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道雨 2024. 10. 28. 09:38

이러다 다음 전쟁터는 한반도가 된다

 

 

 

지난 며칠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란 심란한 뉴스를 지켜보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싸고 적잖은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이번만큼 진짜 전쟁이 터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숨이라도 돌릴 겸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8월 초 펴낸 정책 구상집(‘보수정치가 이시바 시게루―나의 정책, 나의 천명’)을 꺼내 읽다, 그가 강연 때마다 청중들에게 소개한다고 강조한 ‘쇼와 16년(1941) 여름의 패전’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이 책은 80여년 전 일본이 저질렀던 뼈아픈 ‘판단 미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일 개전을 앞둔 1940년 9월 일본 정부는 “국가총력전의 방책을 연구해 국책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총력전연구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모인 이들은 육해군과 내무성·대장성·상공성 등 정부 부처, 일본제철·일본우선·도메이통신(현 교도통신의 전신) 등 주요 국책 기업에서 활약하던 30대 초중반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개전을 코앞에 둔 1941년 7월부터 전쟁 모의시험(시뮬레이션)을 진행해 “초반엔 일본이 우위를 점하겠지만, 서서히 미국의 산업생산력 등이 발휘되고 소련도 참전해, 3~4년 뒤엔 패배할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결론이 나왔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피해야 했다. 그러자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자네들 얘기도 알겠네만, 일-러 전쟁 때도 그랬듯이 전쟁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네.”

결국 12월8일 진주만 공습이 이뤄졌고, 젊은 엘리트들의 예측대로 3년8개월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은 ‘개전’하기 전부터 ‘패전’한 셈이었다.

 

국가정보원의 지난 18일 발표 이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사실로 확인되며, 정부 안팎에서 험한 말들이 오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검토해나갈 수 있다”고 했고, 신원식 국가안보실장과 여당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한기호 의원은 “우크라와 협조해 북괴군 부대를 폭격”하고 이 자료를 “심리전에 써먹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문자 대화까지 나눴다. 혈맹 관계를 회복한 북-러 동맹을 상대로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윤 정부가 추진해온 한·미·일 3각 협력 강화 노선 전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정부 요직에 들어앉은 이들이 유능했다면, 북·중·러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정책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일이 쏟아내는 현란한 찬사에 취한 윤 정부는 폭주할 뿐이었다. 상대의 과도한 칭찬엔 늘 ‘이렇게 해도 괜찮겠어? 결국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하는 거야'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려대로 윤 정부 출범 불과 2년 반 만에 남북 관계는 파탄났고, 북-러 동맹이 복원되면서 30여년간 공들여온 북방 외교는 물거품으로 변했다.

조태열 외교장관이 24일 중국에 “북핵 문제와 불법적인 러-북 협력에 적극 대응해주기를 기대”한다고 했지만, 우린 맘대로 하면서 저들이 우리 뜻대로 움직일 거라 기대해선 안 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3일 한국의 살상무기 지원과 관련해 “가혹하게 대처할 것”이라면서도 “러·한은 훌륭한 교류와 상호 이해와 협력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4~25일 지난 6월 서명한 ‘북-러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 4조(상호 원조)를 언급하며, 어떻게 할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 헌장 51조가 허용하는 ‘집단적 자위권’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지난 8월 점령한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주를 탈환하는 데 북한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런 변명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곤란하겠지만, 러시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80여년 전 도조 같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모험주의는 곤란하다. 상대가 우리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조처’를 생각하면서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러시아가 겪는 고통은 일시적·국면적·전술적이지만, 우린 북한이라는 증폭 장치를 통해 영구적·전면적·전략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북-러의 군사협력 정도에 따라, 미국이 제공해온 ‘확장억지’(핵우산)가 벗겨질 수도 있다.

폴란드와 발트3국엔 북한이 없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전쟁터는 틀림없이 한반도가 된다.

 

 

 

길윤형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