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일타홍과 정승 김희수(건달의 애인) | |
* 금산의 향교입구에 있는 비석중에 前郡守沈政丞喜壽去思碑(전군수심정승희수거사비)
라고 씌여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심희수 정승의 출세기 그 때 눈에 반짝하고 띄는 기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얼굴도 예쁘고 섹시하게 생겼어요. 큐피드의 화살은 한 방에 심장을 관통했고, 저의 가슴은 정신없이 뛰었어요. 너 완전히 찍혔어. 저는 그 기생 옆으로 바짝 다가가 털썩 주저앉으며 곁에 있던 술 잔을 내밀었어요. 야, 따라. 그러자 그녀는 대뜸 제 손을 잡더니 밖으로 끌고 나가는 거였어요.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어 진짜로 그녀가 찾아 왔어요. 놀랍고 기뻐 죽을 지경이었어요. 저는 즉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방으로 잡아 끌었지요. 그런데 매정하게 제 손을 뿌리친 그녀는 글쎄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거여요. 일타홍의 정성이 열매를 맺은 것으로 모두가 그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칭찬했어요. 하지만 일타홍의 마음은 한 없이 슬펐대요. 천한 몸이라 숙명적으로 양반가의 정실부인은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일타홍은 저를 장가보내기로 결심하고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했어요. |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아랫글은 '김현룡의 한국인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심희수(沈喜壽)를 출세시킨 일타홍(一朶紅)
심희수는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에 좌의정과 영돈녕부사를 역임했는데,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호탕했다.
어렸을 때 과부의 아들로 자라면서 자유분방하게 놀아, 10여 세 되면서부터는 고관 부귀가에서 열리는, 기생이 함께 하는 잔치에는 예외 없이 심희수가 초청되었다. 잔치에 참여하여 놀 때는 비록 의복은 거지차림이었지만, 기생들과 어울려 희롱을 하면서, 흥을 돋구어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재미있게 잘 놀았다.
하루는 어느 고관 집 잔치에 참여했는데, 금산(錦山)에서 금방 올라온 일타홍이란 기생도 이 잔치에 불려와 있었다. 일타홍은 얼굴이 매우 예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심희수가 그를 가까이하여 희롱하니 일타홍도 또한 싫어하지 않고 잘 받아주었다.
잔치가 무르익었을 무렵에 일타홍이 용변을 보러가면서 심희수를 살짝 불러내기에, 심희수가 따라나가니 일타홍은 심희수의 집 위치를 자세히 물은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이 끝나면 제가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도련님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계십시오."
그래서 심희수는 잔치가 끝나자 곧 집으로 돌아와서 방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제법 깊어졌을 때 일타홍은 약속한 대로 심희수의 집으로 찾아왔다. 심희수는 반갑게 맞이하여 방으로 안내하고, 둘이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여자 종이 심희수의 모친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모친은 놀라고 아들과 일타홍을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일타홍은 모친에게 절을 올리고 앉아서 이야기했다.
"도련님이 지금 비록 분별 없는 행동을 하고 다니지만 장래에 훌륭하게 될 인물입니다. 모친께서 저를 도련님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제가 10년 기한하고 도련님을 독서하도록 권장해 크게 출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친은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던 차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일타홍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고맙다고 하면서 감사를 표했다.
이 날밤 심희수는 일타홍과 함께 아름다운 밤을 지냈다. 심희수는 호탕한 성품으로 인해 잔치를 흥겹게 잘 이끌고 놀기를 좋아했지만, 여인과의 잠자리는 아직까지 가져보지 못했고, 일타홍도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남자와의 잠자리는 가진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청춘남녀로서 맨살을 처음 맞대니, 살이 닿는 곳마다 가벼운 경련이 일면서 그것은 곧 가슴과 머리로 전달되어 정감을 한없이 끓어오르게 했다. 속살의 접속이 이루어지고 고조된 감흥에 따라 몸이 움직임이 빨라질 때에는 둘이 함께 껴안고 둥둥 떠서 공중을 훨훨 나는 것 같은 환희를 느꼈다. 너무 좋았고 너무나 감동적인 밤을 지냈다.
이후로 일타홍은 심희수와 함께 살면서 심희수를 서당에 가게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옆에 앉아 독서를 권장했다. 또 얼마 후에는 심희수를 설득해 양가집 규수를 택하여 결혼하도록 했다.
그래서는 5일을 주기로 정해놓고, 4일 밤은 아내와 함께 잠자리를 하게 하고, 5일 중 하루만 자기와 동침했다. 그러나 심희수는 아내보다는 일타홍을 더 좋아해, 이 규칙을 어기고 아내가 잠들고 나면 가만히 일타홍에게로 오니, 이때 일타홍은 문을 잠그고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심희수는 일타홍과 놀려고만 하고 독서를 게을리 하니, 하루는 심희수가 서당에 간 뒤 모친에게 말했다.
"이 상태로는 도령님의 마음을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집을 떠나서 도련님의 결심을 다지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고, 도련님이 열심히 노력해 과거에 급제하는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과, 그 동안에 자신은 결코 몸을 더럽힘이 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떠났다.
글방에서 돌아온 심희수가 모친으로부터 일타홍이 집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여러 곳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열심히 노력하여 급제해야만 일타홍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과거공부에 열중했다.
이때 집을 나간 일타홍은, 나이 많은 옛날 재상집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자진하여 종이 되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니까 노 재상은 가상하게 여기고 양녀로 삼아 데리고 있었다.
이후 3, 4년이란 세월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 동안 쉬지 않고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심희수는 드디어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를 하게 되었다. 심희수가 3일 동안 말을 타고 서울 거리를 돌면서 유람하는 3일 유가 때에, 부친 친구인 한 늙은 재상집을 방문했다.
이때 재상이 대접하는 음식을 먹어보니, 어쩐지 옛날 일타홍이 만든 음식과 맛이 같기에, 재상에게 옛날의 일타홍 이야기를 하고, 그 덕택으로 급제하게 된 내력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늙은 재상은 자기가 양녀를 얻어서 이 음식을 만든 것이라고 말하고, 양녀를 부르니 안에서 일타홍이 나타났다. 그래서 심희수는 감격적인 재회를 하였고, 곧 재상의 양해를 얻어 일타홍을 자기 말 뒤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타홍을 다시 만난 모친도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후로 심희수는 집안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일타홍과 매일 밤 즐거움을 나누면서 너무나 좋아해, 하룻밤에 몇 번씩 일타홍의 배 위에 올라갔다.
심희수의 벼슬이 높아진 뒤, 일타홍은 남편을 불러 말했다.
"10여 년 동안 오직 서방님 출세만을 돌보느라고, 고향의 부모님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서방님이 금산의 관장으로 나가시면 부모님을 만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노력해 보십시오."
심희수는 일타홍의 이 부탁에 따라 곧 교섭을 해 금산 군수로 임명되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일타홍은 기뻐하면서 함께 금산으로 내려가, 수소문 끝에 부모와 친척들을 만나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했다.
그런 다음에 일타홍은 부모와 친척들에게 이렇게 일러두었다.
"이후로는 절대로 저를 찾지 말아 주십시오. 부모님과 친척들이 계속 찾아오면 관청에 폐를 끼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당부한 다음에 관청으로 돌아와 부모와의 연락을 끊고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하루는 심희수가 동헌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일타홍이 여자 종을 시켜 급히 안으로 좀 들어와 달라고 연락했다. 심희수가 짜증을 내면서 지금 급한 공무처리가 있으므로 좀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다시 여자 종이 나와서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마님께서 서방님과 영결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지체말고 빨리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매우 급한 일 같습니다."
이렇게 다급하게 아뢰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심희수가 놀라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일타홍은 고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말했다.
"소첩은 이제 이 세상의 인연이 끝났으니 영결을 하옵니다. 다만 소첩의 소원이 있습니다. 제가 죽거든 서방님 선산(先山) 발치에 좀 묻어주십시오."
이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희수는 슬퍼하면서 곧 군수 직책을 사임하고, 일타홍의 관을 운반해 서울로 행했는데, 금강(錦江) 나루를 건너니 갑자기 한 줄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에 심희수는 일타홍의 영혼이 비로 되어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픈 심정을 한 수의 시로 나타내어 영혼을 위로했는데,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으니,
금강에 가을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錦江秋雨丹旌濕)
정든 사람 영결하며 뿌리는 눈물이라(疑是佳人化淚歸)
라고 한없는 슬픔을 담아 읊었었다.
- (<한국인 이야기>제8권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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