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과 아들 황수신
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에겐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하게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수신이 밖에서 돌아오니, 황 정승이 관복을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다.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까닭을 물었다.
황 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아들로 대접했는데 도대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다.
* 위의 내용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있는 이야기이다.
황수신에 관하여
황희정승의 아들인 황수신은 조상 덕분에 출사하게 된 음직 출신으로서 영의정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었다.
구치관의 후임 영의정에 청백리로 황희의 셋째아들 황수신이 발탁 되니, 1467년 세조12년 4월 6일의 일이었다.
이로써 황수신의 가문은 조선조 최초 부자(父子) 영의정을 낸 명문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황수신은 태종6년 아버지 황희가 우사간대부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를 수효(秀孝), 호를 췌부(?夫)라했던 황수신은, 열여섯 소년시절에 사마시에 나갔다가 사소한 일로 시관에게 모욕을 당하자 크게 분개, 한 수의 시를 갈겨 써 남기고 다시는 과거 따위는 거들떠 보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굳혔다.
『擇民濟世非科第 나라를 구제하는 길은 과거가 아니다
不必平生作腐儒 내 평생 저 썩은 선비처럼 되지 않으리』
그러나 황수신은 우연히 김학노(金鶴老)라는 역술가의 “을유년에는 상위에 오르겠나이다!”라는 말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 학문에 정진하던 중, 흥천사라는 절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뒤에 세종임금에 오른 충녕대군의 눈에 띄어 서로 얼굴을 익히게 되었고, 대군은 막히는데 없이 글을 잘 외는 황수신이 곧 황희의 셋째 아들임을 머릿속에 심게 되었다.
이리하여 곧 왕위에 오른 세종은 황희의 아들 가운데 이미 관직에 나간 두 아들 아래로 아직 출사하지 않은 황수신을 불러, 과거를 거칠 필요없이 종7품 종묘서부승직을 내리니, 종묘와 왕능앞의 정자각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비록 초임 관직으로 매우 보잘 것 없는 직위였으나 황수신은 성심으로 맡은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 그의 인품을 들어냈다.
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황수신은 종부시직장·사헌부감찰·지평·호조정랑·전라도경차관·상호군·경상도관찰사·좌승지 등 화려한 관직을 두루거쳐, 1446년 세종28년 국초이래 문과출신이 아니면 감히 넘겨다 볼수 없는 도승지에 오르니, 곧 세종임금의 비서실장이 된 셈이었다.
황수신은 세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여러 직첩을 거치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도성안에서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무(妖巫)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수년간에 걸쳐 결단을 미루어 쌓였던 옥송(獄訟)을 과감하게 처결하여 국법질서를 바로 잡는 과단성도 들어냈다.
그러나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사정 임원준(任元濬)에게 사소한 특혜를 준 일이 트집잡혀 파직 된 일도 있었으나, 새 임금 문종때 풀려 첨지중추원사로 복직되고, 뒤에 병조참판 때는 수양대군이 병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데 크게 공헌, 수양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세조가 즉위하자 황수신은 공신에 오르고 승진을 거듭, 좌참찬으로 명나라사신으로 나가 활약하고, 돌아와 우찬성에 판예조사를 겸해 세조를 보필하였다. 이윽고 남원부원군에 진봉된 황수신은, 충청도 아산의 농지를 무단점거한 일로 여러차레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의 입김으로 탈없이 넘어갔다.
1465년 세조11년, 명나라에 새 황제 헌종이 등극했는데, 하례사로 정승급 한사람을 보내야 했다. 이때 영의정은 신숙주, 좌의정은 구치관, 우의정은 한명회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현직 정승 중에는 뽑아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이에 세조는 외방에 출장중인 한명회를 대신하여 황수신을 우의정으로 임명, 뒷날 바로 하례사로 명나라에 보냈다. 이리하여 임무를 충실하게 마치고 돌아온 황수신은, 곧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니, 음직으로 출사한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황수신은 용모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었다. 관직에서는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는 제도는 반드시 추려내 바로잡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그를 아버지 후광으로 출세하였고, 세조의 등극에 공을 세워 공명을 누렸다고 삐딱하게 토를 달았다.
아마 아버지처럼 청백하지 못했고, 정통성이 결여된 세조의 과분한 총애를 받은 탓인 것 같다.
황수신은 영의정자리에 오른지 겨우 한달만인 그해 5월, 61세로 그만 병을 얻어 숨졌다. 시호가 열성공(烈成公)으로 내려진 그의 묘소는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고, 앞에 두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하나는 처음 세웠던 비였고, 다른 하나는 1943년 후손들이 마모된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비라하는데, 비문은 예조판서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것이라 했다.
전라북도 완주에 황수신의 부조묘가있고, 용진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서는 황수신을 배향하여 기리고있다.
황수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춘(春)은 호조참판, 둘째 찰(察)은 첨지, 3남 성(省)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막내 욱(旭)은 도사였다.
황수신의 맏형 치신(致身)은 호조판서였는데, 그는 슬하에 아홉 아들을 두어 후손에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황윤길(黃允吉)·정욱(廷彧) 등이 나왔다.
둘째 형 보신(保身)은 소윤을 지냈을 뿐인데, 학덕이 높아 유명했던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이 그의 사위였다.
황수신의 아우 직신(直身)은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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