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한국 문화재 수난사

道雨 2007. 6. 28. 18:39

 

 

 

1. 한국 문화재 수난사

  가. 일제하의 수난

     (1)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 1905년 일제의 협박하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초대 통감으로 온 한국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저희 천황과 기타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수천 점의 고려청자를 수집하여 일본으로 반출함.

  · 이러한 대량반출과 수집은 개성·강화도·해주 지역의 고려시대 분묘에 대한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를 최악의 상태로 조장시킴.

  · 이토 히로부미는 친일매국의 앞잡이였던 이완용으로 하여금 창덕궁 박물관을 창설하게하여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들을 고가에 팔 수 있게 함.

  · 현재 국내의 모든 박물관 소장품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합쳐서 약 2만 점으로 칠 때 일본에 도굴되어 유출된 것은 약 3-4만 점이 될 것으로 봄.


     (2) 현해탄을 넘나든 시련의 경천사탑

  · 원래는 개성 부근의 풍덕군(개풍군) 부소산 기슭의 경천사터에 있었는데 한일합방 전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합방 후 총독부의 반환요구로 서울로 돌아온 후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에 복원함.

  · 1906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인 다나카 궁내대신(장관)은, 고종황제가 하사했다는 거짓 주장을 하며 인근 주민의 저항과 관할 군수의 항거를 공갈 및 총검의 시위로 묵살하고 석탑을 해체해서 일본으로 불법반출했으나, 소문이 나면서 일본인들에게 까지비난이 높아지자 총독부에서 반환요구를 하여  1920년 무렵에 돌아오게 됨.

  · 일본인들이 급히 해체하고 운반하느라 심하게 손상되어 복원조립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므로 경복궁에서 약 40년간 방치되었다가 1960년에야 복원됨.


     (3) 석굴암에서 사라져버린 5층소탑과 감실 불상, 본존상의 파괴

  · 석굴암 본존상 뒷편의 11면관음상 앞에 불사리가 봉납됐었다고 구전되는 작고 우수한 대리석의 5층석탑 하나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1909년에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다녀간 후 사라져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음.

  · 소네 통감은 우리의 옛 책(고서)들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일본 황실에 헌상하였으며 그 중 일부가 한일국교정상화 후 반환되었음.

  · 5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 굴내 주위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龕室)에 하나씩 안치돼 있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을 도난당함.

  ·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는데 혹시 그 속에 복장유물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저지른 만행이다.

  · 통감부는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하려 했으나 현지 여론이 좋지않아 취소되었다.


    (4)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와 사리탑

  · 다보탑 상층기단에는 원래 4마리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음.

  · 1902년에 조사할 때는 4마리가 다 있었는데, 1909년에 다시 와보니 비교적 완전한 2마리가 없어졌으며, 그 후에 다시 1마리가 없어져 현재까지 행방을 모르고 있음.

  ·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은 1906년에 개성의 일본인이 불국사의 사승들을 위협하고 약간의 돈을 집어준 후 일본으로 반출되어 요릿집 정원 등 몇군데를 전전하다가, 일본인 학자인 세키노가 추적조사하여 어느 제약회사 사장집 정원에 있던 것을 발견, 소유자를 설득하여 1933년에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반환되어 불국사의 원위치로 돌아옴.

  · 이 사리탑은 도쿄로 불법반출한 후 요릿집 정원에서 자랑스레 공개되어 잡지에 사진과 해설까지 실렸다고 함.


   * 총독부의 특례적인 반환노력과 일부 양식 있는 일본인 학자의 협력으로 일본에서 되돌아온 것은 일제 36년을 통해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 뿐이었다.


     (5) 행방불명된 보리사터의 부도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에 있던 대경대사 현기(大鏡大師 玄機)의 부도.

  · 1911년에 일본인 악당들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45년 후인 1956년에 서울 시내 남산동의 일본인 집에 있던 것을 이화여대에서 구입하여 현재 이화여대 총장공관 정원에 있음.

  · 보물 제351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 초기의 우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

    * 현기탑으로 추정되지만 확증할 수 없어 보물로서의 지정명칭이 ‘석조부도’라고 되어 있음.

  · 보리사터에 있던 대경대사 현기탑비(大鏡大師 玄機塔碑)는 1915년에 서울로 옮겨 현재 경복궁 잔디밭의 석물군 속에 있음 ( 보물 제361호 )

  · 현기(玄機)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의 스승.


     (6) 반출경위가 인멸된 거돈사터 원공국사승묘탑 : 보물 제190호

  · 원위치 :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정산리.  거돈사터

  · 소재지는 확인되어 있었으나 반출경위와 그 증거가 인멸됨.

  · 해방전까지 서울 남대문 시장께에 살던 일본인 와다의 집 정원에 있었음.

  · 1948년 미군정청의 미술·고적 담당 고문인 채핀이라는 미국인 할머니가 지정문화재의 소재지 확인시 운공국사승묘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이를 조사·추적하여 성북동 골짜기의 이아무개의 별장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경복궁으로 옮겨옴.

  

     (7) 보령의 절터에서 사라진 비운의 5층석탑

  · 1910년대 중엽 인천의 부회의원(시의원)이던 일본인 고노가 충남 보령군 대천면 남곡리 당동의 이름 모를 폐사지에 서 있던 5층석탑을 불법반출,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음.

  ·  같은 보령군의 미산면 성주리에 위치한 성주사터의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반출 음모가 진행 중에 포착, 제지되었음.

   * 성주사터의 유물들 : 5층석탑(보물 제19호), 3층석탑 2기(보물 제20호, 제47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 白月葆光塔碑 : 국보 제8호) : 최치원이 비문을 씀.


     (8)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의 부도와 석탑

  · 1930년대 말,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의 이름 모를 절터에 있던 고려 중엽 이전의 양식을 갖춘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도를 일본인이 마을 사람을 매수하여 빼돌려 인천항에서 출항하기 직전 간송 전형필이 거액을 지불하고 사들임.

    * 현재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보화각) 뒤뜰에 있음.

  · 일체의 기록을 상실한 채 일본 본토로 팔려갔던 고려시대의 3층석탑을 오사카 경매장에서 거액을 주고 구입.  현재 보화각 뒤뜰에 있음.


     (9) 중흥산성에서 해체된 걸작 쌍사자석등 : 국보 제103호

  ·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게 돼 있던 것을 총독부가 중간에서 접수.

  ·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기금 조성을 목적으로 중흥산성 내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매각.

  · 중흥산성 --- 옥룡면사무소 --- 전남 도지사 관사 --- 경복궁 --- 광주박물관


    * 대구의 악명 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 다케노스케

  · 전남 광양지방의 어느 절터의 탑 속에서 약탈된 작은 ‘금동팔각사리탑’과, 경주 부근의 어느 석탑 속에서 훔친 작은 ‘금동삼층탑’을 취득하고 있었는데 모두 희귀한 걸작이었다. 8·15를 전후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둘 다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있음.  

  · 오구라의 집 정원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의 걸작 ‘석조부도’ 둘은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있으며, 보물 제135호와 보물 제258호로 지정됨.


    (10) 정혜사터 13층석탑의 수난 : 국보 제40호

  · 경북 경주시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이형석탑.

  · 1911년에 수명의 반출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놓았을 때, 마침 한 마을 사람이 지나가다 목격하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치고 석탑은 위기를 모면함.

  · 그 후 이 13층석탑은 1922년 복원될 때까지 땅에 내려진 탑재들을 되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10층탑 꼴로 서 있었다. 그통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 1998년에도 위기를 겪음.


     (11) 정도사터 5층석탑, 현화사 7층석탑, 고달사터 부도의 수난

  · 정도사터 5층석탑(보물 제357호)은 경북 칠곡군 약목리 복성동 정도사터에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불법 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져 국립중앙박물관 석물군 속에 들어 있음.

  · 1930년대 중엽, 개성 시외에 있는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로 탑신을 폭파함.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잇었는데 불행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음. 범인들은 얼마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장치의 금제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두드려 짓이겨진 뒤였다.

  · 1934년 경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터부도(국보 제4호)의 내부유물인 사리장치가 절취된 것으로인정됨.(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 내용)


     (12) 총독부의 가공할 사적파괴령 비밀문서

  ·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패색이 짙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앨 계획을 세우고 실행함.

  · 1943년, 조선총독부가 각 도경찰부장에게 지시한 문서 :

       ‘유림(儒林)의 숙정(肅正) 및 반(反)시국적 고적의 철거’

  ·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한 기념비인 ‘황산대첩비’를 비롯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순신 장군의 전승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토록 함.

  ·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기념비 목록

   1) 고양 행주전승비(幸州戰勝碑)    2) 청주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紀蹟碑)

   3) 공주 명람방위종덕비(明藍芳威種德碑)     4) 공주 명위관임제비(明委官林濟碑)

   5) 공주 망일사은비(望日思恩碑)         6) 아산 이순신신도비(李舜臣神道碑)

   7) 운봉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8) 여수 타루비(墮淚碑)

   9)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李舜臣左水營大捷碑)   10)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李舜臣鳴梁大捷碑, 현재 보물 제503호)      11)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明張良相東征詩碑)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泗溟大師石藏碑)  13)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14) 통영 ·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李舜臣忠烈廟碑)   15) 부산 정발전망유지비(鄭撥戰亡遺址碑)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泗溟大師紀蹟碑)   17) 연안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18) 경흥 전보파호비(廛堡破胡碑)    19) 회령 고충사타(顧忠祠墮)  

  20) 진주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李芝蘭, 佟豆蘭)장군과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阿只拔都) 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史實)이 새겨져 있었음.

    -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대첩비’를 다이너마이트를 사용 산산조각으로 폭파하였다.

    - 사적 1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 합천 해인사에 세워져 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때 박살이 난 비편의 일부가 현재 해인사 명월당 앞에 수습돼 있다.

   *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乾鳳寺)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는 총독부가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해방이 된 후 해남과 여수의 지방유지들은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경복궁의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던 비석들을 찾아 원위치로 옮겼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음.


     (13) 땅속의 쇠솥에서 나온 형제불

  · 19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사람 하나가 땅을 파다가 우연히 뚜껑이 덮인 옛날 쇠솥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솥안에 금빛이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둘이나 들어 있었다. 선량한 발견자가 마을에 알렸고, 당시 부여 지구에 파견돼 있던 통감부 소속의 일제 헌병대가 알고 압수의 손길을 뻗쳤다. 그 후 1년이 지나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경매에 붙여져 니와세라는 일본인이 낙찰을 받았다. 니와세는 1922년에 두 개의 백제 금동불 중 하나를 대구의 이치다(1930년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을 불법적으로 입수하려고 했던 자)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15년전에 땅속의 한 솥에서 살아 나왔던 형제불은 그 후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크기가 약간 작아 동생뻘이었던 것(높이 약 22.8cm)은 해방 후 서울에서 압수, 귀속재산으로 국립박물관에 들어갔으나 대구로 가 있던 형뻘되는 불상(높이 약 28cm)은 소장자였던 이치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숨겨 갖고 간 듯 아주 사라져버렸다.


     (14)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반가사유상

  · 일본인 악당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정확히 어느 지역의 어떤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일체의 경위를 흐린 채 서울로 불법반출해 온 삼국시대의 최대의 걸작 불상 2구가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보 중의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구가 그것이다.

  · 위의 두 반가상 중의 하나(삼산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 : 국보 제83호)는 1912년 2월 21일에 이왕가박물관이 가지야마라는 일본인 고물상으로부터 당시 2,6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 기록을 보면 경주 근처의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충청도 벽촌의 살아 있는 절이나 암자에 전래되던 것을 몰래 약탈, 아니면 협박 혹은 매수하여 서울로 반출해 온 것으로 사료됨. 따라서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

  · 또 하나의 걸작 반가상(보관 금동미륵보살반가상 : 국보 제78호)은 1912년에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불법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아 데라우찌 총독 관저에 기증형식으로 들어가, 그가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다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던 때인 1916년 4월 18일, 총독부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위의 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모두 세계적인 명품이며,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15)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당한 유점사 53불

  · 1912년, 금강산지역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와 야쓰이는 내금강께의 유점사(楡岾寺)에서 신라시대의 ‘53불 신앙’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불상 50구를 발견함(53구 가운데서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도 있었음).

  · 두 사람이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총독부 간행)’에 사진과 함께 소개함(약탈자들에게 좋은 정보가 됨).

  · 1916년 3월, 일본인 무법자들이 금강산 유점사로 침입해 가서 능인보전(能仁寶殿)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절에서 불상 강탈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가 절에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 뿐이었으며,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약탈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보잘 것 없는 소상들이었다.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약탈해온 것 중에서 조각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 · 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 일본인 악당들은 그후 유점사에서 약탈한 14점의 신라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傳來像)’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暗賣) · 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그 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고적도보’에 사진과 조사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 · 소장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의 수난

  · 1911년에 일본으로 불법반출되었다가 1966년에 반환되어 귀국 즉시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희귀한 백대리석 조각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원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의 한송사(寒松寺)터.

  · 한송사터는, 1880년께의 어느날 밤, 무서운 태풍으로 절간 건물들이 완전히 찌부러진 뒤로 백옥(白玉 ; 백대리석)으로 만든 불상 둘과 비신을 잃은 귀부만이 남았더라는 전설의 절터.

  · 두 불상 중 완전한 보살좌상을 인근의 칠성암(칠성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가져갔는데, 이를 전해들은 일본인 와다(당시 강릉 측후소의 기사였다고 함)가 암자의 중을 협박하여 불상을 탈취하고, 이를 주문진 항을 통해 도꾜의 제실박물관(지금의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여 55년동안 도꾜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후 한일협정에 의거 반환됨.

  · 한편 와다는 머리와 오른팔이 깨져 나간 탓으로 한송사 옛터 모라밭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불완전 백옥불까지도 강릉 측후소 마당에 실어다 놓았다. 해방후 강릉시 명주군청 마당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강릉향토사료관에서 보호되고 있다. 보물 제81호로 지정됨.


     (17)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터 석불좌상

  · 1913년경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라느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아주 품위 있는 신라시대의 완전한 석불 ‘석가여래좌상’을 보고 몹시 탐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며칠 후 서울로 돌아온 데라우치 총독은 그의 관저(당시 남산 밑의 왜성대) 정원 한 쪽에 경주의 오히라 집에서 본 그 석불좌상이 어느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후 1927년에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

  · 원위치는 경주시 월성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유덕사(有德寺)터이며, 불법반출하여 자기집 마당에 버젓이 놔두고 자랑하던 오히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한 것.


  * 데라우치 총독

    - 초대 조선총독으로서 무단정치로 악명 높은 식민지 통치자.

    -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 공포,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 총독관저에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 불상의 하나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기타 소장품 일부를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

    -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수집 혹은 진상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


      (18) 굴불사터 사면석불의 수난

  ·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 굴불사터의 사면석불의 남쪽면에 해당되는 고부조(高浮彫)는 원래 석가여래삼존상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에 누군가에 의해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佛頭)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사라졌다.

  · 1960년경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 먼저 간송이 문제를 제기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한 바 기술적으로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19) 도둑맞은 관덕동 석탑의 돌사자상 한 쌍

  ·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의 ‘삼층석탑’(보물 제188호)의 상층기단 위 네 귀퉁이에 4마리의 돌사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보존상태가 좋은 두 마리(암수 한 쌍)는 일제시대에 도난당하여 지금까지 행방을 모르며, 나머지 한 쌍은 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되고 있다(보물제202호).

  · 암·수 두 쌍인데 특히 암사자는 겨드랑 밑으로 새끼사자를 넣고 젖을 빨게 하였다. 이런 자연스런 표현의 어미와 새끼사자의 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내 유일의 진귀한 조각품이다. 동양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일찍부터 일본인 전문가들도 경탄했었다. 동양에서 새끼사자의 조각품으로 최고(最古)의 유물이다.

  · 1931년에 대구에 살던 어느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탑을 사서 모조리 해체한 후 탑재들을 하나씩 가마니로 싸서 의성역으로 실어 내갔을 때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대 충돌이 있었으며, 그 후 탑재들은 주민들에 의해 원위치로 되옮겨져 예전대로 복원되었다.

  · 1934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건축잡지에 소개된지 5년후인 1939년에 한 쌍을 도둑맞고 한 쌍만 남은 돌사자를 현지의 보존이 어렵다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김.


      (20) 국보 해제당한 가짜 상원사동종

  · 1906년, 1년전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국권을 빼앗긴 고종황제가 황태자(뒤의 순종)와 함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의 강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내놓은  하사금으로 지은 신축법당(본원사)이 있었는데, 이 절에 가져다 놓을 종을 찾던 중,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상원사에서 범종을 매수하여 서울로 운반하였다.

  · 1908년에 한강을 통해 용산에 도착한 배에서 내려진 범종은 조선종이 아닌 일본종 비슷한 괴상한 양식의 종이었는데, 총독부는 그것을 보물로 지정하였고 해방 후 남산 본원사가 갖고 있던 ‘전(전) 상원사 범종’은 조계사로 옮겨졌으며 국보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 1962년 12월 12일, 문화재위원회에서 ‘그 종은 결코 한국 것이 아니며 오랜 작품도 아니다. 일본인 무뢰한들이 계획적으로 일본에서 급조한 것을 배로 싣고와서 한강에서 진짜 상원사종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한 가짜 상원사종으로 추리된다’는 황수영 위원의 그 동안의 입체적인 조사 결론에 따라 정식으로 국보 해제를 선언했다.

  · 그때 한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을 진짜 상원사종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21)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갈 뻔한 보신각종과 공출당한 전등사종

  · 태평양전쟁 말기, 위기에 몰린 일본은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선포하여 사찰의 동종과 불상 등을 강제로 공출해갔다.

  · 서울 종로의 보신각종도 공출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총독부가 이미 1934년에 보물로 지정하였고 또한 서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 때문에 병기창에 끌려갈 위기를 모면한 채 해방을 맞이하여 오늘날 보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 강화도의 전등사종은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당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해방 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중국 북송 때의 귀중한 종이 하나 굴러 들어왔다.

   * 해방이 되자마자 전등사 주지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종이 혹시 인천 항구의 어디쯤에 버려져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섰다가 부평의 조병창 자리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전등사에서 가져온 종은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대종이었다. 여하간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종이니 이거라도 대신 운반해 가자 해서 얻은 것이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높이 1.63m의 중국종으로, 1037년에 중국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했다는 명문(銘文)이 들어 있다. 1963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문화재임이 조사·확인되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 강화군의 강화면 관청리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돼 온 또 하나의 큰 동종이 있는데(현재 보물 제11호, 1711년에 주조), 이 종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저희 나라로 실어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兎橋]까지 굴려 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22) 고서적의 수난

  · 규장각과 지방의 4대사고(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강화도의 정족산성 사고본, 강원도 오대산 사고본,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본)의 장서들을 총독부가 모조리 접수하고, 이왕가에게는 무주 적상산성 사고본을 인수토록 함. 지금의 창덕궁 장서각은 적상산성 사고본을 중심으로 발족.

  · 규장각의 장서들을 포함하여 총독부 소관의 장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시켜 일본인 교수들의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 했었는데, 해방 후 자동적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관이 되었다.

  ·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 시절 이전에 이미 규장각 장서 중 귀중본 일부를 일본에 빼돌렸으며(1965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백린 열람과장이 이토 히로부미가 빼돌린 33부 563책의 목록을 발견), 현재 도쿄의 궁내청 서릉료(서릉료)에 소장돼 있으나, 1966년 문화재반환협정 때에는 한 권도 되찾아오지 못했다.

  ·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와 2대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반출한 책들, 이른바 ‘통감부 장서’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총 163부 852책은 1966년에 반환문화재로 돌아왔다.

  · 오대산 사고본(이조실록 1벌 포함)은 총독부의 양도로 1914년 3월에 몽땅 동경제국대학으로 실려갔으며,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당시 교수들이 대출해 갔던 20여 책만 살아남았다.

  · 통감부 시절에 서울에 와 있던, 책을 알던 일본인 악당 가와이는 일본 헌병대의 비호로 강화도의 사고본을 비롯한 귀중한 한국의 고서들을 약탈 및 수집하여 일본으로 빼돌림. 현재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와이문고’가 바로 그것임.

  · 통감부 시절에 통역관으로 와 있던 마에마도 일제 권력을 배경으로 한국의 옛 첵을 무수히 수집·반출해 간 대표적 인물임. 강화도에서 실어왔던 ‘정족산성 사고본’을 비롯한 곳곳의 전적(典籍)문화재를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빼앗음으로써 막대한 분량의 한적(韓籍)컬렉션을 향유함. 뒤에 ‘마에마 장서’로 통하게 된 이 한국 책들은 현재 도쿄의 ‘동양문고’(일본 국회도서관 산하)에 대부분 들어가 있음.

  · 아사미의 방대한 한국 책은 일본의 미쓰이 재벌로 넘어가 ‘미쓰이문고’로 보관되다가 2차대전 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팔려감. 해동고승전 등 포함.

  · 총독부 초기부터 고적조사위원을 역임하고,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이마니시도 ‘삼국유사’를 포함한 숱한 귀중본을 수집 : 이마니시 장서


      (23) 팔만대장경 도난사건

  · 1969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을 54년 만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판 18장이 분실된 것을 발견함.

  · 1910년에 무라야마라는 일본인의 ‘해인사대장경 조사보고’라는 글로 인해 최고의 보물로 일본인 사회에 알려졌으며 그 후 수 차례의 도난사고 발생.

  · 1915년에 총독부에서 ‘팔만대장경판’에 대한 첫 조사를 했을 때 이미 18장이 결판(缺板)되어, 뒤에 그것을 보각하여 채움.

  · 1937년의 팔만대장경 인경(印經) 때 두 벌을 떠서 한 벌을 평북 영변의 보현사에 보냈는데, 그때의 작업장 경비책임자인 해인사 지구 경찰관 파출소의 일본인 악질 순사주임이 경판 4장을 빼돌림.


      (24) 낙랑고분의 대난굴시대

  · 낙랑은 전한(전한)의 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의 하나로 그 옛터의 고분 출토 유물은 한문화 중심의 것임.

  · 1909년 10월, 일제의 강청에 따른 한국정부의 위촉으로 두번째 고적조사를 착수하게 된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는 평양의 대동강 남안(南岸)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숱하게 군집해 있다는 말을 듣고 발굴작업을 지휘하여 전(塼;벽돌)으로 현실(玄室)을 꾸민 속에 한나라 문화의 거울을 비롯하여 무기·토기 등이 부장돼 있는 사실을 확인.

  · 1911년 10월, 세번째의 조사발굴 : 사리원의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 발굴.

  · 1916년 10월, 평양근교 대동강면에서 낙랑고분 10기 발굴 : 금제교구(국보 제89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한대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

  · 일본인들은 대동강면 일대의 낙랑고분을 ‘지하의 정창원(正倉院; 일본의 유명한 고대 동양미술품 보고)’이라고 부름.

  · 낙랑고분의 대난굴시대는 1923년께부터 4-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하는데, 약 1,400기의 낙랑고분 가운데 도굴을 면한 것은 약 140기 뿐이었다고 한다.

  · 당시 출토(도굴)된 중요한 유물

    - 전한(前漢)시대의 유물인 ‘영광(永光) 3년(B.C. 41년)명의 동종’

    - 거섭(居攝) 원년(서기 5년)명 화문경

    - 거섭 3년명 칠기(漆器)

    - 녹유박산향로, 녹유항아리


      (25) 광개토왕릉비와 일본 스파이

  · 광개토왕비 : 광개토왕이 죽은 지 1년 후인 서기 414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돌비석(자연석을 세워 만든 높이 약 6.3m의 돌비석)은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광개토왕의 영웅상과 업적을 기념한 것으로 그 비문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기도 하다.

  · 1879년 일본 군국주의의 참모본부로부터 특수 임무를 부여받은 사고 가게노부라는 포병 중위에 의해 비문 내용이 위조되고,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 설치’라는 허상의 전설기록을 사실(史實)로 확정시키려는 음모가 진행됨.


      (26)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 고령 · 창녕 · 선산 · 함안 · 진주 일대에 널려 있는 5-6세기 가야고분의 부장품들이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됨.

  · 일본인 무법자가 도굴했을 유물을 일본인 경찰서엣 불법행위로 압수해 갖고 있다가 학술보사를 나왔다는 세키노를 통해 저들 맘대로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하기도 함.

  · 경북 선산지역에서는 총독부에서 내려갔던 고적조사원이란 자까지도 순금 팔찌같은 값진 출토품은 슬쩍 제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례도 기록.


      (27)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친 무법자들

  · 1915년에 총독부 위촉으로 최초의 학술적 조사발굴이 경주 남산 밖의 황남리고분에서 이루어져 철제검, 철제창, 기타 토기들을 출토시켰으며, 같은 시기에 보문리에서도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순금으로 된 팔찌 · 귀고리 · 반지가 발견되고 뒤에 ‘부부총’(夫婦塚)으로 명명됨.

  · 1921년에 경주 남문 밖의 파괴된 커다란 고분 속에서 황금보관을 위시해서 역시 순금으로 된 귀고리 · 팔찌 · 반지 · 과대 · 요패 · 은합 등이 쏟아져 나왔으며 뒤에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 고분의 출토유물들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입증시킴 (이것이 무법자들을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치게한 결정적인 사건이 됨). 이때의 출토품인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 과대와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되어 있음.

  · 1924년에는 황금보관과 귀고리 · 요패 · 도제기마인물상(陶製騎馬人物像), 기타 주형토기(舟形土器) 등이 부장되어 있던  금령총(金鈴塚)이 발굴되었으며 이때 출토된 금관은 현재 보물 제338호, 도제 기마인물상은 국보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음.

  · 일본인 이마니시(1905년 당시 동경제국대학의 대학원생이었으며 후에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됨)의 기록에 의하면, 1905년 당시 이미 신라고분의 도굴이 착수되고 있었고 출토유물들은 모조리 일본인 상인(골동상)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려줌.

  ·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풍부한 재력으로 마음껏 도굴품을 사들이고 또는 뒤로 돈을 주어 계속 도굴해 오도록 지원했던 악면 높은 수집가 오구라가 아주 작고 완전한 순금관을 입수한 것도 그때였으며, 국보급인 이 작은 순금관은 현재 일본에서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소장자는 ‘오구라 컬렉션’


    (28)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 공주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송산리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가 깡그리 도굴되고 있었다. 고분 속이 모조리 약탈된 후 텅 빈 현실(玄室)에는 당시의 마코라는 일제 담뱃갑 하나가 남겨져 있어 도굴꾼의 여유작작했던 범행을 말해주기도 함.

  · 가루베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10여년 재직하면서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제유물을 수집 혹은 도굴했다.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부장품을 파먹은 악질적인 일본인인데 1945년에 일제 패망과 함께 한 트럭 분량의 백제유물 컬렉션을 갖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백제미술] [백제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통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나. 서양인의 수집


      (1) 구한국시대의 서양 외교관들

  · 1883년의 인천 개항 이후 서울에 등장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기술자·정부고문·선교사·외국어 교사 등 여러 분야의 서양인 가운데 한국의 옛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한 사람이 더러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제한돼 있었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일본인 무법자들처럼 이 땅의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무법의 수집가는 별로 없었다.


      (2) 마르텔의 회고담

  · 에밀 마르텔은 1894년에 서울의 프랑스어 학교 교장으로 초빙돼 왔던 인물로 서울에서 골동품 수집에 관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재임기간 중 많은 고서를 수집하였다. 오랫동안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비장돼 있다가 1970년대 초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 전시회에 처음으로 나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크게 뉴스가 되었던 고려의 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1377년, 청주 흥덕사 간본)의 서울에서의 입수자가 플랑시였다.

  · 플랑시가 사망하기 전 경매에 붙여진 [직지심체요절]은 앙리 베베르의 수중에 들어갔고, 베베르가 죽은 뒤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달성군내 팔공산 속의 동화사에서 일본인 특무대원 가토가 절에 머물면서 특무활동을 하던 중 금당암(金堂庵)의 수미단(須彌壇) 밑에 이상한 나무궤짝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커다란 고려청자 항아리가 들어 있었는데, 후에 일본인 무법자들이 그것을 뺏어다가 외국인에게 팔아 먹어 외국으로 반출된 후 행방이 묘연함.

  · 1915년 경 양산의 통도사에 대종형(대종형)의 고려청자 향로가 금강계단 좌측에 위치한 작은 불전의 향로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일본인 악당이 탈취해 갔음.


      (3) 간송 전형필과 존 개스비 컬렉션

  · 존 개스비는 1914년 경 일본 도쿄에 와서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로서, 고려자기의 최대의 안목있는 수집가였다. 그의 수집품은 훗날 간송 전형필이 모두 인수하게 됨.

  ·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청자오리형수적(국보 제74호), 백자박산향로(보물 제238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보물 제241호)

  · 간송이 공주지방의 농장을 급히 처분하여 되사온 개스비의 컬렉션은 간송의 개인미술관인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에 들어간 후 현재까지 보존됨.


      (4) 구미미술관에 들어가 있는 한국불화들

  · 구미 각국의 주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불화들 가운데 현재 국내에선 하나도 확실한 것이 보존돼 있지 못한 고려시대의 것들이 적지 않음.

  · 이들의 대부분은 구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했거나 일부 어리석은 중들이 그들에게 매수되어 헐값으로 팔아 넘긴 것들이며, 그중의 일부가 일본을 통해서 구미로 전매(專賣)돼 나간 것이다.

  · 1900년을 전후하여 양산 통도사의 불화들이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한 뒤 도쿄 제실박물관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다.  8 · 15 해방 직후 ( 일제 패망 후의 적산문화재들 )

  · 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한 김재원 박사는 미군의 협조로 과거에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미술품과 기타 모든 한국 유물들을 적산(敵産)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산동에 있는, 전에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 창고 속에 각종 미술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정보가 박물관에 들어왔다. 김박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보 그대로였다. 술장사로 큰 부자였던 사이토의 수집품이었던가 본데 그는 그것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지 창고 속에 모두 모아놓고는 그대로 일본으로 떠난 것 같았다.

  김박사는 일단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분량의  물건들을 박물관으로 운반하려면 트럭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즉각 운반수단을 구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며칠 후 다시 남산동을 찾아갔을 때엔 벌써 누군가가 깨끗이 실어내 가고 창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 수집가들 사이에 보통 ‘니와세불상’으로 통하고 있던 유명한 백제불인 ‘금동관음보살입상’을 압수.

    - 1907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 사람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이미 서울에 정착해 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 먹었던 한 쌍의 완전한 걸작 백제불상 중의 하나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돈을 주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기에 미군 헌병이 지프를 타고 출동하여 압수해 왔다. 현재 보물 제195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장가 이치다는 서울에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 헌병의 협력으로 압수할 수 있었던 이른 바 ‘니와세불상’과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함께 출토되었던 보물급 백제불상을 니와세에게서 양도받아 수장하고 있었는데, 해방 후 다른 수장품과 함께 일본으로 도망하여 그 백제불상은 영영 놓치고 말았다.

  ·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7호의 조선백자 ‘철사포도문항아리’

    - 일본인 시미즈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 친구에게 보관을 부탁한 물건을 보관자의 아들이 골동가로 들고 나와 팔았음.

    -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에게 넘어감. 장택상컬렉션에 들어간 국보급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시흥 별장에 애장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물건을 보고 몹시 반했던 김활란 박사(당시 이화여대 총장)가 그때 돈 1,500만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국보 지정이 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 보물 237호

    - 고려초기인 ‘순화(淳化) 4년’(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관명이 굽 밑에 새겨져 있어 과거의 조선총독부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됐던 물건임.

    - 일본인 이도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세인에게서 완전히 잊혀져 유전하던 그 항아리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한 골동가게에 나타남(1955년). 당시 이화여대박물관 창설을 맡고 있던 장규서씨가 개인돈으로 구입하였다가 몇 해 후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여보냄.

  · 서울 남산 밑에 상당수의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급히 떠나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 집에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테일러 중령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전의 일본인 집주인이 수집해놓은 도자기와 기타 미술품을 발견하고는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것들을 모두 실어 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반출품들은 미국에서 금세 문제가 되어 출처를 추궁받은 후 외국재산의 불법취득 및 반입죄로 처벌을 받았다.










라.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1)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켜낸 박물관 유물들

  · 1950.6.26 : 김재원 관장과 국립박물관 직원들은 진열장에서 모든 유물과 미술품들을 꺼내 안전한 창고 속에 격납함.

  · 6월 28일. 공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박물관 직원 가운데 유물 보호를 포기하고 혼자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북측이 박물관을 접수한 후에 김관장만 관사에 연금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유물 보호를 계속 맡게 함.

  · 8월 들어 B-29의 서울 폭격이 계속되고 북측의 전세가 악화되자, 수만점의 박물관 유물들을 포장하여 경복궁에서 덕수궁미술관의 더 완벽한 지하창고로 옮김.

  · 얼마 후 공산당 관계책임자들은 종묘 경내의 숲 속에 땅굴을 파도록 박물관과 미술관 직원들을 동원시킴. 이곳에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한 기타 민간 소장품들도 옮겨올 계획이었으나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서울 수복으로 실행되지 못함.

  · 중공군 개입 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의 문화재를 남쪽(부산)의 안전지역으로 극비리에 소개토록 함. 3차에 걸쳐 무사히 부산으로 운반 성공.


    (2)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국보들

  · 1948년 10월경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양양군 서면)에서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산집을 짓다가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킨 국보급의 신라종이 있었다.

  정원(貞元) 20년(신라 애장왕 5년,804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銘文)이 들어 있던 이 동종은 같은 오대산 지역의 ‘상원사동종’(725년명, 현재 국보 제36호)과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명, 현재 국보 제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종으로 그것은 해방 직후의 최대의 발견이었다.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지구여서(나중에 선림사터라고 밝혀짐) 군의 협조로 월정사로 옮겨졌다..

  상원사동종 및 성덕대왕신종과 양식을 같이하는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종으로서 종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땅속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지 겨우 3년 만에 이 제3의 국보급 신라종은 누구도 보호대책을 쓰지 않아 무참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비운의 신라종이었다.

  · 창랑 장택상의 소장이었던 당시 국보 제413호의 ‘청화백자진사도문대접’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국보특별전에 출품됐었으나, 전시가 끝난 후 창랑의 별장으로 되돌아갔다가 전란 중에 불타없어졌다고 함.

  ·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철채백화당초문매병’ : 당시 국보 제372호

  · 해방 직전에 광산왕 최창학이 일본인 소장자 이도로부터 사 가졌던 ‘청자상감보상화문대접’과 ‘보주문합자’

    - 해방 후 과거의 지정보물을, 소재지나 건재 여부도 정확히 조사함이 없이 국보 명칭으로 모두 재지정할 때 국보 제371호와 제377호의 번호가 붙여졌던 물건임.

    - “8·15 직전, 시골에 소개돼 갔다가 돌아와서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하여 모두 깨졌다. 그래서 버리고 말았다.”

  · 한국전쟁 때 증심사에서 행방불명이 된 2구의 신라시대 금동불상 : 당시 국보 제211·212호

    -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과 직원 일행은 무등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證心寺)에 전해 오던 당시 국보 제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제212호의 ‘금동보살입상’을 보러 찾아갔다. 그런데 절에 이르러 주지에게 들으니,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몰이 심하여 작은 국보 불상들은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관장 일행은 그 길로 경찰서로 가서 경찰서 금고 속에 보호되고 있던 두 불상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장은 위급한 작전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금고 속의 국보 불상 보호엔 신경을 못 썼고, 그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10년 후의 국보 재지정 때에 가서는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 강원도 간성의 건봉사에 보관돼 있던 고려시대의 ‘마지금니화엄경’(麻紙金泥華嚴經) 46권(당시 국보 제412호)과 정호(貞祜) 2년명(고려 고종 1년, 1214년)의 ‘동제은상감향로’(銅製銀象嵌香爐)(당시 국보 제419호)는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짐.

  · 진주 촉석루

    -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76호였던 진주의 유서 깊은 촉석루(矗石樓)가 원인 모를 폭탄에 맞아 완전히 불타버린 것은 유엔군이 진주를 점거했던 공산군을 격퇴시킨지 20일 후인 1950년 9원 1일의 일이었다. 공중에서 느닷없이 낙하해 온 폭탄 하나가 촉석루 지붕 한복판에 직통으로 맞아 작렬했다고 함.

    - 현재의 건물은 1959년에 진주 시민들이 복원한 것임.

  · 경북 안동의 국보 제302호로 지정 보호되던 문묘(文廟) 대성전에 직격탄이명중하여 박살이 났음. 이 건물은 전북 장수의 향교 건물과 함께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문화재였음.

  · 송광사 건축물의 수난

    - 1955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 전남 승주군에 있는 송광사의 여러 국보 건축물 중 국보 제404호로 지정돼 있던 백운당(白雲堂)과 청운당(靑雲堂)이 그동안 절을 점령하고 있던 빨치산들의 방화로 깡그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살려낸 국사당(國師堂, 현재 국보 제56호), 하사당(下舍堂, 현재 보물 제263호), 약사전(藥師殿, 현재 보물 제 302호)

    - 신라 말엽에 창건된 송광사는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절로서 유명하다. 건물 아닌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로 10점의 국보와 보물이 간직돼 있다.

  · 보림사 대웅전의 소실

    - 한국전쟁 중 전남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불타 없어짐.

    - 당시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던 조선 초기의 웅건한 2층 팔작지붕 건축양식.

  · 곡성군 관음사의 수난

    - 당시 국보 제273호로 지정되었던 관음사 원통전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에 빨치산 들이 불질러 타버렸다는 설과 일제 때(1930년 전후) 실화(失火)로 불탔다는 설도 있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해방 후에도 국보 목록에 올라 있었다. 

    - 관음사는 국보 제214호의 ‘금동관세음보살상’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원인 불명으로 크게 깨져 국보의 면모를 상실했고, 지금은 목록에서 삭제돼 있다.



마. 매장문화재

  (1) 8·15 해방 후 새롭게 시작한 조사 및 발굴

  · 해방 후 한국인 조사·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에서 실시됨. ‘호우총’(壺杅塚)으로 명명된 이 고분에서는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든 청동합형용기(靑銅盒形容器)가 발견되었다. 굽 밑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는 명문이 양각돼 있었다. 이 호우는 삼국시대 신라고분의 연대 고찰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추정된다.

  · 호우총과 인접한 또 하나의 고분에서는 순금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 한 쌍이 출토되었으며, 그 후 ‘은령총’(銀鈴塚)으로 명명되었다.

  · 1948년에 경주 황오리 고분이 조사·발굴됨. 1955년 2차 발굴.

  · 1952년 3월에 경주 금척리의 신라고분이 발굴됨.

  · 1953년 경주 노서리 신라고분 발굴(137, 138호분)


  (2) 한국전쟁 후의 문화재 발굴

  · 1959년, 경북 칠곡군 송림사(松林寺)의 쓰러져 가던 통일신라시대의 5층전탑(당시 국보 제313호, 지금은 보물 제189호)을 해체·수리하는 도중에 내부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옴.

    - 도금한 얇은 동판을 오려 만든 금빛 찬란한 작은 사리장치와 그 안에 새파란 유리로 된 아름다운 형태의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었음(통일신라 시대의 유물)

    - 12세기의 고려청자 합(盒) 하나가 따로 발견됨(고려 중엽의 重修 사실을 알려줌)

    - 현재 송림사 전탑유물들은 보물 제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됨.

  · 1959년 12월, 경북 월성군 감은사터의 3층석탑(현재 국보 제112호) 2기를 해체·수리하다가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미술문화를 재확인시키는 걸작 사리장치 유물들을 발견함.

    - 유물들은 동·서 쌍탑 중 서쪽 탑 속에 들어 있었고, 청동제 사리기(사리기)와 사각감(사각감)이 나왔다. 특히 정방형의 기단을 가진 보탑형(보탑형)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난간 네 귀퉁이에 배치한 주악천인들과 높직한 기단의 사면을 파고 넣은 팔부신장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의장이었다.

    - 이 감은사 석탑유물들도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3)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사람들

  · 1963년 5월 2일, 경남 밀양읍에 살던 김락화(당시 23세) 등 3명의 청년이 호성리의 절터 쪽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도탑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반쯤 흙에 묻혀 있는 기단부 석재를 호기심으로 들춰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밑에서 석실이 나타나고, 파란 빛깔의 희한한 옛날 그릇들이 나타났다.

    -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8점과 유기그릇 1점.

    - 경북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국가 귀속물로 접수.  보상금 10만원.

  · 1963년 6월 22일, 황모 노인(당시 62세)은 경북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최초의 대형 가형토기(家形土器)를 우연히 발견.

    - 황노인은 장마비가 쑤셔놓은 저수지 북쪽의 모래밭을 걷고 있다가, 이상한 물건 하나가 모래 위로 솟아나와 있는 것을 보고 파내어 보니 큼직한 기와집 토기였다.

    - 경주의 골동상이 불법적인 거래로 입수하였으나, 경주박물관과 경찰의 협조로 압수 조치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음.

  ·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 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그 밑에서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발견되었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던 공간은 잡석으로 급히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 부처님은 배모양의 광배를 두로 붙이고 있는 높이 약 16cm의 완전한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금동불은 문교부에 보고되고 전문가들의 조사와 평가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도니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 광배에 새겨진 ‘연가(延嘉) 7년’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고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감.

    - 강여인과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가 각각 20만원씩의 보상금.

  · 1963년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됨.

    -  한 농부가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우연히 발견됨. 발견자가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경찰에 압수되어 국립박물관에 귀속됨. 보상금 12만원.

  · 1964년 4월 12일,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발견자 4명은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음.

  · 1964년 5월 27일,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 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이 8·15 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조선자기·청동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4만 4천원의 보상금을 수령.

    - 이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를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 밑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는 그 물건들을 돌려달라는 뻔뻔스런 요구를 적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 1966년 1월 17일,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윤석진 형제는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철물탐지기로써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졌다는 4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靑銅盤子)를 출토시킴.

     -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에서 인수하고 35만원의 보상금.

  · 1966년 5월 9일, 경남 의령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마을 사람 전용중이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실을 발견.

    - 조선 중종 23년(1528년)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胎誌板) 2장이 나타남.

    - 보상금 12만원

  · 1966년 9월 6일,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 10만원의 보상금 수령.

  · 1967년 1월 28일, 서울 성북구 삼양1동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출토됨.

    -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용출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 괭이 끝에 금속물이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리면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되었다.

    -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124호로 지정되어 120만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이 책정됨.

  · 1967년 4월 18일, 고철수집상 이영주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100만원의 보상금 수령.

  · 1967년 7월 6일, 충남 대전시 괴정동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인 동검 하나와 그밖에 토기·석도·흑도(黑陶) 등 모두 64점의 유물을 발견·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수령.

  · 1967년 11월 10일,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어 140만원이 지급됨.

  · 1971년 6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임계국민학교 6학년)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을 출토시킴.

    - 이군은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을 발견함.

    - 이군의 어버지는 엿장수에게 단돈 2천원을 받고 팔았으나, 강원도 공보실에서 불상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되찾게 되었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 80만원의 보상금이 책정됨.




바. 도굴 · 도난 · 위조품

  (1) 최대 규모의 현풍 도굴사건

  · 1963년, 경북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서 두더지처럼 고분을 파고 들어가서 부지기수의 각종 부장품을 꺼내 팔아 먹던 패거리 일당이 검거됨.

    - 시가 2천만 원 상당의 고분 유물 400여 점을 약 2년 동안 탈없이 파먹던 최대 규모의 도굴꾼 일당.

    - 삼국시대의 금관은 고령지방에서 도굴되어 몇 단계를 거친 후 이병철 컬렉션에 들어갔고, 후에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2) 석가탑 다라니경의 위기일발

  · 1966년 9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의 유린과 내부유물의 탈취 기도.

    - 석가탑의 내부유물을 노린 범인들의 배후의 인물은 경주 시내의 악명 높은 골동상인 윤아무개였다. 9월 3일, 윤의 집에서 유아무개, 주아무개, 임아무개 등 4명이 치밀한 계획을 짠 후 그날 밤 11시에 불국사로 침입했다.

  그러나 주가 준비했던 재크가 거대한 삼층석탑(석가탑)의 중심부를 한쪽으로 들어 올리기엔 너무 작아 1차 기도는 결국 실패했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급히 구해 온 대형 오일 재크를 갖고 유와 주가 2차로 불국사에 접근해 갔다. 역시 밤 11시께의 고요한 한밤중을 텍했다. 그들은 재크로 석가탑의 1층 옥개석 한쪽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밤, 3차 범행이 시도되었다. 이번엔 3층 옥개석을 들어 젖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범인들이 노렸던 사리장치 유물은 만질 수 없었다. 또 허탕이었다.

  만일 다음날 아침에 불국사 승려가 석가탑의 이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들 범인들은 그날밤 2층 옥개석을 마지막으로 들어올려 보고 마침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다라니경(陀羅尼經)과 귀중한 불국사 창건 당시의 수십 점의 석가탑 사리장치 유물(현재 일괄하여 국보 제126호)을 고스란히 절취하는 데 성공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석가탑은 범인들의무자비한 재크 사용으로 석탑의 한 부분이 깨져 나가고 탑신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질 듯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도굴범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본 불국사측은 긴급 신고를 했고, 경주경찰서는 용의자를 수배한 지 며칠 만에 범인 일당을 검거했다. 잡혀 온 범인들은 목적을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그러나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탑을 해체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범인들이 건드려 한쪽으로 위험스럽게 기운 석가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문화재관리국은 탑의 피해상을 바로잡고 사리장치 유물의 안전 여부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재 전문가와 석조물 보수 전문가들이 현지에 내려가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작업 도중 2층 옥개석이 로프에서 떨어져 일부가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그러나 바로 그 밑에서 ‘다라니경’과 사리장치 유물들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3) 새벽에 발견한 황금 보따리

  *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최대의 세계적인 미술품 도난 사건은 1911년 8월 21일에 파리의 루부르미술관에서 발생했던 유명한 ‘모나리자’의 실종이었다.

  범행 2년 후인 1913년 11월에 체포된 범인 페루지아(루부르미술관의 고용인이었던 이탈리아 청년)는, 지난날 이탈리아를 짓밟고 이탈리아의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마구 약탈해갔던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였다고 정치적이고 영웅적인 동기를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범인은 ‘모나리자’를 이탈리아로 숨겨 갖고 가 “나는 가난하다”면서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10만 불에 팔려고 하다가 붙잡혔던 것이다.

  · 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서 발생한 금관총 출토유물의 도난사건.

    - 한국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유명한 유물도난사건

    - 도난 사실이 밝혀진 것은 11일 아침이었다. 범인은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금관을 제외한 나머지 순금제 유물인 과대·요패·귀고리·팔찌·반지 등을 몽땅 싸 갖고 사라졌다. 황금유물만 노린 도둑이었다.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싸 갖고 가기가 거추장스러워서였는지 어쨌든 그것만 무사했다.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황금유물 도난사실이 알려지자 경주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신문들은 약 1만 원 상당의 신라 귀금속품이 도난당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용의자 몇 명이 검거되었으나 그들은 범행을 부인했고 증거도 없었다. 범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도난당한 순금유물들이 곧바로 일본이나 어디로 유출되지나 않았을까. 혹은 범인이 단순한 금덩어리로 만들어 팔아먹으려고 유물의 형태를 짓이겨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나지는 않았을까.’

  경찰보다 경주 시민들이 더 초조해 했다.

  경찰과 박물관측에선 범인이 보통 무식한 도둑일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 “천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 갖고 있어도 요즘의 금과 달라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또 그때만 해도 무덤 속에서 나온 물건을 집안에 갖고 들어오면 반드시 식구 중의 누가 앓거나 변고가 생긴다는 미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앓는 사람이 있는 집이나 무슨 변고가 있는 집을 특히 주목해서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유언도 퍼뜨려 범인에 대한심리적인 작전도 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해가 바뀌어 1928년 봄이 되어도 범인과 도난유물은 오리무중이었다. 경찰 수사는 절망적이었다. 경주로 유람객을 유치하는 데 다시 없는 중요한 박물관 보물을 영원히 잃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경주번영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난당한 물건의 소재지나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에겐 1,000원의 사례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도난 미술품에 대한 국내 최초의 거액 현상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정보도 단서도 잡히지 않았다. 안타깝게 5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5월 20일 새벽 5시께의 일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변소를 치러 다니던 한 노인이 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다가 대문 기둥 밑에 놓여진 흰 백로지로 싼 이상한 보따리를 발견했다. 다가가서 지게작대기로 넌지시 찔러보니 속에서 찰그락 하고 금속음이 울리고, 싼 종이의 한켠이 벌어졌다. 그 순간 노인은 깜짝 놀랐다. 번쩍이는 황금빛. 숨을 죽이고 물건을 다시 살펴보던 노인에게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박물관 도난품?

  노인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황금 보따리를 들어 가슴에 안고 거름지게를 진 채 경찰서로 곧장 달려가서 숙직실 문을 두드렸다.

  노인이 들고 온 보따리는 과연 경주박물관에서 도난당했던 그 순금 유물들이었다. 기적의 생환이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범인은 반지 하나와 그밖의 순금장식 몇 점만 갖고 나머지를 고스란히 경찰서장 관사 문밖에 갖다놓고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현재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는 금관총 ‘과대와 요패’가 그때 도난당했다가 되돌아온 물건이다.


  (3) 도난당한 황금 모조금관

  · 경주박물관의 금제유물을 노린 도둑이 1956년에도 있었다. 1927년의 첫번째 도난 때엔 범인이 지붕과 벽면을 뚫고 유물진열실로 침입하려다 실패한 후 나중엔 정면의 이중철문의 자물쇠를 뜯고 들어갔지만 이번엔 저녁 때 박물관 진열실 문이 닫히기 전에 관람객을 가장하여 잠입해 있다가 범행을 감행했다. 이때의 목표물은 바로 금관이었다.

  금관총 출토유물의 두번째 수난이었다. 앞의 범인은 금관에만은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자질구레한 금제품이 아니라 신라고분에서 나온 최대의 국보유물인 금관, 바로 그것을 훔쳐 팔아먹으려고 했으니 참으로 대담한 자였다. 치밀하게 유물실에 잠복해 있던 범인은 밤중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일을 치렀다. 그는 국보 금관만 싸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국보 금관의 도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만ㅇ리의 경우를 생각해서 똑같은 모조품을 만들어 진열장에 넣었던 가짜 금관이었다.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눈을 가진 사람이면 그것이 모조품이란 것을 한눈으로 식별할 수 있었지만 범인은 찬란한 황금빛에만 현혹됐을 뿐 유물 감식엔 무식했다.

  사건 발생 후 경주박물관에선 도난당한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신문들도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범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훔친 금관을 막보따리처럼 싸 갖고 부산 방면으로 탈출하려고 경주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범인은 자신의 범행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어보고 그제서야 그것이 ‘가짜 금관’이란 사실을 알았다. 범인으로선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그러나 ㄱ는 물건을 박물관에 도로 보내지도 않았고 경찰에 자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주역에서 곧장 시외의 서천께로 도피해 가서 모래밭을 깊숙이 파고 그 속에 일확천금의 어리석었던 꿈과 진짜로 알았던 모조 금관을 함께 묻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범인은 결국 금관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는 모든 경위를 자백했다. 그러나 그의 자백에 따라 서천 모래사장으로 갔던 경찰은 그곳에 묻었다는 모조 금관을 찾지 못했다.

  · 신라시대의 황금보관을 노린 도둑은 8·15 직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도 나타났다. 그때 박물관에선 과거 일제 때에 경주 고분에서 발견된 세 금관(금관총·금령총·서봉총 출토)의 모조품을 하나씩 만들어 일반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진짜 유물들은 불안한 사회정세에 비추어 금고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출토지인 경주의 박물관에는 가장 유명한 금관총 금관의 모조품을 내려 보내고, 서울의 경복궁박물관에 진열된 것은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을 모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짐짓 염려하고 대비했던 그대로 금관을 노린 도둑이 침입했던 것이다.

  어느날 밤, 경복궁의 국립박물관 금관 진열실에 잠입한 도둑이 두 금관을 모조리 들고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에야 박물관 직원이 그 사실을 알았다. 이때의 범인도 10년 후에 경주박물관의 모조 금관을 훔쳤던 범인처럼 그것이 모조품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무식한 도둑이었다. 박물관측에선 즉시 신문을 통해 도난당한 금관이 순금이 아닌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물건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역시 신문보도로 가짜란 사실을 안 범인이 실망하여 밟아 뭉개버린 모양이었다.

  ·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한국의 세계적 고대 미술품인 3개의 금관 중 ‘금관총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 ‘금령총 금관’은 보물 제338호, 그리고 ‘서봉총 금관’은 보물 제339호로 각각 지정 보호되고 있다.


  (4) 봉은사 보물 향로 도난사건

  · 1963년 5월 9일, 문화재관리국 직원 한 사람이 봉은사에 보관돼 있던 보물 제321호의 ‘지정(至正) 4년명’ 고려 ‘청동루은향로(靑銅縷銀香爐)’의 보호상태를 확인하려고 나갔다가 향로가 감쪽같이 도난당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절도 용의자는 자칭 수도승으로 제주도에서 수도생활을 하다 올라왔다면서, 한달 전 부터 봉은사에서 숙식을 하다가 사라진 유모(당시 32세)였다.

  범인 수사에 착수한 지 일주일 만에 용의자를 검거하고 향로를 되찾았다.


  (5) 국보 청동향로 도난사건

  · 1965년 1월 19일,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 보관돼 있던 국보 제75호의 고려시대 청동향로(정식 명칭은 청동함은향완)가 도난당함.

  주범인 송아무개는 표충사 국보향로를 절취한 후에도, 경기도 안양읍의 염불암에서 벽에 걸려 있던 불화를 훔쳤고,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작은 석불좌상 2점을 훔쳐 장물아비인 이아무개에게 팔아먹었다.

  이들은 사건 발생 70일 후에 검거되었고, 도난당했던 유물들은 장물아비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6)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테리

  · 1967년에는 두달 간격으로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국보 제76호의 ‘이충무공 난중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다행히 도난당했던 두 국보 중 불상은 사건 발생 13시간 만에, 그리고 ‘난중일기’는 열흘만에 되찾았다.

  ·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경,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이 덕수궁미술관 2층 제3전시실의 진열장에서 백주에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

    - 그날도 미술관은 평일처럼 오전 9시에 전시실 문을 열고 9월 24일부터 한 달 동안 계속돼 온 해방 후의 출토 및 발굴문화재 특별전 관람객을 입장시키고 있었다.

  제3전시실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김영석 씨가 국보 불상의 도난 사실을 발견한 것은 오전 10시 40분께였다. 잠시 딴 방을 돌다가 제3실에 돌아온 그의 눈앞엔 청천벽력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게 높이 1m의 진열대 위에 놓여져 있던 사방 60cm의 유리곽 속의 국보 고구려불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담한 범인은 유리곽 속에 푸른색 볼펜으로 급히 적은 메모 쪽지를 남기고 있었다.

    “국장님(문화재관리국장을 지칭)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 부리다 죽은 자식 자지 만지는 격이 되지 말고. --24일. 이따 11시께 국장님께 아리겠음(인편·편지·전화 등). 지문감정 의뢰 불요.”

  물론 국보 불상의 도난사실은 즉시 경찰에 신고되었다. 치안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전국의 공항 및 항만을 긴급 봉쇄하고 철저한 비상검문을 실시하도록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서울 시경에서는 민완 형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벌써 안전한 은닉처에 숨어 있었다.

  한편 하갑청 문화재관리국장은 범인이 메모로 약속한 자진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30분쯤 지난 때에 하국장의 집에 범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은 “미안하다. 돌려주겠다”는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오후 3시와 6시에도 걸려 왔다. 같은 말의되풀이였다. 불상을 언제 돌려주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범인은 메모에서 24시 안에 반환하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국장은 피가 마르는 듯한 초조감 속에 범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밤 11시 5분께, 드디어 네번째로 범인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다. 부인 서정희 씨가 먼저 전화를 받은 후 하국장에게 넘겨주었다.

     “불상을 한강철교의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맡의 모래밭에 묻어 놓았으니 찾아 가시오”

  마치 스릴러 영화의 대사 같았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하국장은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부인과 운전사 셋이서 한강으로 차를 달렸다. 과연 불상이 비닐봉지에 잘 싸여져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극적인 사건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하국장이 경찰에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한 처사와 범인이 20만 원을 요구했다는 설은 뒤에 많은 의혹을 낳게 했고, 사건 내막은 시종 미스테리로 남았다.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7) 난중일기 도난사건

  · 국보 제76호의 ‘난중일기’ 도난사건은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테리가 채 잊혀지기도 전인 그해(1967년) 12월 30일 밤에 발생했다. 그야말로 민족혼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무뢰한이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침입하여 ‘난중일기’를 계획적으로 훔쳐갔던 것이다.

  범인은 사건 발생 10일 만인 1968년 1월 9일, 부산 시경 형사대에 의해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도난당했던 ‘난중일기’도 무사히 되찾았지만, 잡고 보니 범인은 1963년 봄에 서울 봉은사에서 보물 제321호의 ‘지정4년명 고려청동향로’를 훔쳐 서울 시내의 골동상에 팔아먹으려다가 붙잡혔던 전과범 유근필이었다. 그는 이번엔 훔친 ‘난중일기’를 일본 쪽에 팔아먹으려고 부산에서 루트를 찾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임진왜란 때 침략해 온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민족과 국가를 지킨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과 애국혼이 담겨져 있는 친필 기록물이자 지정국보인 ‘난중일기’를 딴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8) 삼국사기 도난사건

  · 1970년 7월에 경북 안강읍의 옥산서원에 전래되던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삼국사기’가 도난당하였다.

  경찰 수사로 뒤에 다 찾은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2질의 ‘삼국사기’가 보존되던 중에 독락당에 있던 1질 9책은 끝까지 되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중단되었다.

  도난을 면한 1질은 사건 후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  이구열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요약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