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고성 송학동 ‘채색고분’

道雨 2008. 1. 12. 09:52

 

[한국사 미스터리] 고성 송학동 ‘채색고분’

“무덤 안이 온통 빨개요. 빨리 와봐요”

늦더위가 한창이던 2000년 8월27일. 일요일인데도 필자는 심봉근 동아대 박물관장의 급박한 전화연락을 받았다. 긴급 발굴 지도위원회였다. 긴급 지도위는 ‘깜짝 놀랄 만한 발굴거리’가 생겼을 때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 열리는 것. 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가뜩이나 1980년대부터 ‘일본식 묘제인 장고형 고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곳이 아닌가.

 

일출의 광채 같이 나타난 채색고분=필자는 그야말로 ‘버선발’로 발굴현장으로 날아갔다. 현장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터널처럼 마련된 널길, 즉 연도를 따라 무덤방인 석실(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온통 붉은 빛이었다. 전등 불빛에 비친 무덤 내부 천장과 주변은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보이는 광채 같았다.

 

실로 발굴 인생 30여년에 처음 보는 채색고분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채색고분을 ‘장식고분(裝飾古墳)’이라 한다. 규슈지역에서만 해도 지금까지 110여기의 무덤에서 확인된, 일본 특유의 무덤내부 장식이다.

“마치 일본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어요”. 심봉근 교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일본 규슈대에 유학하여 일본 고고학을 전공했으니 일본의 채색고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은 채색고분이 이곳 고성에서 확인되다니.

 

남아있는 부장유물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가야는 물론 신라·백제 토기와 함께 일본의 토기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는 전형적인 가야무덤 발굴품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다.

 

가야·신라·백제·왜 문화가 ‘총집합’한 고분=문제가 복잡해졌다. 가뜩이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란으로 ‘민감했던’ 송학동 고분인데 느닷없는 채색고분 발견으로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었다. 일본열도에 보이는 채색고분이 왜 이 지역에 나타나느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야·백제·신라·일본계 토기들이 함께 묻혀 있는 이유는 무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발굴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나라에 유적답사차 나와 있던 일본 고고학 관련 연구자들이 일정을 바꿔 현장을 다녀갔고, 일본에서도 전문가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그만큼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군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은 이같은 논란 속에 지난해 6월30일, 3차의 발굴조사를 끝으로 고고학적인 조사는 일단락됐다. 그 결과 80년대부터 제기됐던 장고형 고분, 즉 전방후원분 논쟁은 종식됐다.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방후원분’의 ‘후원(後圓)’으로 주장됐던 후원분의 위치에는 전형적인 가야무덤양식인 ‘수혈식석실분(구덩식 돌방무덤)’을 중심으로 모두 17기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방(前方)’부로 생각됐던 곳에는 바로 채색고분인 ‘횡혈식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또 이들 무덤 사이에 ‘앞트기식 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종합하면 이 고성 송학동 제1호 고분은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등 3가지 무덤 형태가 둥근 봉토분으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그런 만큼 외형상 전방후원분처럼 보인 것이지,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가지, 하나로 만들어진 구릉안에 여러 형태의 무덤형식이 모여 있는 것은 가야지역에서는 이 고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게 흥미롭다.

 

소가야 마지막 왕과 왕비의 부부묘?=그렇다면 과연 이 고분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일단 이 고분에서 가야·백제·신라는 물론 일본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6세기 전반으로 비정되는 고분의 ‘다국적’ 출토 유물에서 보듯 고성은 주변과 나아가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당시 무역업자이거나, 혹은 이러한 유물을 소유할 수 있는 지배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여기서 일본식으로 붉게 칠한 ‘굴식 돌방무덤’과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을 주목하자. 먼저 채색된 ‘굴식 돌방무덤’. 이 형태는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던 장식고분의 한 유형임을 감안하자. 그렇다면 피장자 역시 일본과 연관있는 사람의 무덤일 것이다. 다음 가야식 무덤인 ‘구덩식 돌방무덤’. 소가야는 서기 532년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와 함께 신라 법흥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발굴단은 바로 이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이 소가야 마지막 임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소가야는 가야연맹체 가운데서 해상 루트를 통해 신라·백제·일본 규슈와 연결되는 교류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결국 ‘구덩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인 소가야 왕이 먼저 죽어 묻히고, 왕비가 채색고분인 ‘굴식 돌방무덤’에 묻힌 것이 아닐까. 이른바 ‘부부묘의 개념’이다. 왜 일본식 채색고분(굴식 돌방무덤)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보는가. 심봉근 교수는 “남자유물인 무기류는 보이지 않고 유리 목걸이·유리 구슬 등 여성 장식품들이 주로 출토됐다”고 밝혔다. 피장자가 여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주변국가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로만그라스는 4~5세기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머나먼 지역의 고급 물건들이 교역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예이다.

 

◇“왕비는 왜에서 시집온 여인?”=뿐만 아니라 채색고분 안에서 유구열도(琉球列島·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조개인 이모조개 껍데기로 장식된 말 장식품이 수습된 것도 이러한 교역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무역상들의 상주지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고성이란 가야지역에 신라계·백제계·일본계 등 ‘다국적 유물’이 나타나고, 그와 함께 일반적인 가야묘제와는 다른 특수한 묘제가 마련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규슈지역 유력집단의 여성이 소가야 왕에 시집와 죽음으로써 마련된 묘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기대된다.

 

이 고성 송학동 제1호분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나서 고성에서는 옛 고성의 이름찾기운동 세미나가 열렸다. 즉 가야연맹체 가운데 ‘작은 가야’라는 뜻인 ‘소가야’라는 명칭은 유적발굴조사를 통해 봐서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소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기록에서 5가야에 대한 설명 중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고성이 신라에 통합되고 나서 고자군(古自郡)이라고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3세기대 중국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自彌東國)’이란 표기가 있다. 따라서 소가야보다는 원래의 이름인 고자미동국, 또는 고자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유적발굴조사가 이루어지다 보면 이를 통해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등한시했던 고대사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하려는 새로운 노력의 한 형태라 할 것이다.

 

 

[관 련 기 사] 결혼동맹은 약소국 가야의 생존전략?

다국적 유물로 추론해 본 고대의 외교전

 

송학동 채색고분의 주인공이 소가야 왕에게 시집온 왜(倭)국 여인이라는 설은 아직 ‘문제제기’ 단계이다.

하지만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 화랑세기는 8세 풍월주 문노(536~606년)의 어머니가 야국왕(왜국왕)의 공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문노공의 어머니가 가야국 문화공주인데, 문화공주는 야국왕이 바친 여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록을 근거로 “송학동 채색고분의 주인공이 문노의 어머니가 아니냐”고 단정짓는 것은 물론 ‘난센스’. 다만 신라와 고령 대가야간 결혼동맹을 맺은 기록을 주목해보자. 그렇다면 왜도 외교적인 목적으로 가야에 공녀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522년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자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냈다. 대가야 입장에서는 백제의 고립작전을 피하기 위해 신라와의 결혼동맹을 제의했고, 신라는 가야통합의 계기로 보고 선뜻 받아들인 것이다. 이 이벤트는 일본서기가 “가라왕(가야왕)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 100인의 시종을 함께 보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성대한 국제결혼이었다.

 

그런데 이 결혼동맹은 동상이몽을 펼치던 두 나라의 이해가 엇갈려 파탄나고 말았다. 당시 대가야 이뇌왕이 결혼동맹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신라인 시종 100인을 각 지방에 분산배치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신라 법흥왕이 비밀리에 이들에게 신라의 의관을 입으라고 지시, 신라의 위엄을 과시해 외교적인 분란을 일으키면서 파탄난 것이었다.

 

당시 가야는 신라·백제·고구려·왜 등이 국운을 걸고 각축을 벌인 쟁탈의 요소였다. 낙동강은 물론 섬진강을 끼고 있어 내륙으로 진입하는 수상교통이 발달했고, 왜와의 교역창구를 이루고 있었던 게 그 이유. 특히 이른바 ‘금관가야’는 예로부터 철의 생산지였으며 동아시아 철 공급의 젖줄이었다.

 

송학동 고분 발굴자인 이동주 동아대 박물관 연구원은 “신라가 철 공급지인 금관가야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를 장악하자 철을 잃지 않을까 염려한 백제와 왜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섬진강과 낙동강 유역의 중간)인 고성의 소가야를 달래기 위해 연합전선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왜가 흔들리는 소가야왕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공녀를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송학동 고분에서 다국적 유물이 나오는 것은 바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던 약소국 소가야의 고민을 상징하는 드라마틱한 증거가 아닐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3년 08월 25일 15:58:50

출처 : 맑고 밝은 세상
글쓴이 : 늘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