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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사람들을 보듬다 : 김민기의 노래 이야기

道雨 2024. 3. 11. 12:16

낮은 사람들을 보듬다 : 김민기의 노래 이야기

 

 

 

장삼이사, 힘없는 이들 향한 한 시대의 기록

 

 

학전이 3월 15일 문을 닫는다. 재정난과 김민기 대표의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폐관을 결정했다. 대학로에 문을 연 지 33년 만의 일이다.

배울 학(學)에 밭 전(田), 학전은 말 그대로 ‘배우는 밭’이었다. 그래서 김민기는 학전을 ‘못자리’라 불렀다. 이곳에서 싹을 틔우고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라는 그의 생각대로, 학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학전을 거친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김광석의 콘서트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학전의 자랑이자 한국 공연문화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런 학전이 뒤안길로 사라진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오늘은 김민기의 노래 이야기다.

 

* 2018년 2월 26일 김민기 학전 대표가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학전블루소극장에서 열린 '2018 학전 신년회'에서 인사말을 하고있다. 2018.2.26. 연합뉴스

 

 

 

어깨동무하며 부르던 <아침이슬>

김민기 하면 <아침이슬>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이자 시대의 노래다. 1971년 발표와 함께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나, 1972년 김민기가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불렀다는 이유로, 다음 날 동대문서로 연행되고,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 및 판매 금지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묶였다. 수많은 금지곡 가운데 뚜렷한 이유 없이 금지곡으로 묶인 곡은 <아침이슬>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생명력은 굳세고 질겼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시위 현장에서, 각종 모임의 마지막에는 어깨동무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금지곡의 족쇄를 풀고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엄밀히 말하면 이 노래는 우리 품을 떠난 적이 없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에서 늘 함께했다. <아침이슬>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보듬으며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었다.

 

*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서울시청 앞 노제. 김민기는 이 자리에서 백만명의 군중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이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진 출처 : 6월항쟁 공식 홈페이지

 

https://youtu.be/8eofke_vpbs

* 독일 그립스 극단 단원들은 김민기가 베를린에 갔을 때, 그를 위해 독일어로 ‘Morgentau, 아침이슬’을 불렀다. 독일어 번역은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인 폴커 리트비히가 맡았다.

 

 


‘그의 시련’에서 ‘나의 시련’으로

무엇이 이 노래를 특별하게 했을까? 금지곡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는 단어로 이 곡의 마력을 다 설명할 수 없다.

2018년 JTBC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아침이슬> 탄생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반지하 미술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막히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아침이슬>은 그렇게 만든 노래였다.

처음에는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성자들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련”으로 썼으나, 그 이후가 풀리지 않고 막혔다. 이 대목을 “나의 시련”으로 바꾸니 술술 풀렸다고 회고한다.

이어지는 가사를 보면 “나 이제 가노라 /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 나 이제 가노라”로 시련을 딛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소 비장해 보이지만 타인이나 위인이 아니라 나의 시련, 나의 결의를 이야기하고 있어, 사람들은 노래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진주보다 더 고운’, ‘내 맘에 설움’, ‘아침 동산’, ‘작은 미소’처럼 동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낱말에 이어지는 ‘찌는 더위’, ‘나의 시련’, ‘거친 광야’는 고된 현실을 딛고 일어서자는 결의와 결단을 끌어낸다.

<아침이슬>의 매력은 바로 이 고뇌와 심리적 변화에 대한 듣는 이들의 공감에 기인한다. 굳이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걷어내도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난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이 노래가 못마땅했다. 1980년대 초 어느 날 또 수사기관에 끌려간 김민기에게, 수사관은 <아침이슬> 가사의 뜻을 물었다.

수사관의 풀이는 이랬다. ‘긴 밤’은 유신체제를, ‘태양’은 김일성 체제를 뜻한다며 “긴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을 맞이하자”는 노래 아니냐는 논리였다.

김민기는 “양희은은 1970년에, 나는 1971년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한 후, 10월 유신이 몇 연도였는지 되물었다. 수사관은 대답이 없었다 한다.

 

https://youtu.be/CmKj1HdSH04
김민기, ‘식구생각’

 

 

 

권력과의 불화 속에 만든 <식구생각>

김민기는 1974년 카투사로 입대해, 미군방송(AFKN)에서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보안부대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있었다. 그는 대뜸 “노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유신 반대 시위에서마다 그의 노래를 부르니 아예 포섭하려 했던 듯싶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식구생각>이었다.

신중현이 각하 찬양곡을 만들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면, 김민기는 그 시절 가난한 농촌의 일상을 아이의 눈으로 그렸다.

중정 요원은 “이거 안 되겠군” 한마디를 남겼다. 정권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노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

2. 미류나무 따라서 곧게 난 신작로 길 / 시커먼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고 달려가네 / 군인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 / 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

3. 이웃집 분이네는 무슨 잔치 벌였나 / 서울서 학교 댕긴다던 큰언니 오면 단가 뭐 / 돈 벌러간 울 언니는 무얼 하는지 / 엄마는 괜히 눈물 바람 아빠는 괜히 헛기침만

4. 겨울 가고 봄 오면 학교도 다시 간다는 데 / 송아지는 왜 판담 그까짓 학교 대순가 뭐 / 들판엔 꼬마애들 놀고 있는데 / 나도 나가서 뛰어놀까 구구단이나 외울까 말까”

 

 

국방부가 금지를 요청한 <늙은 군인의 노래>

결국 그는 영창에 보내졌고,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12사단으로 재배치되었다. 정권에 밉보여 군 생활이 고달파진 겨울 어느 날, 퇴역을 앞둔 탄약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들고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이로 짐작건대, 이 선임하사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겪었을 연배다. 여기에 직업군인이자 하사관 신분으로 전역을 앞두었다면, 30년 세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노병의 아스라한 회한과 설움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이 한 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9년 양희은의 목소리를 빌어 이 노래는 세상에 나왔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미대 친구인 김아영 작곡으로 써야 했다. 김민기 이름 석 자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사관과 일반 사병들 사이에서 이 노래가 불리자, 국방부는 기어이 ‘사기 저하’와 ‘군기 해이’를 이유로 전군에 금지령을 내렸고, 문공부 장관에게 금지곡 지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공윤이나 방윤이 아닌 국방부에 의해 금지곡이 된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 양희은의 1979년 앨범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앨범 재킷. 처음에는 A면 4번째 곡으로 ‘늙은 군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었으나, 국방부 요구로 금지곡이 되자, 음반사는 그 자리에 ‘금관의 예수’를 넣는다. 이마저도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을 수정했다. 이 음반은 6차례 재발매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시민군도, 진압군도 부른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

금지곡으로 묶였다고 안 부르는 건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불렸다. 그 시절 시위대가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았다. 기껏해야 <고향의 봄>이나 <애국가> 정도였다. 시위 현장 노래치곤 꽤 소박했던 셈이다. 그나마 <늙은 군인의 노래>에서 군인을 투사로 바꾸어 부르면 제법 현장과 어울렸다. 특히 “아~ 다시 못 올 /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 꽃다운 이 내 청춘” 후렴구는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 인기였다.

그런데 이 노래는 시위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진압군도 불렀다. 애초 금지곡이 된 사유도 이 노래가 싫었던 장교들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반대 입장에 선 시위대와 진압군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상황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낮은 곳, 힘없는 이들을 보듬는 휴머니즘

김민기 노래가 울림이 있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에 두기 때문이다. 다시 못 올 흘러간 청춘을 아쉬워하는 건 진압군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기에, 시위대와 진압군 모두 목놓아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우리 사회 낮은 곳, 힘없는 이들을 향한다. 제대 후 부평 근처 공장에 취직해 함께 생활한 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19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고 떨어진 선수를 보며 만든 <봉우리>, 탄부로 일하며 탄광촌 아이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등, 장삼이사들의 삶과 사연이 담겨 있다.

무려 4000회 공연까지 이어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중단한 이유도, 배우들이 부속품처럼 되는 상황이 싫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진하게 묻어 있다.

 

*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는 쓰껌헌 탄가루로 화장을 하고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장난말로 ‘아버지 얼굴 예쁘네요’,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이 그럼 예쁘다마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한바탕 웃는다.” 탄광촌 어린이들이 쓴 글을 노래극으로 엮었다.

 

 

 

“헬로 아저씨 따라갔단다”

김민기의 이런 시선이 담긴 노래 가운데 <혼혈아>가 있다. 1971년 데뷔작 B면 4번째 곡은 <종이연>으로 적혀 있으나, 이 곡의 원제는 <혼혈아>다. 공윤의 심의 때문에 곡명이 바뀐 사례다. 22년이 지난 1993년이 돼서야 김민기 2집에 원래 제목대로 이 노래가 수록됐다. 무엇보다 <혼혈아>를 듣노라면 가슴이 아리다.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 아이가 있었다. 혼혈아로 피부색이 달라 친구가 없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안 오신다. 남겨진 편지 한 장이 있어 옆집 아저씨께 가져가니 읽고서 한숨만 쉬신다.

"네 어머니 헬로 아저씨 따라갔단다".

그럼 뭘 하고 놀까?

종이연이나 날리자. 구름 위까지. 하늘 끝까지.

그 시절 주한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혼혈아로 부르지 않았다. '튀기'라 불렀다. 국어사전에서 ‘튀기’를 찾으면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로 설명한다. 동물에 쓸 단어를 사람에 쓴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민족의 순수혈통을 더럽힌 잡종 취급을 했다.

가련한 소년을 화자로 "내 아버지는 도박꾼이었고 어머니는 재단사였다"는 가사의 내용은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처럼 느껴지지만, <혼혈아>는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었을 아이의 이야기라 더 사실적이다. 그런 아이에게서 어머니마저 떠났다. 천애고아인 셈이다. 김민기의 많은 노래 가운데 가장 눈에 밟힌다.

 

https://youtu.be/9_gLV5yv4P0
* ‘혼혈아’란 제목이 못마땅했던 공윤은 ‘종이연’으로 바꿨지만 김민기는 훗날 원 제목으로 음반에 다시 수록했다

 

 

 

3월 15일이면 학전이 문을 닫는다. 한 시대가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울고 웃었던 기억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그 앞에 김민기의 쾌유를 빌며 고마움을 전하는 꽃 한 송이 놓으러 가야겠다.

 

* 1991년 설립돼 대학로를 대표하는 소극장으로 불렸던 학전이 2024년 3월 15일을 끝으로 문을 닫을 예정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학전블루소극장. 2023.11.12. 연합뉴스

 

 

 

이승원의 뮤직박스imrdoctor@daum.net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