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공화국’의 짙은 그늘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우리는 대개 ‘선진국’이라는 용어를 구미권 국가들에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산업혁명 이전 세계에서는 동아시아야말로 선진권이었다. 종이나 금속활자, 화약, 그리고 로켓과 지폐 등 주요 발명품들을 독점했던 것부터 그 선진성의 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선진성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한나라에서 기원전 134년부터 시작되고, 신라가 788년에 독서삼품과의 형태로 수용한 시험을 통한 공무원 등용 제도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시행되지 않았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인 비잔티움이나 아랍 칼리파국, 아니면 사산왕조 등에서 공무원 등용은 주로 집안의 신분이나 인맥으로 이뤄졌지만,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보다 객관적인 등용·고과 기준을 도입했다.
그에 비해 유럽의 시험제는 한참 후발이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은 유럽에서 최초로 1219년 학위취득 시험 제도를 정비했지만, 그건 필기시험도 아닌 구두시험이었다. 유럽 대학에서 최초의 필기고사는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도입돼 18세기에 일반화한다.
공무원 등용 시험은 유럽에서 프로이센이 1748년 최초로 도입했는데, 당시 참고 모델이 바로 계몽기의 유럽인들이 흠모했던 청나라의 과거제였다.
고려에서 958년 과거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이후, 한국 땅에서 시험을 통한 인재 선발이 중단된 시기는 거의 없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의정부의 전고국, 문관전고소 등 신식 과목 위주의 공무원 시험을 주관하는 부서들이 곧 생겼다.
일제도 일본 내지에서 시행 중인 공무원 시험제를, 조선인 엘리트 포섭 차원에서 그들에게 개방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385명이 보통문관시험에, 134명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이들 대부분은 조선총독부 등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이들은 차후 대한민국 공무원 집단의 골간을 이룬다. 일제 시절 문관시험제는 1949년 고등고시령이 제정됐을 때 그 기본 준거틀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공무원 시험제는 그 시작부터 식민지적 과거와의 단절보다 지속성이 더 짙었던 셈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시험공화국’이다. 만 3살 아이들이 레벨테스트를 거쳐 영어유치원에 들어간다. 세계에서 3살 유아가 입시를 보는 나라는 과연 한국 말고 있을까?
한국인의 각종 시험 응시는 초로의 나이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공무원시험 합격자 통계를 보면, 간혹 50대 합격자들이 눈에 띈다. 즉, 한국인이라면 인생주기 대부분을 시험 준비와 함께 보낼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학교수 신분의 신격화 역시 ‘시험공화국’이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상당수 시험 출제 위원들도, 수험생이 봐야 하는 참고서들을 출판해 돈을 버는 이들도 바로 대학교수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시험이라는 통과의례를 운영·관리하는 극소수 엘리트와 시험 합격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다수로 양분된다. 물론 이 두 그룹 사이의 관계란 처음부터 평등할 리 만무하다.
시험으로 채용되고 승진하는 일본 경제관료들이 경제개발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일본 공직사회를 연구한 차머스 존슨(1931~2010)이 ‘발전 국가’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
이후 많은 연구자가 한·일·중 내지 대만과 싱가포르의 능력주의적 관료제와 시험에 따른 채용·승진 심사를 찬탄했다. 오로지 시험성적으로 뽑히고, ‘개천에서 난 용’, 즉 빈한한 환경에서 자란 자수성가형 인재까지 포함한 관료조직이 기득권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일 수 있으며, 그만큼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찬사의 골격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학자들도 공유하는 이 ‘동아시아의 능력주의적 관료제’에 대한 호평은 물론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 시험제는 어떤 부작용이 있더라도 관직 매매나 인맥 채용, 아니면 정파적 이해관계에 의한 정략적 ‘관직 나눠먹기’ 등에 비해 그야말로 선진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야당 지도자인 소년공 출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도래 이전 ‘시험공화국’의 능력주의적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시험을 통해 선발된 공무원들이 기득권이 아닌 공익만을 챙긴다는 이야기는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에는 더욱더 그렇다.
각종 시험을 통과해 드디어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이들 중에서, 기득권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찾기는 이제는 쉽지 않다. 지난해 전국 로스쿨 합격자의 54.2%가 스카이(SKY: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고, 스카이 재학생의 절반 이상은 연 1억원 이상 소득을 올리는 가정 출신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소년공도 부유한 가정 자녀들이 고가 사교육을 받아 명문대를 거쳐 고위직에 오르는 시스템에 끼어들기란 이제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재벌들 수사를 진행했던 검사들이 전관 변호사가 돼 재벌 대기업들에 영입되는 상황은, 능력주의처럼 보이는 시험제가 국가 조직의 사실상의 사유화를 전혀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시험공화국’은 공정한 적이 없으며, 공정할 수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 합격 여부는 응시자의 노력뿐 아니라, 그 가정이 가지고 있는 재력이나 문화자본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한데 이와 동시에 겉으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재 선발 방법으로 보이는 시험에 대한 맹신은,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헤게모니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시험 합격’으로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약자의 비극은 쉽게 ‘노력 부족’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험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란 그저 정규직 공채에 합격하지 못한 무능력자이고, 그에 대한 차별대우는 공정·능력주의 담론으로 정당화된다. 물론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정규직의 양산 그 자체가 이미 공정을 저버리는 행위지만 말이다.
유아기부터 노년까지 시험을 봐야 하는 곳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이용하는 능력주의 담론에 희생되는 약자들마저도 이 담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모순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시험 본위의 한국적 능력주의란 이젠 차별과 착취를 합리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는 게 사회적 통념이 돼야, 이 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진보도 가능해질 것이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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