는 첫 증언이 나왔다고 <미디어오늘>이 23일 보도했다.
당시 천안함 승조원 구조작업을 벌인 해경 501함정의 부함장이었던 유종철 해경 경위는 22일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전 민군합조단 민간위원)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유상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 나와 이렇게 밝혔다. 신 대표는 천안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유 전 부함장은 이 자리에서 해경의 천안함 사고보고서에 최초상황이 ‘좌초’로 기재된 것에 대해 “알고 있다”며 ‘좌초됐으니 가서 구조하라고 한 것이냐’는 신문에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는 “(그 보고서는) 상황실이 처음 작성했는데, (해군) 2함대에서부터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하러 갈 때도 좌초라는 상황 전달이 있었는지에 대해 유 전 부함장은 “전문으로 (좌초라는 말이) 왔다”며 “구조하러 가는 중에 ‘좌초’라고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해경 상황보고서에 ‘좌초’라는 언급이 있었음은 알려져 있었지만, 구조를 위해 출동중이던 지휘관이 사고 당시 이를 전달받은 사실을 증언한 것은 처음이다.
‘좌초’의 의미에 대해 유 전 부함장은 단순히 배의 침몰 상태 또는 모든 침몰 사고일 경우가 아니라 “암초에 걸린 해난사고일 때 좌초라는 말을 쓴다”고 밝혔다. ‘해군이 좌초 용어를 어떻게 쓰는지 아느냐’는 검찰측 신문에 유 전 부함장은 “거기서 어떻게 쓰는지는 모른다”면서도 “암초에 걸리면 좌초라고 통상 사용한다”고 밝혔다. 그는 “사고발생시 원인규명 전에도 좌초라고 보통 쓴다”며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고 덧붙였다.
구조 직후 최원일 함장을 비롯해 승조원들에게 사고원인이 뭐냐는 등의 대화도 하지 않았느냐는 변호인측 질의에 유 전 함장은 “불난 집에 부채질할 것 같아서 안했다”고 말했다.
당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유 전 부함장은 “휴대전화”로 처음 구조요청을 받은 시각이 26일 밤 9시34분이었고, 1분 뒤인 35분에 출동했으며, “인천해경 상황실 부실장”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당시 닻 부이(부표)를 설치한 위치와 관련해 새로운 증언도 나왔다. 유 전 부함장은 침몰하고 있는 함수의 위치를 고정하기 위해 사고 발생 5시간 후인 3월27일 새벽 2시25분에 함수위치(북위 37도54분31초, 북위 124도40분90초)에 부표를 설치했고, 이날 아침 7시10분까지 닻 부표와 함수의 위치를 확인한 뒤 주변의 수색작업을 위해 자리를 떴다.
그러나 그 뒤 함수는 완전히 침몰해있었고, 그날 14시40분(오후 2시40분)경 북위 37도54분36초, 동경 124도40분60초 지점에 부표가 설치된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 전 부함장은 “오후에 발견한 닻 부이의 위치는 우리가 설치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고 <미디어오늘>은 전했다.
< 권오성 기자 트위터 @5ths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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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구조활동 ‘증언’에 분노한 이유
억만금을 줘도 못 바꿀 우리 가족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1-08-24)
누구인가 당신에게 제안하여
가족 중 누구를, 억만금을 준다면 바꿀 수 있겠는가.
세상 민심이 제아무리 흉흉하고 가난하게 살지라도 피를 나눠 가진 가족을 돈이나 그에 상응하는 금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금수나 할 짓이지 차마 인간이 할 짓인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큰 권리이자 책임은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을 잘 지키는 일이다. 심지어 동물 사회(?)에서조차 이런 일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게 아닌가.
부득이 가정을 잘 지키지 못할 사정이 생긴다 할지라도 그 구성원의 마음은 늘 가족과 함께 있을 것이며, 죽으나 사나 특정 가족의 일원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실 등에 대해 영원히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또 그 가족을 품고 있는 국가는 정부를 두고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동시에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복지혜택을 고루 나눠줘야 할 것이다. 그건 선진국이 아니라 후진국이나 미개한 나라라 해도 같은 생각을 품고 국정을 운영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어제 서울중앙지법 524호 법정에서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연인들은 천하를 다 줘도 바꾸지 않을 가족들을 정부가 함부로 방치하고 국민들을 속여온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현장을 고발한다.
천안함 침몰사건 첫 공판 소식을 끄적이면서 새삼스럽게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가족’ 이야기를 꺼내 든 건 다름이 아니다. 천안함 침몰사건 첫 공판에서 참 희한한 일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증인으로 출두한 한 증인의 어이없는 증언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디로 표류하고 있는지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포스트를 천안함 사고로 실종되고 숨진 승조원들의 유가족이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게 될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다.
이미 천안함 사고는 이명박 정권이 친정부 합조단을 통해 침몰원인을 조사 발표하고 <천안함 피격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백서를 발간하는 한편, KBS가 앵벌이 모금에 나서 유사 이래 유례가 없는 거액의 보상금과 포상 등으로 유가족들을 위로한 바 있다. 보상금의 액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10억 원 이상의 금액이 지급되었다고 하므로 실종·사망 승조원을 그 액수와 맞바꾼 것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까. 보상금 등 천안함 승조원들이나 유가족의 처우는 정부 차원에서 형평에 맞게 처리하면 될 것이다. 군인이 나라를 지키다 불의의 사고로 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가 ‘불의의 사고’를 조작질하는 등 사실과 다른 이유로 천안함 사고 유가족들을 포상하거나 국민들을 기망한 사실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제 글쓴이는 천안함 침몰사건 첫 공판을 방청석에서 지켜보며, 천안함의 선체인양·구조활동과 관련되어 증인으로 채택된 박규창 증인(당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장)의 증언을 듣게 됐다. 그의 증언을 가만히 속기하며 듣자하니 글쓴이뿐만 아니라 방청석 곳곳에서 나직하게 빈정대는 소리가 들렸다. 변호인 측 심문에 대한 증인의 증언에 어이없어하는 표정들이었다. 글쓴이는 속으로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한 이유가 뭔가.
그 상황을 여러분들이 알기 쉽도록 하기 위해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지난해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 언론에 보도되고 있던 천안함 침몰사고 소식을 들추어 보기로 한다. 먼저 우리에게 익숙한 초대형 크레인의 모습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린다. 위 그림을 잘 살펴봐 주시기 바란다. 대형크레인이 태크보트에 이끌려 백령도 앞바다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 우리 해군 광양함과 미군의 살보함이 보인다. 그 뒤로 백령도가 보인다.
위 그림은 대형크레인이 백령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천안함을 인양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크레인이 내린 대형 훅크 아래를 잘 살펴보면 빨간 부이(부표)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 까만 점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 해군(해병)의 잠수사 등 인양전문가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사고현장에 있는 모습이다. 곧 가라앉은 천안함이 인양될 시점의 모습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을 말씀드리면 우리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다.
대형크레인이 거제도에서 급히(?) 출발한 이유는 천안함 승조원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과 함체 인양 때문이었다. 천안함은 언론 보도와 달리 두 동강이 아니라 세 동강으로 쪼개졌지만, 함미 쪽 승조원들이 격실을 닫고 있으면 선실 내부의 공기로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신문과 방송들이 떠들고 있을 당시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승조원들이 제발 무사하기를 바랐다. 또 승조원 가족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시가 급하고 일각이 급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안함을 급히 인양해야 할 대형크레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군 당국(해군)이었다. 박규창 증인의 증언을 확인해 볼까. 박규창 증인의 증언은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의 ‘모두진술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이후 시작됐다. 그의 증언 등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천안함 침몰사건 첫 재판 ‘박규창 증언’ 스케치
박규창은 천안함 침몰 당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천안함이 침몰하는 시각 외부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천안함 침몰소식을 알게 된 것은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30분경이었는데, 군 당국이 발송한 휴대폰의 ARS를 통해 비상소집 소식을 듣게 됐다. ARS 내용은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박규창의 보직은 수송과장이다. 수송과장이 하는 직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니 군함을 인양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군용차량이 고장 나는 등 사고가 났을 때 사고처리나 견인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간으로 치면 ‘애니콜서비스’ 같은 임무가 박규창의 직무였다. 차량관리가 주 임무였던 것이다. 변호인 측이나 방청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천안함을 인양해야 할 임무를 ‘애니콜’에 맡기다니 하는 표정들이며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방청석에서 비웃음이 들린 것도 이때부터다. 증인의 임무가 의심스러웠던 변호인 측의 질문이 점점 더 길어진 것도 이때부터이며, 증인이 진땀을 빼며 증언에 임하고 있었던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어쩌면 증인 박규창은 태어나서 생전 처음 겪는 수모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검찰이 나서서 “방청석의 비웃음을 저지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할 정도였겠는가. 그러나 증인의 증언을 청취하고 있자니 박규창 증인의 잘못도 잘못이거니와 군 당국이나 정부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게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백령도 앞바다에 천안함이 침몰해 있고 함미 속에는 46명의 승조원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 때문에 한시가 급한 데, 정부와 군 당국이 인양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차량업무) 수송과장에게 크레인 수배 업무를 할당하며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옳은 일인가.
더 큰 문제는 딴 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증인 박규창이 수송과장이라는데 있는 게 아니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야 하는 집단’ 아닌가. 누가 됐던 천안함 함미를 인양만 하면 되는 것인가. 박규창은 명령을 하달받고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그가 비록 차량관리 전문이지만 나라와 군대의 명에 따라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레인의 인양 목적조차 모른 채(?) 인터넷 앞에서 관련 검색어인 ‘크레인’을 두들겨 댔다. 그 결과 밤 11시경에 크레인 업체를 발견했다. 이게 인터넷 블로거나 할 짓(?)이지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상황에서 군대나 나라가 할 짓인가. 이들은 검색창을 두들겨 크레인 업체 찾아 수배하는 데 어느덧 ‘이틀’이라는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박규창은 3월 27일 오후 15시경부터 크레인 수배 관련 업무에 관여하며 동료 이현덕 소령에게 (부탁해) 업체와 계약체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3월 28일 16시경 ‘삼아개발(주)’이라는 업체가 크레인 임대계약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포스트에 등장하는 초대형 크레인이 그런 과정을 거쳐 이동하게 됐는데, 어느덧 사흘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천안함의 실제 인양업체는 (마지막으로) 대우조선의 3천600톤급 해상크레인 ‘대우 3600호’가 결정됐었다. 설령 천안함 승조원들이 격실 내부에서 생존해 있다고 해도 산소 부족으로 다 숨졌을 시간 아닌가. 당시 승조원들의 생존 가능 시간은 약 69시간 정도로 알려졌기 때문에 설령 승조원들이 생존해 있었다고 쳐도 사흘이나 지난 시간이면 모두 숨졌을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이 크레인이 경남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출발하면 4~5일 후 천안함 사고 현장에 도착해 인양 작업을 수행하게 될 예정이므로, 천안함 승조원들은 다시금 4~5일을 더 버티며 생존해 줘야(?) 했다. 자체 동력도 없는 대형크레인을 이끌고 백령도 앞바다까지 이동해야 하므로 천안함 승조원 46명은 그때까지 꾹 참고 생존해 있어야 할까. 비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시츄에이션 아닌가. 그래서 변호인 측은 증인에게 인양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박규창은 “인양목적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참 답답한 군인이자 군대며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군 당국이나 정부가 박규창에게 지시한 명령 속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인양목적 등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별로 바쁠 게 없는(?) 박규창 등은 크레인을 계약한 후 3월 29일 12시 45분경에 백령도로 크레인을 출발시켰다. 천안함이 침몰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대형크레인이 백령도로 출발했으므로 승조원 구출에 대한 희망에 찬 기사질을 퍼붓고 있었다. (나라가 왜 이 모양들인지.)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볼까. 연합뉴스는 경남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출발한 크레인의 제원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해상크레인의 소유주인 대우조선해양에 따르면 ‘대우 3600호’는 길이 110m, 폭 46m, 무게 1만 2천500t의 초대형 해상크레인이다. 2006년 4월15일 진수한 이 크레인은 약 1년6개월 동안 제작됐고 가격은 450억 원 정도다. 해상크레인의 선체는 우리 기술로 만들었고, 크레인의 팔부분은 일본에서 만들어져 국내 기술 자급률은 약 50%로 보면 된다. 대우 3600호는 평소에는 선체의 일부분을 바지선이나 도크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중략) …대우조선해양 측은 대우 3600호 한대가 하루에 2천200여t 상당의 선체를 옮길 수 있고, 하루 사용 비용은 인건비 등을 포함해서 1억 2천만 원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중략)… 천안함 인양 작업을 지휘하는 대우조선해양 서용완 생산지원팀 부장은 “이번 작업이 쉬울 것 같지는 않지만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있는 만큼 최단 시간 내에 안전하게 인양작업을 완료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번 천안함 인양 작업에는 대우 3600호 외에 길이 85m, 넓이 12m 규모에 최대 2천200t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삼아 2200호와 해양개발공사 소속 바지선 2척, 120t급 크레인 2척, 유성수중개발 소속 바지선 1척과 120t급 크레인 1척이 동원된다.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4/05/0200000000AKR20100405172300004.HTML?did=1179m>
또 하나의 관련 소식을 더 첨부하고 박규창 증인의 황당한 증언을 대략 마무리하기로 한다. 위 대우조선해양의 크레인의 제원 등에 따르면 이 크레인을 함부로(?) 옮길 수 없는 초대형 크레인이다. 또 이 크레인을 사용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최소한 하루에 1억 2천만 원이 소요된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침몰당해 백령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던 천안함 승조원들이 생존해 있다면, 생존 승조원의 구출에 드는 이런 비용 정도는 국가가 얼마든지 지출할 수 있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가며 4대강 죽이기 사업에 30조 원이나 퍼붓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수중에 갇혀 있는 승조원의 가족들이나 우리 국민들 모두는 한시라도 빨리 승조원들이 구조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며, 크레인 관련 업체에게조차 ‘국민적 관심이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증인 박규창이 소속돼 있었던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군대가 전시 내지 위급상황에 대한 메뉴얼도 없이 천안함이 침몰한 직후 인터넷 검색창을 두들겨 크레인이나 찾고 자빠진 한심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건 나라도 아니고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기껏 수배해 둔 크레인은 박규창 증인이 ‘인양목적을 모른다’고 한 데에 따라서 천안함을 인양할 수 없는 장비였고, 다시 대우조선해양의 크레인을 수배하고 현장에 투입될 때까지 약 열흘간의 시간을 허비하는 황당한 사건을 자초하고 있었다. 이런 거 보면 누구라도 분노하지 않겠나. 만약 글쓴이가 유가족이 되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보상금이니 포상행위 다 접고, 관련 당사자의 처벌 요구 등을 통해 침몰원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숨져간 원혼을 달래는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당시 승조원 가족들은 승조원들이 가라앉아 있는 백령도 앞바다까지 가서 능력이 부적절한 크레인과 해상의 날씨 등으로 지연되고 있었던 구조활동에 대해 한시라도 빨리 구조재개가 이루어지길 바랐을까.
관련 소식에 따르면 “(우리 해군)광양함에 승선한 실종자 가족들은 한주호 준위의 순직에 이어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저인망 어선까지 침몰하자 망연자실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박정규(당시 실종자협회) 씨는 “자꾸 악재가 겹치니까 마음이 안 좋다. 실종자 수색과 침몰사고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수색에 참여했던 어선이 사고를 당하니 안타깝다.”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분들은 비록 나중에 이명박 정권으로부터 보상을 받긴 했지만, 당시 심정은 천하를 다 주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 수중에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 등에 대해 매우 슬퍼하며 패닉상태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또 “가족들은 (백령도 앞바다 광양함의) 침실이 부족해 불편을 감수하고 식당 의자에서 쪽잠을 잤다.”고 전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처절할 정도 이상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관련 기사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4/03/0200000000AKR20100403042500061.HTML>
따라서 사정이 이러한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변호인 측은 박규창의 황당한 증언에 대해, 그가 왜 이렇듯 황당한 업무를 하게 되었는지 등을 되묻게 되면서 증인 심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박규창 등 군 당국과 정부의 조치는 이랬다. 박규창은 변호인의 심문에 대해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 듯 앞뒤가 안 맞는 증언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인양목적도 모른 채 초대형 크레인을 수배하게 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해군에는 함정을 관리하고 인양 등 해난사고에 대처하는 <함정정비처>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함정정비처가 크레인 수배업무를 전담하지 못한 이유는 예산 항목에 ‘크레인을 수배하고 계약할 비용’이 없었다는 이유다. 정말 짜증 나며 화난 증언 아닌가. 그래서 변호인 측이 구체적으로 따졌다. 그러자 박규창은 “비용이 12억 원이나 더 드는 문제가 생겨 논란이 있었다”고 했다. 함미에 갇힌 승조원들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더 들어도 인양에 적합한 크레인을 재빨리 수배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이거 미친넘들이나 미친 정부 내지 미친 군 당국이나 하는 짓 아닌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박규창의 증언은 신 위원이 주장하고 있었던 것처럼 천안함이 폭침이 아니라는 사실주장에 비추어 보면 매우 실용적인 판단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맨 처음 ARS 등으로 확인한 바와 같이 천안함은 ‘침몰’되었으므로 (승조원들은 모두 숨진 상태로 판단하여) 천안함을 인양만 하면 그만이지, 해군의 부족한 예산을 함부로 낭비하여 ‘능력 없는 수송과장’으로 낙인 찍히면 안 될 이유도 없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박규창 증인은 서서히 머리를 굴리는 데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다.
비록 변호인 측 심문에 따라 “크레인 동원 지시만 받았다”고 말했지만, 박규창은 천안함 승조원들이 69시간 동안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묻는 변호인 측의 심문 때문에 짧게 깎은 머리가 폭발에 이를 직전으로 변했다. 박규창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들었다. 뉴스와 회의 중에….” 그러나 박규창은 곧 말을 바꾸어 “69시간은 모른다. 크레인을 빨리 투입해야 된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다수가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특히 박규창은 천안함 침몰사고 소식을 ARS 등을 통해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안함 인양을 위한) 크레인 동원 임무까지 맡고 있었는데 크레인의 인양목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래도 되나. 그는 또 “크레인이 백령도 앞바다에 투입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로(좌표) 투입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하긴 수송과장이 그거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박규창의 증언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던(?) 검찰 측의 반대심문은 마치 한나라당 사람들이 위장전입을 일삼은 한 장관 후보를 지원하는 듯했다. 검찰 측은 박규창에게 “자동 ARS로 천안함 침몰사고를 접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지 않느냐”며 (박규창 ‘네’ 하고 대답하다.) 두둔하고 나섰다. 또 “전시가 아니라서 크레인의 강제동원 문제는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박규창은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다. 검찰의 반대 심문에 따르면 검찰은 피고와 북한을 매우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왜 그런가.
주지하다시피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사고를 친정부 합조단 등을 통해 조작질한 결과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북한의 잠수정에 의해 폭침되었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이명박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해 의혹을 가진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이간질하고 있었다. 대통령이란 인간이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따라서 검찰의 반대 심문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박규창을 돕고자 한 발언 “전시(戰時)가 아니라서…” 운운하는 발언은 대통령의 발언을 부정하는 짓이자 검찰총장 한상대와 몸통을 이루고 있는 검찰이 할 발언으로는 부적절해 보였다. 이명박의 발언 등에 따르면 천안함 폭침은 전시 상황과 다름없는 매우 위험한 북한의 도발행위였기 때문이다. 우리 남북이 아직 휴전 중에 있다는 거 모르나. 오죽했으면 이명박이 천안함 침몰사고를 조작질하여 유엔안보리까지 가져가 국제적 망신을 초래했겠나.
아울러 검찰의 이 같은 발언은 곧 포스팅 될 알파잠수함기술공사(대표 이종인)의 잠수장비와 무관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나라를 지키다 침몰한 천안함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고, 그 속에 생존 가능한 승조원들이 있다고 하는 데, 전시 내지 준전시 상황으로 판단하여 크레인 등 필요한 장비들을 긴급히 동원하는 등의 조치는 당연할 텐데 굼뜬 이유만 보면 천안함이 폭침이 안 됐다는 반증 아닌가. 만약 폭침이라 할지라도 알파잠수함기술공사에 비치하고 있었던 고급 잠수장비를 긴급동원해, 천안함의 함미에 갇혀 있던 승조원 등을 일찌감치 수색하고 구출할 수 있었지만 군 당국과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군 당국이나 정부는 천안함이 침몰한 직후 천안함의 함수와 함미를 수색하거나 승조원의 구출작전을 하는데 전력을 쏟고 있었던 게 아니라, 백령도 연화리 앞바다 제3부표가 있던 지점에서 미군 잠수함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 위치에 故 한주호 준위를 투입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침몰 즉시 숨졌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가.
천안함 구조활동 및 인양과 관련한 증인 박규창에게 변호인 측의 마지막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변호인 측은 박규창에게 다시 한 번 ARS의 통보사실을 되물었다. “부대에서 뭐라고 했나”라고 묻자 “배가 가라앉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인양목적을 몰랐을까. 변호인 측은 크레인 동원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 내용 등 시종 황당한 답변으로 일관했던 박규창의 처신이 옳았는지 등에 대해 이렇게 물었다. “승조원 46명이 수장되었는데 그게(증인의 답변 내용) 잘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박규창은 “최선을 다했다. 크레인 동원시키는 일만 했다. 최대한 빨리한 게 그렇다.”고 말했다. 방청석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박규창의 이 같은 증언 등은 비록 앞뒤가 잘 맞지 않고 황당함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초지일관 사실에 근거(?)한 증언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가 침몰한 천안함의 인양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해군이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연민이 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해군의 사정 등을 철저히 숨긴 채 가라앉은 함미 속의 승조원이 생존하고 있을 확률을 언론에 흘리는 연막작전을 통해, 제3부표 자리에서 故 한주호 준위를 동원하여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수색하는 시간을 벌고자, 군 당국과 정부가 대국민 기만극을 펼치며 승조원 가족들과 국민들을 애태우게 만든 일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천안함과 함께 충돌하며 침몰한 이스라엘 잠수함 속 ‘미군의 시신’를 건지고 있었다는 추측이 파다했는데, 정부는 천안함이 좌초 이후 잠수함과 충돌한 사실 등을 숨기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며 승조원 가족과 우리 국민들을 까마득히 속이며 북한에 의한 폭침으로 조작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바 천안함 사고로 숨진 승조원들의 유족들이 박규창의 증언 등 크레인이 늦게 투입된 사실을 접하게 된다면 얼마나 허탈해할까. 천하를 다 줘도 못 바꿀 가족들의 생명을 볼모로 한 조작질이었기 때문이다.
천안함은 박규창이나 군 당국과 정부의 늑장 대처에 힘 입어(?) 사고 17일 만인 지난해 4월 13일에 함미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데 성공한 바 있다. 승조원들은 이미 모두 숨진 상태였다. 설령 살아있었을 승조원들이라 해도 굶주려 죽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억만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사랑하는 가족들은 정부의 황당한 늑장대처 때문에 승조원 46명 모두가 숨진 어이없는 일이자, 분노할 수밖에 없는 매우 위험한 처사가 아니었던가. 이날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은 모두진술 프레젠테이션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안함 사건에 폭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은 북한에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No Explosion! No Torpedo! That is my conclusion!”
위 포스트에 사용된 크레인과 독도함 등 자료사진 중 몇 개의 그림은 천안함 침몰사건에 자주 등장할 이미지입니다. |
우리 대한민국 해군은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충무공 이순신 제독 이래, 6·25 전쟁 이후 남과 북이 반목하고 있는 최근까지 북한에 패한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군대이다. 휴전 이후 서해 최북단 백령도 포함하여 ‘서해 5도’가 남한의 섬으로 차지될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해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명박 정권은 해군과 우리 군의 명예는 물론 나라의 명예와 국격을 심히 떨어뜨리는 사건 조작질과 국민들의 이간질을 통해 정권을 유지해 보려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 이게 제정신들인가.
특히 최근에는 오세훈과 이명박 등 정부와 여당의 수꼴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아이들의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시민들을 볼모로 주민투표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나랏돈 30조 원을 예산 날치기로 빼앗아 함부로 사용하고 국토를 황폐하게 만든 것도 부족하여, 부자감세를 통해 100조 원이나 되는 비용을 날아가게 만든 만행 등 부정부패를 주민투표나 천안함 침몰사건에 숨겨보고 싶었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천안함 침몰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오세훈이 무릎을 꿇고 찌질거리는 등 천안함의 진실을 감추어보려고 안달을 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겠는가. 천안함의 진실을 향한 포스팅은 계속 이어진다. 다음 편은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 맨 먼저 구조에 나선 해경 501함 유종철 부함장의 ‘좌초’가 언급된 증언 등을 실을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란다.
내가 꿈꾸는 그곳
천안함, 나라 망신시킨 ‘밥통’들의 진술
침몰은 자체 문제, 조작질은 밥통들 문제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1-08-18)
나라에 밥통이 많으면 행복한 것일까.
그 밥통들이 군대에 가득하면 군인들이 배부르게 될까.
아니쥐….^^
밥통에 대한 포스트를 만지작이는 순간 기분이 좋아진다. 밥통 속에 담긴 구수한 밥 냄새가 침샘을 자극하며 겉절이 배추김치를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다. 요즘 쌀 소비가 줄었다고 하지만 글쓴이처럼 구닥다리는 여전히 빵보다 밥을 더 좋아한다. 바게트에 크림을 발라먹는 것보다 쌀밥에 김치를 곁들인 게 더 좋으니, 밥통을 생각할 때마다 그 속에서 고실고실 속살을 드러내 놓고 있는 구구한 맛의 밥이 떠오르는 것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의 본격적인 재판을 닷새 앞두고 새삼스러운 듯 ‘밥통’이라는 키워드를 매만지고 있는 이유가 뭔 줄 아시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천안함 침몰사건과 직접적인 관계 유지를 하고 있는 게 밥통이기 때문이다. 밥통이란, 밥을 담는 통이라는 것쯤 모르는 사람들 없을 것이다. 또 ‘위(胃)’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밥통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밥통에 또 다른 뜻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만 축내고 제구실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밥통이라고 하니 우리말 정말 재밌다.
천안함 침몰사건에 ‘밥통 같은 사람’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으니 눈여겨봐 두셨다가 ‘아… 저런 인간들이 나라를 망신시킨 장본인들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별로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더 웃기는 건 그런 밥통들이 어깨에 별을 달고 나라를 지키는 각군 지휘관들이라니 걱정도 된다. 그런 군대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얼마나 힘들겠나. 또 정치판에 즐비한 밥통들도 문제였다. 행불상수가 보여준 보온병 폭탄은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군대 안 갔다 온 이유가 만든 불상사였다.
행불상수가 보온병으로 웃음을 주긴 했지만 그는 밥통 같은 정치인이었다. 명진스님은 안상수더러 ‘아는 게 좌파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다. 대가리에 든 게 텅 빈 밥통이라는 말일까. 물론 이런 일은 안상수에게만 나타난 불상사가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에는 그런 밥통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렇다면 천안함 침몰사건에 나타난 즐비한 밥통 등 천안함 침몰사건을 둘러싼 밥통들은 누구인지 한번 찾아나서 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천안함 침몰사건의 밥통탐구라고나 할까. 이런 탐구생활은 밥통 속의 구수한 밥맛보다 더 재밌다.
지난해 3월 26일 오후 9시 00분경 서해 최북단 백령도 앞바다에서 미국의 잠수함과 ‘규칙적인 훈련’ 중에 있던 천안함은 무슨 작전을 수행 중에 있었던지 까나리 어장까지 진출하여 좌초하게 된다. 작전상황판에 쓰여진 내용을 보니 좌초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지 ‘최초 좌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천안함은 좌초에 의해 ‘침수’ 중에 있었던 것이므로 해경 등에 긴급타전을 했다. 그 사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 좌초로 인한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15분 만에 신속하게 대통령까지 보고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청와대 벙커 속으로 관계장관 등을 불러들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런 내용은 천안함 관련 포스트에 수차 언급했으므로 다 아실 것이다. 그러나 천안함이 좌초 이후 곧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하며 승조원 46명이 숨지는 사고는 벙커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밥통들의 조작질에 의해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둔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밥통들은 천안함 침몰 원인을 어떻게 조작질 하여 조사발표를 하며 나라를 망신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나라를 지켜야 할 군 지휘관 등은 국가적 품격을 심히 떨어뜨리고 있던 한 밥통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횡설수설 말 바꾸기를 시도하며 마침내 1번 어뢰를 생산(?)해 냈던 것인데, 한국어 위키백과는 <천안함 침몰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기록한 가운데 그 장면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진술 번복
북측 잠수정 관련 :
군은 최초 관측됐다고 발표한 북한 잠수정을 처음에는 “서해에 북한 해군기지에서 운용되던 일부 소형잠수함정과 이를 지원하는 모선이 천안함 공격 2~3일 전에 서해 북한 해군기지를 이탈했다가 천안함 공격 2~3일 후에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가, 이후 “우리가 확실하게 추적하지 못한 북한 잠수함 2척은 상어급이다”, “사고 당일 소형잠수함은 ‘영상불량’ 상태였다”, “한국 측 자료로는 확인하지 못했고 이후 미국 등으로부터 추가 자료를 전달받아 이탈을 확인했다”로 말이 수시로 바뀌더니, 최종보고서에는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이 천안함 침몰 2~3일 전 기지를 이탈했다 천안함 공격 2-3일 후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됐다”는 것으로 번복했다.
2010년 4월 3일에는 “북한 잠수함은 오랫동안 잠항할 능력이 없다, 연관성이 약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가 이후 최종 보고서에서 연어급 잠수정에 의한 타격으로 결론지었다. 타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측 잠수정의 크기에 대해서도 “3.5m → 2.75m → 3.2m → 3.5m”로 수차례 번복되었다. 북측의 연어급 잠수정의 크기에 대해서도 “130톤급 → 70,80톤급 → 130톤급”으로 수차례 말을 번복했다. 어뢰설계도에 있어서도 “북한의 어뢰 설계도와 수거한 어뢰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가, 추후 언론 지적이 잇따르자 “실수로 다른 어뢰 설계도를 공개한 것”이라고 말을 번복했다.
천안함의 이동 경로 :
천안함의 백령도 내해 운항 이유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사고 해상을 15번 정도 다녔으며 당일 기상이 워낙 나빠 바람을 막기 위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가, 이후에는 “승인된 정상적인 경비구역 내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풍랑이 아주 심했기에 그런 차원에서 섬에 좀 더 가까이 그렇게 작전 구역 내에서 움직인 것이며 작전 구역에서 약간 벗어났지만 바다에서의 작전은 작전 구역선이 지상에서처럼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는다”, “특수임무 수행이나 피항이 아닌 2함대에서 지시한 정상 경비구역에서 정상적 임무수행 중이었다”로 3차례에 걸쳐 설명이 바뀌었다.
어뢰설에 대한 답변 :
대한민국 국방장관은 어뢰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어뢰는 사전에 소리가 탐지되는데 탐지된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4월 1일에는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서해기지에서 잠수정 2척이 보이지 않은데 대해 “그것이 꽤 먼 곳이기 때문에 저희 지역과 연관되는 움직임과는 연관성이 약하다”고 밝혔으나 합동조사단은 그 두 척 중에 한 척이 천안함을 공격했으며 이와 정 반대되는 발표를 하였다.
침몰 시각 :
국방부가 처음 밝힌 침몰 시각은 9시 45분이다. 하지만 이를 다시 9시 30분으로, 또 9시 25분으로, 또다시 9시 22분으로 수차례 진술을 번복했다. 국방부는 해양경찰청과 각기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도 군이 불신을 자초했다고 보도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군이 횡설수설 오락가락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천안함의 실시간 위치정보인 KNTDS는 청와대 평택 2함대, 부산해군작전사령부 등으로 실시간으로 전송되기 때문에 KNTDS에 의한 사고 발생 시각을 모른다거나, 이를 번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보고 수단 :
국방부는 계속 최초 보고는 “휴대전화”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폭발 전에는 전혀 징후를 몰랐고, 폭발 후에는 전기가 나가서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국회 국방위에서 군함에 휴대무전기도 없느냐고 질타하자, 그 이후 언론보도에서는, 최초 보고는 휴대전화로 했는데, 나중에는 휴대무전기로 보고했다고 하면서 진술을 번복했다.
어뢰모델 :
2010년 5월 19일 “합동 조사단은 지난주 백령도 해상에서 수거한 어뢰 파편에 ‘한자’가 표기된 사실을 근거로 이 어뢰가 중국제 ‘魚-3G’ 음향어뢰로 사실상 결론 낸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일제히 언론이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루만인 5월 20일 CHT-02D 어뢰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6월 29일 이러한 진술을 또 번복하여 합조단이 제시했던 설계도는 북한의 PT-97W 어뢰의 설계도였다고 밝혔다. 북한산 어뢰의 설계도라고 주장한 국방부의 설명도 처음에는 책자라고 했다가, CD라고 했다가, 둘 다 있다고 하는 등 진술이 수차례 번복되었다.
또한 9월에 발표된 최종 보고서에서도 어뢰 카탈로그의 공개는 물론 존재 여부조차 밝히지 않았다. 어뢰 부식 정도의 경우 “눈으로 식별한 결과 함수와 어뢰 추진체의 부식 정도가 비슷하다”는 것이 합조단의 최초 설명이었지만, 추후에는 “가속화 실험법을 통해 부식 정도를 감정 중이다”, “부식 두께 차이가 심해 부식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말로 바뀌었다…. 등등 <출처 : 천안함 침몰 사건>
위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국방부의 어깨에 별을 단 수뇌부 등이 늘어놓은 증언들은 말장난 일부에 불과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서 천안함을 폭침 시켰다고 말하는 <북한의 잠수정>이 최종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번복한 말장난을 참조하면, 이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대한민국 국방부나 지휘관들인지 장사꾼 똘마니들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간다. 백과에 쓰여진 최종보고서에는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이 천안함 침몰 2~3일 전 기지를 이탈했다 천안함 공격 2-3일 후 기지로 복귀한 것이 확인됐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 언론플레이를 통해 일반에 알리고 다시 기록해 둔 내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떠했나.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크롤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일찌감치 이 사건에서 발을 떼 놓기 위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결정할 문제이긴 하지만, 천안함 자체 문제를 제외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크롤리 미 국무부 대변인의 이 발언은 매우 중요하다. 왠지 아나.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괜히 미국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참 괘씸한 넘들이다. 어떤 넘은 ‘규칙적인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라고 말하더니, 이넘은 아예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며 발을 쏙 뺏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넘들이 아니다. 한국이 결정할 문제라고 하자마자 대한민국의 밥통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밥통들이 누구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따라서 천안함 침몰 사건 직후 벙커에서 시작된 회의는 ‘밥통회의’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요런 거 보면 다른 내용 보나 마나 한 게 아닌가.
천안함 침몰사고는 이렇게 해서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바뀌게 되고 거짓이 진실을 깔아뭉개며,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뿐만 아니라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안보전략비서관, 도울 선생,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이승헌 버지니아대학교 물리학 교수와 참여연대 등이 보수단체와 국방부장관, 해군 등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빗고 있었다. 밥통들의 반란은 상식을 뒤엎는 수준이었는데 이런 현상을 보다 못한 소설가 이외수님은 트위터를 통해 밥통들이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안함 사태를 보면서 한국에는 소설 쓰기에 발군의 기량을 가진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30년 넘게 소설을 써서 밥 먹고 살았지만,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딱 한마디밖에 할 수가 없다. 졌다.”
밥통들이 쓰고 자빠진 소설에 질렸다는 표현일까. 도올 김용옥 선생은 “천안함 조사 발표를 하는데 자기 부하들, 불쌍한 국민들을 다 죽여놓은 패잔병들이 개선장군처럼 앉아서 당당하게 발표하는 그 자세에 너무 구역질이 났다. 일본의 사무라이 같으면 그 자리에서 할복자살해야 할 감”이라고 말했다.
혹시… 여러분들은 도올 선생의 이런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다. 도울 선생이 표현한 “패잔병들이 개선장군처럼 앉아서 당당하게 발표하는 그 자세”가 천안함 침몰사건이 블랙코미디라는 것을 함축해 놓은 명언이 아닌가. 나라를 지켜야 할 임무를 지닌 인간들이 경계근무에 실패하고도 이렇게 말이 많은 거 본 사람들 있나. 대통령부터 국방부 장관 해군 관계자 등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인간들이 없다. 이게 나란가.
그래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전 의장은 “미국이 일본에서 철수 논란을 빚고 있는 오키나와 기지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실을 통해 한반도에 긴장감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천안함을 격침”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러시아에서는 우리 해군을 향해 치욕적인 한마디를 했다. 이 포스트를 끄적인 배경이 된 셈이다. 뭐라 했나. 천안함 침몰원인을 조사해 온 러시아 전문가들은 최종 결론을 냈는데 ‘한국 해군은 (북한이 발사한)어뢰에 폭침되었다면 밥통 해군’이라고 말한 것이다. 흐흐…. 밥통의 추억이 이러하다니.
이 부분에서 웃음이 나올 리 없다. 오사카 출신의 밥통 대통령 등 이명박 정권이 벙커 속에서부터 시작한 천안함 침몰사건 조작질은, 결국 우리 해군을 밥통으로 만들며 ‘李 충무공’의 후예인 대한민국 해군은 물론 대한민국 국방을 ‘바보’로 규정하고 완전히 깔아뭉갠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 전체를 바보로 만든 밥통들이다. 이명박 등 수꼴들은 4대강 죽이기 사업 등으로 국토와 국부를 망치고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왜국에 치욕을 준 이순신 장군의 명예를 해치는 굴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에 이런 밥통들이 제아무리 많으면 어디에 쓸모 있나. 밥통정권에서부터 밥통장군들과 밥통정치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밥통주민투표. 이런 밥통들 때문에 요즘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아주 기적 같은 일이다.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과 군의 최고 지휘관이나 정부·여당이 보여주고 있는 참으로 한심한 밥통질 때문이다. 그 밥통질을 하나둘씩 밝히는 일이 어느덧 닷새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밥통들 때문에 추락한 나라의 품격을 다시 끌어올리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천안함의 진실>을 되찾는 일이다. 아무튼, 참 흥미로운 천안함 침몰 사건 재판이자, 잠시 밥통들 때문에 잃어버린 국운을 되찾는 매우 중요한 진검승부다. 누리꾼들의 응원과 격려가 필요한 이유다.
내가 꿈꾸는 그곳
[재판후기] “나를 고소해준 건 하늘이 준 소중한 기회다” (민중의소리 / 신상철 / 2011-08-26) 이 사건은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에 민간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필자가 허위사실을 주장하여 합동조사단에 참여한 군과 조사위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필자를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조사가 시작되어 <명예훼손> 및 <정보통신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필자가 평택에서 천안함을 조사한 직후 언론 인터뷰와 칼럼을 통해 합조단 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합조단장(대리)의 고발을 필두로 김태영 국방장관,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윤종성 국방부 조사위원장의 고소(고발)이 이어져 원고의 계급이 <별만 열넷>인 초미의 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소송사건의 성격만 보면 단순한 명예훼손과 정보통신법 위반 여부를 다투는 형식이지만, 사건의 본질은 피고인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허위’에 근거한 것인지를 따져보아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천안함의 침몰을 둘러싼 진실의 실체적 모습이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필자 역시 국방장관을 고발하였습니다만) 합조단과 군부 최고위층에서 필자를 고소(고발)해 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대한 권력에 눌려 꺼져가는 불씨를 이어갈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을 한 사람씩 증인석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준 소중한 기회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7월에 열렸던 제4차 준비기일에서 저는 재판장께 첫 재판에서의 <피고인 모두진술>을 프레젠테이션으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사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워낙 쟁점이 많아 그래픽으로 잘 정리된 자료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그리고 방청객들도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란 점을 말씀을 드렸고 재판장께서 검사의 동의를 구해 허락을 하셨습니다. 재판장께서 허락하신 30분 브리핑을 위해 작성한 90페이지 PT 자료에 담긴 주요 내용을 요약 소개하겠습니다. ○ 참고파일 : http://www.seoprise.com/etc/u2/?tid=328527
1. 천안함 사고 첫 보도 - [침수되면서 5km 표류 후 두 동강] 이것은 침수를 유발하는 첫 사고와 함체가 두 동강 난 두 번째 사고로 나뉘는 것이며 그 사이엔 ‘표류’라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 두 번의 사고가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으나 본질은 사고가 한 번이 아닌 두 번의 일련된 사고라는 사실이다. ▲ 천안함 최초 보도 관련 PPT.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2. 해군 최초상황일지 및 해경 최초보고서 - 모두 최초상황발생시간을 21:15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경은 보고서에 <좌초>를 명시하고 있으며 기자들을 불러 첫 상황발생이 21:15분이었다는 기자회견까지 하였다. 그리고 천안함 함장, 포술장 모두 함대사령부 및 해경에 도움을 요청하며 <좌초하였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3. 천안함 사건 당일 서해 해상에서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과 함께 독수리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으며, 당시의 훈련내용이 <대잠훈련>이었다는 사실이 사고 후 두 달여 지난 2010년 6월5일 AP 통신의 보도를 통해 밝혀졌다. 대잠훈련이란 아군 잠수함 중 몇 척을 적 잠수함이라 간주하고 추격하는 훈련인데, 그런 중에 북한 잠수함이 끼어들어 초계함을 격침시켰다는 것이 국방부의 주장인 셈이다. 4. 필자가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계기는 항해기록, 교신기록, KNTDS정보, 조타기록, 엔진기동상황 등 해양사고 시 당연히 공개되어야 할 필수 기본 사항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군사기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선박 운항사고 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좌초 및 충돌을 아무 근거 없이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등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5. 천안함 침몰 후 불과 9시간 지난 27일 오전 용트림 바위 앞 해상에서 천안함 함수가 발견되었고 해경정이 현장에서 함수의 위치와 실체를 확보하였음에도 군은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묵살하였으며, 당일 오후 해경은 Sonar로 함미를 발견하여 군에 통보하였음에도 국방부는 묵살하는 한편 기자들에게 계속 수색 중이며 3000톤급 수색함이 올라오고 있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발표로 진실을 호도하였음이 밝혀졌다. ▲ 천안함 함수 발견 관련 PPT.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6. 천안함 프로펠러가 구부러진 것은 좌초 및 이초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갑작스러운 정지로 관성의 힘이 작용하여 휘어졌다는 군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또한 군은 인양된 함미를 바지선에 탑재하는 과정에서 함미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자 프로펠러 하부를 플라즈마 커팅(Cutting)으로 임의로 절단하였음에도 바지에 함미를 탑재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부러졌다고 거짓말을 하였던 사실이 드러났다. 7. 천안함의 최초사건 시간과 관련 합참 주도하에 천안함 최초사건 시간 15분에 ‘ㄴ'을 그려 45분으로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감사원 감사결과 밝혀지고 공식발표 하였음에도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초사고시간 역시 여전히 ‘9시22분’을 고수하는 등 국방부는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다. 8. 좌초의 증거들 - 선체하부의 스크랫치, 천안함 침몰 첫 통보 시 좌초표현이 있었다는 언론들의 보도, 해군 작전상황도 상의 ‘최초좌초’지점 명기, 증거 동영상 확보, 희생자가족대표의 증언, 휘어진 프로펠러 등이 천안함의 좌초를 입증하고 있다. 9. 폭발이 존재했는지 여부 - 화약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는 천안함 병기장 오성탁 상사의 증언, 최초 시신인양한 잠수요원의 증언, 물기둥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 절단면 내부 천장에서 발견된 형광등, 물고기 떼죽음현상이 없다는 사실, 선저외판에 파편이 전혀 없다는 사실, 온전한 가스터빈실, 게이블 손상의 형태는 물리적 절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 등은 폭발의 존재를 부정한다. 10. 합조단은 어뢰를 두 개 준비하였다 - 합조단이 최초 어뢰를 발견했다며 언론에 공개한 사진과 이후 5월20일 유리케이스에 넣어 실물 공개한 어뢰가 서로 다르다. 합조단은 최초 낡은 어뢰 사진을 공개하였으나 진위여부 및 출처에 대한 논란이 일자 <1번>을 써 넣은 유사한 어뢰를 준비하여 공개하였다. 실물 공개한 어뢰는 처음 사진으로 공개한 어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세밀히 비교한 결과 분명히 다른 어뢰였다. 11. ‘1번 어뢰’는 조작된 것 - <1번>은 녹 위에 쓰여졌다는 사실, 녹을 제거하기 위해 녹제거제로 문지른 흔적, 재미과학자의 흡착물질 분석결과 국방부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국내 400여 과학자의 추천을 받아 추적60분팀의 의뢰로 실시한 안동대 정기영 교수의 실험결과 어뢰흡착물질은 상온에서 오랜 시간 침전되어 고착된 알루미늄 수산화 산화물임이 밝혀졌으며 국방과학연구원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12. 후타실 희생자 - 국방부에서 제작한 최종보고서 211page에는 후타실 희생자 마지막 장면이라며 운동복 차림의 대원 5명과 근무자 1명의 CCTV 화면이 나와있다. 그러나 동 보고서 129page에는 후타실에서 발견된 시신이 4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타실 희생자에 대하여 인원수와 계급이 서로 상이한 내용이 같은 보고서에 올려져 있는 것이다. 13. 가리비, 붉은멍게 그리고 새로운 해양생물체 - 어뢰 구멍에서 가리비가 발견되자 국방부는 요원을 보내 증거물을 훼손 인멸하였으며, 붉은멍게 유생 사진을 공개하자 분석결과 무생물이라며 부인하였다. 이에 이번 모두진술에서는 어뢰흡착물질 속에 파묻혀 있는 미상의 ‘해양식물체’ 사진을 최초로 공개하였다. 어떠한 이유든 흡착물질 속에 파묻힌 물체의 존재 자체만으로 순간적인 폭발이라는 논리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14. 천안함과 잠수함의 상관관계 - 100%다. 국방부가 주장하는 것은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에 북한의 잠수함이 NLL을 넘어 천안함을 추적하여 어뢰를 쏘았다는 것이고, 피고인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좌초로 인해 기동력에 문제가 발생한 초계함이 인근해역을 수중 항행하는 잠수함과 충돌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해역 내에 천안함과 잠수함이 사고를 유발시켰다는 사실만큼은 국방부와 피고인의 견해가 일치하는 셈이다. 15. 잠수함과의 충돌을 주장하는 이유 - 첫째, 전술한 바와 같이 천안함 사건에 ‘폭발’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평평한 해안단구에 부드럽게 밀고 들어가 좌초한 정도만으로 선체가 반 토막 나지 않는다. 셋째, 인근해역에 배를 두 동강 낼만한 암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가능성은 제3의 함선(선박)과의 충돌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6.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정황 - 서해안 한미합동군사훈련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제3의 국가에서 파견되어 온 잠수함을 포함 최소한 3척 이상의 잠수함이 훈련에 참가 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더 이상 비밀이 아니며 사고 당일의 훈련이 <대잠훈련> 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사고 인근해역 수심 46미터 깊이에 높이 10m에 달하는 침선이 존재하였다는 것 역시 잠수함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7. 사고지역 반경 200 ~ 250m 범위 내 침선의 발견 - 알파잠수 이종인 대표는 천안함 사고지역에서 오래된 침선을 발견하였으며, 국방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실토한 바 있다. 사고해역에 길이 75m 높이 10m의 침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근을 항행하던 잠수함에게는 <긴급부상>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수심 45m인 해역에 높이가 20m인 잠수함이 항행한다면 해저의 높이 10m 침선은 잠수함을 부상시킬만큼 충분히 위험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18. 잠수함과의 충돌 증거 - 2010. 4. 2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답변 중 누군가로부터 VIP 메모를 전달받는다. VIP 메모에는 <장관님, 보이지 않는 두 척과 이번 사태와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기존의 입장인 ○○○과 침몰초계함을 건져 봐야 알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지워진 ○○○을 확대분석하니 <잠수함>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었다. 이 메모가 문제가 되자 국방부는 보이지 않는 두 척이 북한의 기지를 출발한 잠수함이라고 둘러댔지만, VIP 메모를 읽어보면 국방부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 TOD 영상 속 자력으로 기동하는 물체 발견 - 천안함 함수·함미 분리직후의 영상 속에서 동력을 갖고 기동하는 물체가 발견되었다. 천안함은 함수 함미가 분리된 후 기동력을 상실하고 조류가 흐르는 방향으로 서서히 떠내려가지만 함수와 함미 중간에서 발견된 미상의 물체는 조류방향을 거슬러 이동을 하다가 함수와 부딪친다. 동력을 상실한 천안함 그 반 토막 난 중간에 기동력을 가진 물체는 천안함과 충돌한 사고의 당사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 미국의 딜레마 - 천안함 사고 이후 서해안에는 미 7함대 구조병력과 장비가 총 집결한다. 주한 미 대사와 한미연합사령관이 백령도로 급히 날아오고, 첨단 장비를 동원 심해잠수사들은 무수히 많은 양의 인양물체를 건져 올려 헬기로 어디론가 실어 나른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함선들이 천안함의 구조 작업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사고를 수습하는 일에 바빴을 뿐이다.
“천안함 첫 재판, 난 이렇게 진술했다”
작년 5월 합조단의 고발로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후 8월 기소 그리고 해를 넘겨 네 차례의 준비기일 과정을 거치는 동안 검사와 재판부가 교체되는 우여곡절 끝에 천안함 침몰 사건의 첫 재판이 지난 월요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습니다.
피고의 모두 진술 프레젠테이션
▲ 천안함 사고 후타실 희생자 관련 PPT. 최종보고서에 나오는 후타실 희생자 기록과 동영상에 등장하는 장병들의 계급과 인원수가 완전히 다르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 국회에 출석한 김태영 당시 국방장관이 전달받은 VIP 메모. VIP 메모에는 잠수함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 신상철 대표는 “진상을 밝히는 것만이 안타깝게 죽어간 46명 장병과 한준호 준위의 죽음을 헛되이 않는 일이고 제2의 천안함 사태를 막는 길”이라고 밝혔다. ⓒ민중의소리 |
소송사건에서 피고인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최초 모두진술 그리고 판결 후 최후진술 단 두 번뿐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첫 재판의 모두 진술을 통해 그동안 분석하고 준비하였던 대부분의 내용을 요약하여 브리핑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재판에서 매회 3~4명의 증인을 소환하여 증인심문을 하게 된다고 보았을 때 이 사건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 2년이 걸릴지 3년이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소망하는 바, 내년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성공한다면 천안함 침몰 사건은 법정이 아닌 국회에서 국정조사로 다루어 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그것이 진실을 밝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역할은 진실을 밝히는 노력과 함께 이 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스러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 첫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두 분, 해군본부 군수과장과 해경 501호 부함장에 대한 증인심문에 대해 사전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깜짝 놀랄 만큼 비중 있는 증언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소개하겠습니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
출처 : http://www.vop.co.kr/A00000426960.html
천안함 조사결과보고서에 실린 '1번어뢰'(윗쪽) 사진과 작년 5월20일 중간조사결과 때 공개된 '1번어뢰'(아랫쪽) 사진. 동그라미 부분 모양이 다르다. ⓒ신상철
천안함을 침몰시킨 '흉기'로 지목된 이른바 '1번 어뢰'가 두 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22일 열린 재판에서 민군합동조사단이 두 개의 어뢰를 준비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군은 북한이 만든 '1번어뢰'가 수중폭발하면서 천안함을 침몰시켰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1번어뢰는 군이 함께 공개한 설계도와 달라 조작논란에 휩싸였었다. 실제, 천안함 최종결과보고서에 실린 1번어뢰와 설계도면은 수치와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번에 제기된 의혹은 1번어뢰 자체가 두 개가 준비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파문이 상당하게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신 대표는 민군합동조사단이 펴낸 천안함 최종결과보고서에 실린 1번어뢰의 사진과 지난해 5월20일 민군합동조사단이 조사결과 발표를 할 당시에 공개했던 1번어뢰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두개의 어뢰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천안함 보고서에 실린 어뢰 사진과 5월 20일 기자들 앞에 공개된 어뢰는 대체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샤프트 끝 부분의 모양새가 다르게 보인다.
신 대표는 또, 천안함 보고서 129쪽에 기록된 후타실 근무자와 같은 보고서 211쪽 동영상 캡처 화면에 나타난 근무자가 숫자와 계급이 서로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129쪽에는 희생된 후타실 근무자가 중사, 하사, 병장, 상병 등 4명이라고 적혀 있으나 211쪽 동영상 화면에는 하사 2명, 병장 2명, 상병 1명, 순찰중인 안전당직자 1명 등 모두 6명이 등장한다.
신 대표는 "이들 6명 중에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다"면서 "동영상에 당연히 표시되어 있어야 할 날짜나 시간 등이 표시되지 않은 건 조작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번 어뢰’ 가짜 두 개”라는 주장 나와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천안함 거짓 조사결과로 김태영 장관 등 고발
김용욱 기자 2010.08.23 14:27
천안함 사건 허위사실 유포로 보수단체에 고발당한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운동본부)가 23일 건져 올린 ‘1번 어뢰’와 합조단이 공개한 ‘1번 어뢰’가 서로 다른 가짜라며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천안함 사건 진상 조사위원회’는 23일 오전 김태영 국방장관과 윤덕용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장, 국방부 박정이 공동단장(중장) 등 천안함민군합동조사단 소속 위원 40여명 등을 천안함 거짓 조사결과 발표로 고발했다.
운동본부는 고발장에서 “피고발인들은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의 어뢰 공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사 결과를 거짓으로 꾸미고, 거기에 동조하여 많은 국민들과 언론사에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대통령에게도 허위로 보고를 하여 결과적으로 남북 관계가 군사적 충돌 위험에까지 놓이게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고발이유를 밝혔다.
이날 고발장을 접수한 리인수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전 대표는 이번 고발배경으로 “운동본부는 천안함 관련 허위사실 유포로 보수단체에 고발당했지만 검찰은 허위사실은 조사하지 않고 오히려 제가 수십년 동안 몸담은 단체의 내용을 조사했다. 우리는 뭐가 허위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천안함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해 어뢰 사진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 운동본부는 “쌍끌이 어선의 선장(김남식)은 어뢰를 건져 올린 후에 연락을 해서 촬영팀이 도착해 그 장면을 촬영을 한 후 절차를 거쳐 모포로 어뢰를 포장하여 자신들이 육지까지 옮겼다고 5월 20일 기자 회견장에서 발표했다”며 “합동조사단이 제시한 사진을 보면 바닷물로 그물을 투입하는 장면과 막 건져 올린 장면이 이미 찍혀 있다. 선장의 말대로라면 그런 장면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리인수 전 대표는 2장의 사진을 비교하며 “지난 5월 15일 군경이 쌍끌이 어선에서 건져 올린 어뢰와 5월 20일 민군합조단이 기자회견장에 어뢰라고 가져다 놓은 것은 서로 다른 2개의 어뢰”라며 “2개의 어뢰는 이미 천안함 사건 전에 해군이 가지고 있던 어뢰라 판단된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고발장에서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은박지가 붙은 부분 가운데 개방되어 있는 4각형 모양이 다르다. 그리고 어뢰의 축 모양·손상 정도도 다르다. 이것은 달리 말해 국방부에 보관하고 있는 어뢰가 적어도 두 개 이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며 “15일 바다 속에서 건져 올렸다는 어뢰에 미리 은박지를 가려 놓은 이유도 적혀 있지 않은 부분이 사진 촬영 과정에서 찍힐까봐 가렸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두 개의 어뢰가 다를 수 없고, 굳이 같은 어뢰라면 은박지로 그 부분만 가려 놓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리인수 전 대표도 “두 개의 어뢰 추진체를 해군이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5월 15일 발견 당시 사진 속의 은박지다. 폭발한 어뢰에 어떻게 은박지가 남아 있는지부터 의문이지만, 은박지를 씌워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다. 1번은 여기에는 없는데 1번을 위장하기 위해 은박지를 씌웠고 스카치테잎으로 발라 놨다. 이걸 평택기지에 가져가서 그때 1번을 발견했다는 데 이 어뢰가 조작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20일 날 공개한 어뢰와 15일 건진 어뢰가 다르다”고 강조했다.
운동본부는 고발장에서 “합조단은 사건발생 29일 만에(4월 26일) 인양된 천안함 함수의 철 부식 정도와 어뢰의 부식 정도가 비슷하다고 했지만 이는 그 어뢰가 천안함을 공격한 것임을 끼어 맞추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며 “합조단이 이 부분을 과학적으로 조사를 하지 않고 대충 눈으로 보고 천안함 함수와 건져 올린 어뢰 부속의 부식 정도가 비슷해 보인다고 발표한 것은 천안함 침몰과 수거했다고 주장하는 어뢰를 억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금속 전문가들에게 과학적으로 정밀한 조사를 의뢰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 운동본부는 고발장에서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은박지가 붙은 부분 가운데 개방되어 있는 4각형 모양이 다르다. 그리고 어뢰의 축 모양·손상 정도도 다르다. 이것은 달리 말해 국방부에 보관하고 있는 어뢰가 적어도 두 개 이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했다.
운동본부는 “수거했다는 어뢰 부속품들의 출처는 조작되었다”며 “어뢰 부속품들을 수거할 때 찍었다는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미리 연습되고 연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운동본부는 “쌍끌이 어선의 선장(김남식)은 어뢰를 건져 올린 후에 연락을 해서 촬영팀이 도착해 그 장면을 촬영을 한 후 절차를 거쳐 모포로 어뢰를 포장하여 자신들이 육지까지 옮겼다고 5월 20일 기자 회견장에서 발표했다”며 “합동조사단이 제시한 사진을 보면 바닷물로 그물을 투입하는 장면과 막 건져 올린 장면이 이미 찍혀 있다. 선장의 말대로라면 그런 장면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와 관련하여 합동조사단은 선장의 말을 부인하면서, 처음부터 어선에 타고 있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조사단은 그날 어뢰가 발견될지 미리 알았다는 이야기가 된다“며 ”이처럼 선장과 합동조사단의 주장이 다른 것은, 어뢰를 건져 올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미리 말을 맞추었으나 기자회견장에서는 서로 말이 엇갈린 것이다. 따라서 이는 어뢰의 출처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 “합동조사단은 어뢰를 감식하기도 전에 그 어뢰 안속의 상태를 미리 알고 있었음을 판단할 수 있다. 은박지로 가려 놓고 사진을 찍은 것이 바로 그 증거”라며 “은박지를 가린 사람이 합동조사단이 아니라면 그 역시 앞뒤가 맞지 않다. 폭발한 어뢰에 은박지가 그대로 붙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합조단은 어뢰 속에 ‘1번’이라는 글자를 평택해군사령부로 옮겨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이 어뢰는 5월 15일 전에 이미 존재한 어뢰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구조된 승조원 ‘뽀송뽀송’ 했다
법정에 선 해경 501경비함 부함장의 두 얼굴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1-08-28)
그림은 백령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군 살보함이다. 눈여겨 봐 두시기 바란다. |
없던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면 그럴듯한 소설이 된다.
그건 문학세계에서 가능한 ‘개연성’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없던 사실을 있는 것처럼 ‘허위증언’을 하면 어떻게 될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소설은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실제하는 상황처럼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또 그러한 상황은 현재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과 부합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이런 상황을 잘 엮어서 시나리오로 만들고 연출하여 시청자 내지 관객들을 소설 속에서 설정한 시츄에이션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바보상자’ 앞에서 히죽거리거나 찌질대는 이유도 다 그 속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특히 드라마를 좋아하는 여성들은 가상현실이 쏟아내는 개연성에 거의 목숨을 걸 정도다.
그러나…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러나… 법정에서는 이런 감성적이고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용납하지 않는다. 법정은 철저히 이성적이며 사실을 요구하는 냉혹한 장소이다. 소설을 쓰는 등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으면 “그건… 니 생각일 뿐이고….”라며 딱 잘라 거부한다. 사실만 말하되 거짓을 말하면 위증에 대한 처벌을 받겠노라고 선서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왜?…. 원고와 피고 또는 증인 등이 없던 사실을 꾸며내는 소설을 쓴다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특정인에 의해 무고당하는 등 피해를 입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사실만을 말해야 하며 애시당초 ‘없던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 사건을 조작질하면 엄벌에 처하게 된다. 특히 상대방을 거짓으로 무고하면 법정 구속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의 개연성과 법정의 냉혹함은 이렇듯 엄격하게 구분되는 곳이다. 최소한 초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쯤 다 안다. 우리 사회가 지탱되고 있는 힘은 이렇듯 법치국가에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법(法)’을 만들어 놓고 시민들로 하여금 지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조치다. 지난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본격적으로 속개된 천안함 침몰사건 재판에서도 이 같은 요식절차는 분명히 진행되고 있었다.
천안함 침몰사건 관련 포스트에서 구조활동에 나선 해상 크레인이다. 눈여겨 봐 두시기 바란다 |
“법정에서 증인의 신분이 되면 어떤 기분이 들게 될까.
또 증인의 증언 전부를 사실로 믿어도 될까.”
일찌감치 증인 선서를 해야 할 ‘해경 501경비함 부함장’ 유종철 증인은 참 늦게도 법정에 등장했다. 재판부는 그가 등장하지 않아 다음 기일에 그를 다시 출두시킬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천안함 인양 문제와 관련한 박규창(당시 해군본부 군수참모부 수송과장) 증인의 증언이 끝날 시점 유종철이 등장하여 재판 시간은 오후 6시 30분까지 길게 이어졌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했지만 유종철은 증언을 위해 두툼한 수첩(다이어리)를 들고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재판 절차에 따라 증인선서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다음, 우리 국민들을 패닉 상태에 몰아넣었던 천안함 침몰사고 당시를 변호인 측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했다. 이날 유종철이 질문에 답한 내용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는 꽤 오래된 1년 5개월여의 과거에 있었던 천안함 침몰사건을 수첩을 들여다보며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변호인 측 등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었다. 그는 소설과 사실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 현장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한다.
유종철은 증언을 할 때 매우 신중했다. 그는 스스로의 기억력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모습처럼, 그의 기억력 바깥에 있는 사실은 대부분 수첩 속에 스크랩해 둔 관련 보도 내용 등을 참고로 답했다. 유종철은 그 때문에 위증죄를 받거나 천안함의 진실이 다시 쓰여진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 내용 일부를 <천안함, 해경 501경비함 ‘송곳 증언’의 진실>에 담아 여러분들께 공개한 바 있다. 당시 첫머리에 복선을 깔았었다. “법정에서 증인의 신분이 되면 어떤 기분이 들게 될까. 또 증인의 증언 전부를 사실로 믿어도 될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포스트는 작성됐다.
천안함 침몰사건에 등장하는 해상크레인은 눈여겨 봐 둬야 한다. 천안함의 진실을 밝히는 단초가 된다. |
포스트는 ‘송곳 증언의 진실’을 담았지만 반드시 증인의 증언이 사실(Fact)가 아니라는 것쯤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감동한 사실도 있다. 그러나 문제점도 동시에 드러나고 있었다. 글쓴이는 그 포스트를 공개한 이후 유종철의 증언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검증하는 수순에 착수했다. 이틀의 시간이 다시 지났다. 유종철의 증언에서 매우 중요한 단초가 발견됐는데, 그건 유종철이 없던 사실을 꾸며댄 내용에 따라 천안함 침몰사건이 급반전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판단되기도 한다. 그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공개하기로 하고 본 포스트에서는 유종철이 천안함 구조활동에서 목격한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한 그대로 그려보고자 한다.
증인 유종철이 법정에서 밝힌 승조원 구조 당시의 상황
유종철은 자신이 증언한 ‘천안함 침몰 좌표’를 향해 약 42분간의 항해 끝에 천안함이 침몰하고 있던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는 구조를 기다리는 천안함 승조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 함수 쪽 함교 근처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현장에 도착할 당시 이미 해군의 <고속단정, PKM>이 도착해 있었고, 고속단정 수는 처음 4~5척 정도였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다시 3~4척 정도라고 고쳐 말했다. 천안함의 침몰현장에는 그 외 다른 함정은 없었고 헬리콥터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변호인 측은 고속단정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물었는데 그들은 (구조활동 대신) 천안함 주변에서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빙빙 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말 빙빙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먼저 도착한 고속정이라면 우선 생존 승조원들의 구조활동에 들어가야 마땅했지만, 그들은 해경 501경비함이 도착할 때까지 천안함 주변을 빙빙 돌며 한시라도 구조가 급박한 생존자들을 약 올리고 있었단 말인가.
변호인 측은 유종철에게 맨 처음 천안함이 침몰된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화약냄새를 맡았나. 못 맡았다. 기름냄새는 맡았나. 못 맡았다. 그러나 유종철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니부보트(해경 501경비함이 구조를 위해 내린 보트)’를 탄 사람(승조원)으로부터 “기름냄새를 조금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을 했다. 그래서 변호인 측은 다시 기름냄새의 정도는 어떠했나를 물었지만 유종철은 “신경 못 썼다”고 답했다. 그리고 “물고기 떼 본 적 있나”라는 변호인 측 심문에 대해 “없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시 변호인 측 심문이 이어졌다. (구조된) 승조원 등이 물고기 떼 본 적 있는가 하는 질문에 유종철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짧게 답했다.
천안함 침몰사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며 변호인 측의 이런 질문이 무슨 답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친정부 합조단이 천안함의 침몰원인 조사발표를 <북한의 폭침에 의한 사건>으로 조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건의 침몰원인을 조작질하는 수법으로 <천안함 피격사건>이라는 소설을 써서, 백서라는 과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배포한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자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조작질 속에는 <1번 어뢰>가 등장하고 있는데 신출귀몰했던 1번 어뢰는 수평버블제트를 일으키며 천안함을 두 동강 냈다는 줄거리 등이다. 말 그대로 소설을 써 댄 곳이 군 당국과 이명박 정권이었다.
그러나 일반의 의혹은 이명박 정권의 조작질에 대해 일찌감치 거짓말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친정부 합조단의 조사발표에 따르면 약 350kg의 화약이 장착된 어뢰가 폭발했다고 하는 데 어뢰폭발로 인한 현상이 전무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뢰가 폭발할 당시 반드시 동반해야 할 물기둥의 존재 내지 어뢰 폭발로 인해 백령도 앞바다에 ‘물 반 고기 반’으로 있던 까나리들의 떼죽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까~나리들….) 또 어떻게 된 어뢰는 천안함이 적재하고 있던 기름탱크의 기름조차 그대로 보관(?)한 친환경 어뢰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어뢰가 폭발했는 데 천안함 속에 있던 형광등이 멀쩡하게 발견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폭발이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변호인 측은 유종철 증인에게 그런 사실 등을 캐묻고 있었던 것이며, 친정부 합조단의 조작질을 확인해 보기 위한 심문이었다.
해경 501경비함 부함장 유종철 증인의 생존적 갈등
그리고 1번 어뢰의 존재 유무를 밝혀줄 결정적인 심문이 이어졌는데 유종철은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겪어야 했던 생존적 갈등 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테면 진실과 거짓 소설과 사실 앞에서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안될 시츄에이션 앞에서 고뇌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유종철은 3월 26일 오후 9시 34분, 해경의 긴급구조 출동 지시를 받은 직후 대청도와 소청도 중간 해역에서 피항 중이었다가 오후 9시 35분에 출동하여 오후 10시 15분에 도착하여 니부(구명단정)로 구조 작전을 개시했다. 구조 작전은 오후 11시 35분까지 ‘약 1시간 남짓 이루어졌다’고 증언했다. 유종철은 구조 당시 승조원들의 차림새를 묻는 변호인 측의 심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장병들의 옷이 젖은 사람이 없었다. 화상이나 찰과상을 입은 장병들이 없었다. 부상자들이 몇 명 있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다만, 1차적으로 구조한 7명 중 1명을 참수리호로 인계했다. 후송조치 했다는데 보지 못했다. 그는 혼자 거동하기 힘들어서 다음날(3월 27일) 오전(05시 50분) 참수리호로 전부 인계하는 이유가 됐다. 그동안 생존자 55명은 6시간 동안 ‘501함’에 있었는데 부상자 파악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다. 경상자도 별로 없었다. 비상약품으로 찰과상 등을 치료한 바 있다.”
해경 501경비함 부함장 유종철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조된 천안함 생존자들은 모두 ‘뽀송뽀송’한 모습이며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1명을 제외하면 다수 생존자들은 외상이 거의 전무했다는 증언이다. 천안함에 폭발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 증언이다. 이러한 증언의 신빙성을 더해 준 것은 해경 501경비함의 구조 때문이기도 했다. 해경 501경비함은 1978년 12월에 건조된 500톤급의 선령 30년 된 노후된 경비함이었다. 배의 길이는 60.8m에 폭은 8m며 최고 속력은 시속 25노트(kts)였지만, 승조원 구조 당시 속력은 17노트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무엇보다 승조원의 구조 당시 상태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중요한 501함의 구조는 함정에 비치된 작은 공간이었다. 501경비함에는 천안함에서 구조된 승조원들을 ‘식당과 사관실’ 두 군데에 분산 배치해 놓고 있었는데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 보니 구조된 승조원들의 모습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종철은 그 상황을 법정 내부 모습 같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빤히 관찰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그는 승조원 구조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번에는 수첩을 보지 않고도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의 증언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에 의해 폭침된 흔적이 없다는 사실 내지 정황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던 셈이다.
검찰 측의 반격이 무색했던 유종철의 증언
이런 증언을 숨죽이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던 검찰 측의 반격(?)이 이어졌다. 검찰 측은 유종철의 증언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판단하며, 해경 501함이 천안함 침몰 현장에 구조하러 갈 당시 4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 점을 언급하고, 그때 쯤 물고기들은 (조류)에 다 떠내려갔지 않느냐는 취지로 반대 심문에 들어갔다. 따라서 유종철이 기름냄새를 맡을 시간이 없었지 않으냐고 되물으니 증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화약냄새를 맡았다고 하는 ‘승조원들의 말을 들은 적 없다’고 증언했으며, 죽은 물고기 떼와 관련하여 “어두워서 확인할 수 있는 경황이 아니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증인이 도착했을 때 “그런 냄새(화약냄새나 기름냄새)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침몰현장에서 승조원 구조활동을 펼쳤던 해경 501경비함 모습. 부함장의 명운을 가르는 듯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이다. |
즉, 유종철이 증언한 사실은 그가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을 뿐, 생존자 누구한테로부터 들은 사실이 없었던 자의적 판단이었다. 증인은 변호인 측과 검찰 측의 심문에 갈등을 하며 매우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유종철의 증언이 끝날 때까지 유종철이 증언한 천안함의 침몰좌표 등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었다. 유종철은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생존적 갈등을 겪으며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며 결정적인 오점을 남기며 증언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가 법정에서 증언으로 남긴 천안함의 침몰좌표 때문에 천안함의 진실은 급물살을 타며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천안함의 침몰좌표는 거짓 증언이 될 개연성이 매우 커 보여 사실 확인을 해 봤다.
유종철의 증언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니 다시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유종철이 남긴 결정적 오점이자 천안함의 진실을 매우 간결하게 표현해 줄 단초가, 유종철의 위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인지할 시점이면, 진검승부 재판에서 목이 댕강~달아난 이후 찰나의 순간이겠지. 어쩌면 화가 날 정도로 무식해 보였던 박규창의 증언과 달리, 수첩을 펴 놓고 차분히 증언에 임하며 능수능란해 보였던 유종철이 맨 먼저 위증죄를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소설과 달리 법정에서는 ‘없던 사실을 조작하여 있는 것처럼 허위사실을 말하면 안 되는 까닭이다. 또 공직에 있거나 나라를 지키는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해경과 해군 등이 한 패거리가 되어 국민들을 기망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음번 포스팅 엄~청 기대해도 좋다. 천안함 침몰사건의 대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꿈꾸는 그곳
완전침몰했다는 천안함 버젓이 떠있었다
버젓이 떠있던 천안함,
군은 왜 ‘완전침몰’이라고 했나
[신상철 재판 후기②] 첫 증인심문으로 새로이 드러난 사실들
(민중의소리 / 신상철 / 2011-08-28)
천안함 첫 재판 피고인 모두진술 프리젠테이션에 이어 증인심문이 열렸습니다. 본격 재판 전 네 차례나 가진 준비기일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은 56명의 증인에 대하여 합의한 바 있습니다. 그중에는 검찰 측 증인 혹은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양측 공통 증인으로 명단에 오른 인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애초 변호인 측은 80여 명의 증인을 신청하였습니다.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각각의 상황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봐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수백 명을 불러도 모자랄 만큼 이 사건은 폭이 넓고도 깊은 사건입니다. 그 명단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줄여서 80여 명이었는데 준비기일 과정에서 56명으로 줄여서 합의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증인으로 나와야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에 그런 경우 재판 진행 중 새로운 증인이 추가로 요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안함 사고 후 최초 구조를 맡았던 501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사고당사자인 천안함 함장(부장), 해경501함을 현장급파를 명령한 본청 경비과장, 구조 당사자인 501함 함장(부함장), 501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고속정(참수리) 정장, RIB를 타고 천안함에 접근하여 구조를 맡았던 해경대원 등의 증언을 듣고 복합적으로 판단해야 비교적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터인데 실제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은 501함 부함장뿐이었습니다. (천안함 함장과 몇몇 증인 채택된 장교는 모든 정황과 관련된 포괄적 증인임)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엔 재판부가 허락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판을 무한정 길게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에서 증인의 수를 제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와 관련해서 재판부, 검찰, 변호인의 협의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재판을 시작하고 보니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첫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한 해군 군수참모부 박규창 수송과장과 해경 501함 유종철 부함장의 증언 내용과 관련 제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고자 합니다.
박규창 수송과장의 증언으로 밝혀진 사실
천안함 사고가 발생하자 해군은 <동보>를 통해 그 사실을 모든 예하부대 소속 대원들에게 알렸으며 원대 복귀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동보는 실제상황 발생 등 긴급상황인 경우 자동 전송시스템에 의하여 사고내용과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알림체계인 것 같습니다. 박 과장은 동보를 받고 즉시 전화를 하여 <천안함 침몰>사실에 대하여 확인하였다고 증언합니다.
▲ 신상철 대표는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서프라이즈’에 올려온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만이 안타깝게 죽어간 46명 장병과 한준호 준위의 죽음을 헛되이 않는 일이고 제2의 천안함 사태를 막는 길”이라고 밝혔다. ⓒ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사고 당일 박 과장은 서울 출장 중이었으며 <동보>에서 원대복귀를 알리는 데도 즉각 귀대하지 않고 다음 날 오후까지 출장일을 마무리하고 귀대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해군 수뇌부 및 명령체계에서의 판단으로 당시 상황이 위급하거나 급박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합참의장이 KTX로 서울에 올라와서 상황을 둘러보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취침을 취했던 정황 역시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군 군수참모부는 부내 어느 과에서 이 사건을 맡을지에 대해 내부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박 과장은 증언합니다. 군수참모부 내 함정정비과와 수송과 중 누가 맡을 것인지 논쟁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논의결과 수송과에서 맡게 되었고 그 이유는 예산문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렇지만, 함정의 구조·인양의 문제를 누가 맡을 것인가 논의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함정을 잘 아는> 부서와 전문가들이 맡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해병대 소속 영관급 장교가 책임자로 있으며 차량수송만 담당했다는 수송과에서 수십 명의 대원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간 1200톤급 전함의 구조인양의 책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수송과에서 예산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송과에서 맡았다는 것은 대형 해난사고의 성격과 구조적합성, 전문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인양의 책임을 맡게 된 수송과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대형크레인을 가진 업체들이 어떤 업체들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크레인>이라고 처넣으니 여러 업체들이 올라왔고 하나씩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대형사고가 발생했는데, 업체마다 전화해서 크레인 사용 가능한지 묻고, 바쁘다고 하면 또 다른 업체에 전화해서 묻고…. 그렇게 보낸 시간도 시간이지만, <위기관리체계의 실종>이 따로 없습니다. 해군에서 수많은 함선을 운용하면서 물속으로 함선이 들어갈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어도 전혀 지켜지지도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박규창 증인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증언을 듣고 보니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분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니고,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차량 수송 업무만 맡고 있다고 졸지에 침몰된 함선의 인양업무를 맡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해군의 부실한 위기관리체계입니다. 매뉴얼이 없었다는 것, 있어도 제대로 숙지되거나 훈련되지 않았다는 것. 최소한 어떤 부서에서 맡아서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 인양과 구조를 늦추는 결과로 귀착될 수밖에 없으니 대가치고는 너무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종철 501 부함장의 증언으로 드러난 사실
천안함 사고 순간 해경 501함은 백령도 인근 근해에서 경비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본부로부터 <해군 초계함이 침몰하고 있다>며 급히 현장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는 전화가 왔고 501함은 사고지점을 향해 전속 기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략 40분 후 사고현장에 도착하자 해군 고속정(참수리) 서너 척이 천안함 함수 주위를 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종철 부함장은 최초 사고지점에 대하여 본부에서 좌표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위도·경도로 표시된 좌표가 아닌 <백령도 서남쪽 1.8마일 해상>으로 통보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한 상황은 통상 있을 수 있습니다. 해경 본청에서 정확한 좌표를 확인한 후 그 내용을 공문으로 작성하여 전문으로 보낸다고 가정하면 문서작성과 결재 등으로 인해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므로 긴급히 전화로 출동을 지시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좌표 또한 대략적인 좌표 - 백령도 서남 1.8마일 해상 - 이라고 통보하고 일단 기동한 후 도착까지 수십 분이 걸리기 때문에 가는 동안 정확한 좌표를 불러주거나 전문을 보내는 것 또한 긴급한 초동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잘한 일입니다. 해상에서는 수 km 떨어져 있어도 육안으로 혹은 레이더로 물체들이 잡히기 때문에 도착하기 전까지 정확한 위치가 확보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유종철 부함장은 사고지점으로 가는 동안 중요한 전문을 받습니다. <천안함이 좌초되었다>고 적시한 전문을 받은 것입니다. 그동안 해경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하여 혹은 해경 내부 문서에 기록된 ‘좌초’ 표기에 대하여 보도된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사고 당일 사고지점으로 향하는 구조선에 <사고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법정에서 증인에 의해 증언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큰 것입니다.
수십 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오는 대형사고를 당한 당사자들이 구조를 요청하면서 사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 <거대한 폭발>이 존재했다면 그로 인해 인체가 입었을 손상에 대응하고 응급조치를 위한 준비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보고하고, 통보하고, 응급치료체계를 갖추는 등의 조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고를 당한 당사자들 중 사고의 내용을 보고한 사람들이나, 그 보고를 들은 사람, 구조를 요청한 사람, 구조를 지시한 사람 모두 <거대한 폭발>과 그러한 폭발로 인한 신체적 손상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 <좌초하였다>는 전문과 유종철 부함장의 증언을 통해 충분히 인지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입니다.
▲ 천안함 함수 발견 관련 PPT.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
또 한 가지 밝혀진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는 군의 고의적인 구조 회피 행위입니다.
저는 그동안 사고 9시간 후인 익일 오전 7시30분경 백령도 용트림 바위 앞 해상에서 천안함 함수가 발견되었고, 그 주변을 해경253호정이 배회하며 천안함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군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함수를 지키던 해경은 조용히 철수하고 천안함 함수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습니다.
제가 주장했던 내용 전부는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다만 유종철 부함장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은 익일 오전 7시30분 천안함 함수가 해경 253호정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 전날 사고순간부터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그동안 단 한 번도 알려진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천안함 함수가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전히 가라앉았다고 보도했던 대부분의 기사내용과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실인 것입니다.
유 부함장은 증언합니다. 천안함 함수에서 생존자들을 모두 구조하고 해군 참수리에 모두 인계를 한 시간이 새벽 5시20분 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오전 7시10분경까지 천안함 함수가 폭으로 5~10m 정도 물 위에 떠 있는 상태 그대로 있었으며, 해경 501함은 새로운 임무로 그 자리를 떠났으며 다른 해경정(253호정)이 그곳을 인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경 501이나 253은 그 사실을 분명 본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행동했을 것이고, 해경은 해군과 국방부에 보고했을 것이니 정부와 국방부는 사고가 난 이후 상당한 시간 동안 천안함 함수가 현장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오전 오후 브리핑을 통해 완전히 침몰했고 계속 수색 중이라는 거짓 브리핑을 합니다.
유 부함장은 자신이 현장을 떠나고 난 이후 상당시간 함수가 떠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현장을 지키던 해경은 함수에 부표를 설치하여 위치를 확보하지 않았습니다. 군과 정부는 그 사실을 묵살하였습니다. 또한 무슨 이유인지 현장을 지키던 해경253호도 조용히 사라져 버립니다. 이후 함수는 물속을 가라앉았으며 어느 어선 선장이 발견했다고 발표될 때까지 24시간 이상을 <실종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사전 준비기일에 합의되고 채택된 증인은 아니지만 해경253호정 정장은 새로운 증인으로 채택되고 증인석에 서서 그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보고를 받았을 해경본부의 당직 사령, 그 보고를 받은 국방부 담당자, 그리고 그것을 알고도 묵살하고 해경에 조용히 철수하라고 지시했을 국방부 책임자는 반드시 법정에 서야 할 것입니다.
천안함 재판은 그렇게 진실의 고리를 하나씩 연결하고 이어가며 정부와 군이 저지른 조작과 왜곡의 실체가 모두 드러날 때까지 강물이 흐르듯 도도히 흘러갈 것입니다.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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