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카운터스’ 함정
30년 가까이 반도체 제국으로 불렸던 미국 인텔이 추락한 데는, 모바일과 인공지능(AI) 등 기술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영향이 크다. 최고의 전문가들을 보유한 회사에서 이런 기술 패러다임 전환을 놓친다는 게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이런 일들은 기업의 세계에서 자주 목격된다.
1등 기업은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기존 시장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강하고, 조직문화가 관료화되면서 혁신 역량이 떨어지게 된다. 리스크가 따르는 기술 개발보다, 단기적 이익 창출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단기 성과주의는 경영진의 보상체계가 주가와 연동돼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미국 지엠(GM) 부회장 출신 밥 러츠는 이런 현상을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콩 세는 사람들)라는 말로 표현했다. 빈 카운터스는 기업의 본질적 가치보다 재무제표상 숫자를 더 중시하는 재무·회계 관리자들을 냉소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각 부서의 예산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큰 그림을 놓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러츠는 2011년 펴낸 책 ‘빈 카운터스’에서, 최상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야 할 기업이 비용 절감과 영업이익 수치에만 급급하면 반드시 몰락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은 당장 눈앞의 분기별 이익만을 무자비하게 추구했다. 그렇게 미국 기업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며 “변화를 위해서는 빈 카운터스가 그려내는 세계가 허상임을 깨닫고, 비전과 열정을 갖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제품 전문가’에게 다시 기업 경영의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지난 21일 인텔의 추락 원인과 관련해 “탁월한 공학 기술보다는 재무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기업문화 탓”이라며 “한때 세계 최고의 제조업 아이콘이었던 제너럴일렉트릭(GE)도 바로 그런 길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인텔은 최근 10여년간 비용 절감과 단기 성과에 치중했으며, 이런 행보는 재무통이나 마케팅 전문가가 최고경영자를 맡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인텔이 2006년 애플의 아이폰용 칩 개발 요청과 2019년 오픈에이아이(AI)의 생성형 인공지능 투자 제안을 거절했을 때 최고경영자는 각각 마케팅과 재무 전문가였다. 인텔은 2021년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 팻 겔싱어를 최고경영자로 선임했지만 추락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최근 반도체 부문에서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역전당한 삼성전자도 빈 카운터스 함정에 빠져 있는 것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박현 논설위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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