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야속한 서방님

道雨 2008. 2. 19. 10:54

 

 

 

야속한 서방님

  윤관 장군의 연인과 그의 죽음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세상에 나처럼 불쌍하고 원통하게 죽은 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고 원한이 사무쳐 눈물마져 말라 버렸습니다.

  진정코 아깝고도 야속한 것은 하나 뿐인 목숨입니다. 서방님을 위하여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건만 오호라 서방님은 일부러 나를 골려주려고 연극을 꾸몄다고 합니다. 우째 이런 일이 나에게....

  1997년 늦 가을, 한국의 젊은 기사 이창호 9단은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을 3대 0 스트레이트로 물리치고 대망의 삼성화재배를 차지해 거금 3억원을 거머쥐었다고 합니다. 이창호는 초반 고전을 하였지만 곧 좌하귀를 버리는 과감한 사석전법을 전개해 위기를 넘기고, 고바야시의 실수를 끊질기게 붙잡고 늘어져 1백 97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었어요. 세계 최강의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이창호는 그동안 세계대회에서 여덟 번이나 우승하는 등 발굴의 실력을 발휘했으나 매메드대회에서는 우승하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더니 이번에야 오랜 숙원을 푼 격이지요.

  그래요. 세상 일은 패배 뒤의 승리가 더욱 값지고, 싸움에서 지는 일은 흔한 일인데, 어찌하여 이 목숨이란건 원위치가 없습니까?

  가수 설운도도 ‘원점’이란 노래를 불러 빅 히트를 쳤지 않습니까?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외로운 이 혼만은 오늘도 파주의 용미리에 있는 낙화암에 내려앉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합니다. 오, 서방님!

  저는 고려 때에 여진족을 물아내고 9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한 윤관(尹瓘, ?~1111) 장군의 애인입니다. 여진족은 장군의 이름만 듣고서도 와들와들 떨었지만 저에겐 언제나 착하고 다정한 낭군이었지요.

  우리는 늘 함께 였어요. 옛 말에 ‘사랑하면 몸과 마음은 서로 반대다.’라고 했어요. 비록 몸은 보내지만 마음은 님을 따라가고, 가는 사람 역시 몸은 떠나 가지만 마음은 두고 간다고요.

  그러고 보니, 시기(詩妓) 김부용(金芙蓉)이가 생각나네요. 어느 날, 정담을 나눈 어떤 남자와 헤어지는데 서로 배웅하는 장소에서 남자가 먼저 아쉬움을 노래했어요.

     "나의 혼은 그대를 좇아가고 빈 몸만 문에 기대어 섰소."

  그러자 부용이도 시로써 화답하며 그의 애간장을 뜨겁게 녹여 주었어요.

     "나귀 걸음이 느리기에 내 몸이 무거운가 했더니 남의 혼 하나를 함께 싣고 있었소."

  여진족이 국경에서 약탈을 일삼자, 임금은 장군에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저는 윤 장군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주안상을 대접했어요.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소첩은 매일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빌겠어요.”
  “허허, 염려하지 마시게. 내가 누군가. 만약 내가 싸움에서 이기면 붉은 깃발을, 지면 흰 깃발을 들고 오겠소.”
  “저는 장군님을 믿어요. 분명히 붉은 깃발이 보일 거여요.”

  저는 장군님이 적군을 토벌하여 온 세상이 빨갛게 물들 것을 확신하며 매일같이 높은 대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았어요. 혹시나 전쟁 통에 전사나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진저리가 처졌어요. 이제 저는 윤 장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여자가 된 거여요.

  전화도 없고, 라디오나 테레비도 없으니 어떻게 전황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무조건 마음을 조리며 기다렸어요.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 밤은 저의 마음을 한없이 고적하게 만들었어요. 특히 장군이 떠난 자리에 그대로 놓인 원앙금침을 바라보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뼈까지 시려 와 목이 메이도록 울었어요. 이해해 주실 것이라 믿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 날도 평소와 같이 동구 밖으로 나가 먼 북쪽을 바라보는데, 멀리서 먼지가 자욱히 일며 많은 병사들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어요. 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어요.

  저는 정신을 차리고 느티나무로 기어올라 가 저 멀리를 바라보았어요. 꼭 붉은 깃발이 펄럭이길 바랬는데, 바램과는 달리 흰 깃발이 너풀댔어요.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 보아도 역시 흰 깃발이었어요.

  저는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으며 나무에서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왔어요. 윤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생각한 저는 앞 뒤를 가릴 것 없이 곧바로 연못에 몸을 던졌어요.

  낭군을 위해 절개를 바친 열녀로 청사에 길이 남을 일이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혼은 두둥실 하늘로 올라가는데, 물 위에 떠오른 제 몸을 누군가 부둥켜 안고서는 통곡을 하는 거여요.

  저는 무척이나 화가 났어요. 비록 시신이지만 외간 남자가 내 몸을 주무르는 것은 망자를 욕보이는 처사이지요. 너무도 화가 치밀어 그 자를 혼내주려고 팔을 걷어 부치며 멱살을 움켜 쥐었어요.

  그런데 아뿔사, 저도 모르게 손을 놓고 말았어요. 놀랍게도 그 사람은 윤관 장군이었어요. 너무도 기가 막혀 말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았어요. 닭똥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장군은 통곡하며 말했어요.

  “여보, 나는 여진족을 모조리 토벌했다오. 그런데도 당신을 놀려 주려고 일부러 흰 깃발을 들고 온 거라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저는 즉시 염라국으로 달려 가 염라대왕을 붙잡고 실수로 죽었으니 물려 달라고 애원했어요. 하지만 염라대왕은 쌀쌀맛게 거절했어요.

  “공동묘지를 가 보거라. 한 개라도 핑계없는 무덤은 없도다. 비록 그대의 죽음이 억울할 지라도 그 역시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에서 비롯된 일이니 나에게는 책임이 없도다. 놔라, 바지가 벗겨지면 꽃뱀 죄를 덧붙여 독사 지옥으로 보낼 것이니라.”

  그 ��부터 저는 피 눈물을 흘리며 구천을 떠돌기 시작했어요. 윤관 장군은 당신의 지나친 장난을 후회하며 저를 후하게 장사지내 주어, 제가 죽은 곳에 ‘낙화암’이란 비석을 세워 주었어요. 바로 파주군 천현면 웅담리에 있어요.

  그 후 윤 장군에게 나쁜 일만 일어 났어요. 1107년 여진족의 태반을 섬멸하고는 그곳에 9성을 축조하였는데, 약은 여진이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며 빌어 고려 조정은 급기야 철수를 했어요.

  이 때 조정은 당초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맞지 않았고, 터전을 잃은 여진의 보복이 두렵고, 거리가 너무 멀어 안전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장군이 생명을 걸고 공략한 9성을 돌려 준 거지요.

  여진 토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정은 장군을 모함하여 관직과 공신의 칭호조차 삭탈하였고,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만 소모하였다고 비방했어요. 너무나 억울한 처사지요. 군대를 철수한 장군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못한 채 벼슬을 물러났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어요. 인간 만사가 모두 허망하고 덧없을 뿐이지요.

  파주에 있는 윤관 장군의 묘 앞에는 장군께서 타고 다니단 말과 가마의 무덤이 있어요. 동물의 무덤은 종종 있지만 가마 무덤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일 거여요. 그 만큼 인간적이고 정이 많으신 분이였지요.

  윤관 장군을 추모할 때면 어렵지만 저의 외로운 혼도 함께 위로해 주세요. 덕을 쌓으면 언젠가는 복을 받을 거여요. 안녕히 계세요.



<사진; 부여의 낙화암, 백제의 패망과 함께 삼 천 궁녀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