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사막을 떠도는 풀

道雨 2021. 3. 5. 10:09

사막을 떠도는 풀

 

예상치 못한 일로 상처를 입었을 때나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 부재(不在)로 가득한 사막을 떠도는 회전초들을 떠올리며 나는 시간을 추스르기도 한다. 황금빛 검불로 사막을 굴러다니는 그들은 식물의 자서전이 아니라 어떤 성자의 혼이 생명의 경전을 써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애쓰지 마라’(Don’t try)

현대 미국 시인 중에 서점에서 시집이 제일 많이 도난당하는 인기 시인, 노동자 출신으로 숱한 삶의 역경을 치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은 시인 찰스 부코스키(1920~1994)의 묘비명이다.

 

요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을 때, 치매에 걸렸다는 친구, 혹은 실버타운에 입주했다는 선배의 소식 같은 것을 전해들을 때면 나는 나에게 이 말을 들려주곤 한다.

 

언젠가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는 그의 시구를 나의 시에 인용한 적도 있지만, 찰스 부코스키의 시는 거침없이 정곡을 찌른다. 지식의 문장으로 돌려 말하거나 정서적인 수사를 극히 기피하는 그의 시는, 그래서인지 죽은 지 30년이 가까워 오는 오늘 읽어도 펄펄 살아 경주말처럼 위험하게 뛰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 이놈의 나라가/ 사오십 년은/ 퇴보했구나/ 사회적 진보도/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호감도/ 모두 멀리멀리/ 쓸려 갔구나/ 그리고 진부하고/ 케케묵은/ 편협함이/ 자리 잡았구나// 우리는/ 어느 때보다/ 이기적인 권력욕에/ 약하고/ 늙고/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향한/ 멸시에 젖어 있다// 우리는 결핍을 전쟁으로/ 구원을 노예제로/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성취한 것을/ 낭비하고/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폭탄을 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지옥살이/ 그리고 우리의/ 수치.// 이제/ 우리는/ 크나큰 슬픔의/ 손아귀 안에서/ 숨통이/ 막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다.”

그의 시 ‘부패’의 전문이다. 정치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만 알고 있던 미국도 시인의 눈에 이렇게 비친 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며 오늘날 한국의 현실을 바로 떠올린다면 그는 소위 보수인가? 아니, 이 시를 읽으며 이 시가 실린 신문의 색깔이나 인용한 사람을 블랙 혹은 화이트리스트 등으로 분류하려 한다면 그는 진보인가. 좌파인가 우파인가?

나는 잠시 멍해진다. 흑백과 좌우, 내 편 네 편뿐인 시대에 글을 쓰며 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온통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현실을 언어로 투시할 힘이 미약해서인가. 분명한 것은 이렇듯 편이나 색깔을 가르다 보면 창의성은 결코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내가 찾은 골목’이라는 시를 통해서, 나는 일찍이 이 땅에 남자로 태어나지 못하고, 피케이(PK)도 티케이(TK)도 아니고 케이에스(KS)도 못 되는 주변부 떠돌이로서의 존재를 노래한 적이 있다. 시인으로서 골목대장들과 패거리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자유로이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인데, 지금 읽어도 쓸쓸한 시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내가 찾은 골목’을 떠나 광활한 사막을 떠올리고 있다. 역병의 시대, 불안한 현실의 고통과 고립 때문일 것이다.

사막은 폐허와 죽음의 이미지이지만, 기실 신비한 은유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뿌리 없이 떠도는 마른 검불 덩어리 회전초(回轉草)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텀블위드(Tumbleweed)라는 이 떠돌이 풀들이 몸을 둥글게 말아가지고 사막을 굴러다니는 모습은 놀랍도록 강렬하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일 년에 한두 번 사막에 비가 내리면, 그 자리에 얼른 씨를 뿌려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이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로 상처를 입었을 때나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 부재(不在)로 가득한 사막을 떠도는 회전초들을 떠올리며 나는 시간을 추스르기도 한다. 황금빛 검불로 사막을 굴러다니는 그들은 식물의 자서전이 아니라 어떤 성자의 혼이 생명의 경전을 써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다.

 

뉴멕시코 사막 어디 붉은 땅에 산다는 이상한 새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이 새들 역시 회전초처럼 사막을 떠도는 새들인데, 어쩌다가 비가 내리면 일제히 날아와 사막에 파인 물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시고, 다시 먼 허공을 날 수 있는 생명력을 얻는다고 한다.

수많은 새들이 사막의 웅덩이에 모여들어 물을 마시는 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대놓고 비가 오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새 연구가들을 소개하는 글을 읽으며, 여기 진짜 시인이 있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최근 한 계간지의 초대로 젊은 시인과 ‘팬데믹 이후의 문학: 동시성과 고립의 감각들’이라는 제목으로 대담을 했다.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작가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떤 새로운 문학이 태어날 것인가를 질문해 보는 대담이었다.

진정한 고독을 잃어버린 시대, 고립만 성행하는 시대에, 뉴노멀과 언택트라는 조어의 등장과 함께 대전환기를 맞고 있는 사회문화적 현상도 주목해 보았다. 특히 이념, 지역, 세대, 젠더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자연 파괴와 환경의 문제가 새로운 문학의 주제가 될 것이라는 것에도 공감했다.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문제작들이 팬데믹 공포 속에서 태어난 것을 상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었다. 흑사병이 돌자 남녀 10명이 고립된 상태에서 나눈 이야기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아닌가. 20세기 초 카뮈의 유명한 소설 <페스트> 또한 전염병을 배경으로 태어난 작품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찰스 부코스키의 어조를 빌려 말하자면 “새로운 한 줄 한 줄은 각자가 출발점이며, 앞서 나간 어느 줄과도 무관하다. 우리 모두는 매번 새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게 거룩한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애쓰지 마라!… 당신 안에 있는 태양이/ 당신 내부에서 타오르지 않는다면…”.

 

어떤 고통의 시대가 오건 어떤 질병의 시대가 오건, 내가 찾은 골목이건 사막이건, 모든 시간은 새것이고 결국 나는 나다. 나는 늘 새로 이어가는 생명이다.

찰스 부코스키는 억지로 시를 만들려고 ‘애쓰지 마라’ 했지만, 나는 나에게 무상과 무위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생명의지를 북돋는 의미로 이 말을 들려준다.

 

사막을 굴러다니다가 비가 오면 얼른 그 자리에 씨를 퍼뜨리는 풀, 사막의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시러 오는 새들을 기다리는 새 연구가가 있는 지상은 아름답다. 그 어떤 질병이나 혹은 상상력 없는 편협함으로 오염시키기에는, 생명은 황홀하고 시간은 준엄하다.

축복은 고통의 보자기에 싸여 올 때가 많다고 한다. 어떤 축복을 주려고 이렇듯 고통과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일까. 사막을 온몸으로 굴러가는 풀들을 자꾸 떠올려 본다.

 

문정희ㅣ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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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5450.html#csidxd01fef00baf2d9a9efeaae312e2e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